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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이지 Nov 11. 2019

7-2. 그럼 우리도 이렇게 하지 뭐

일곱 번째 데이트 - 광부씨



N을 다시 만나기로 했던 토요일의 근무는 미치도록 바쁘고 힘들었다. 그를 다시 만나면 어떨까, 우리는 오늘 키스를 하게 될까 하는 생각에 들뜨기도 하고 한편으로 초조했던 나는, 근무가 끝날 무렵이 되자 그와의 데이트에 설렐 기운도 없이 지쳐버렸다. 그런 나에게 무엇을 하고 싶냐는 그의 물음에 나는 주저 없이 호텔에서 멀리 벗어나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내가 그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데이트 장소로 찍어 놓았던 호숫가 공원을 다 돌고 나서도, 바다처럼 끝이 안 보이는 호수의 모래사장을 따라 길게 난 산책로를 계속 걸었다. 그는 구두를 신은 내 발이 아플까 걱정해 주었지만 나는 그 길이 끝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우리는 우리가 심각한 커피 중독자들이라는 것과 날생선은 없어서 못 먹는다는 것, 우주를 탐험하는 게 아직도 꿈이라는 것, 어린 나이에 만난 전 배우자들의 배신으로 받은 상처도 너무 닮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직도 많이 쌀쌀한 호수 바람에 볼이 발그레해지고 손끝이 시렸지만, 그와의 이야기 외에는 그 무엇도 내 마음에 없었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흩어져 가고 그의 목소리와 웃음소리만이 내 곁에 머물렀다.


Woodbine Beach, Toronto, ON


그렇게 세상에 둘밖에 없는 듯 한참을 걷던 우리에게 벤치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십 대의 여자아이들과 그들의 엄마들로 보이는 무리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우리에게 애플 워치를 써 본 적이 있냐며 그게 정말 살만한 가치가 있느냐는 뜬금없는 질문을 해왔다. 우리는 조금 황당했지만 곧 그들과 짧지만 열 띄게 애플 워치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그리고는 다시 둘만의 길을 가는 우리에게 그녀가 소리쳤다.


“있잖아, 너희 둘 정말 잘 어울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순간 마주친 그의 눈도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가 손을 잡았던 적도 없고 연인일 수 있다는 어떤 기색도 없었는데, 그리고 실제로도 우리는 연인이 아니었는데 그녀는 어떤 생각으로 우리에게 그렇게 말했을까. 나는 그 순간이 마치 천사가 남녀 주인공들을 연결해주기 위해 인간의 행세로 나타나는, 그런 영화 속 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다. N는 그녀가 우리에게 그 말을 하고 싶어서 일부러 우리를 불러 세워 애플 워치에 대해 물어본 것 같다고 했다. 그녀의 의도가 우리에게 부끄러움과 웃음을 주기 위함이었다면, 그녀는 확실하게 성공했다.


오래 걷고 오래 이야기하느라 배가 고파진 우리는 다운타운의 한 일식집으로 향했다. 우리는 주차한 그의 차 옆에 비뚤게 놓여 있는 우편함을 바로 세워주고, 오래 걸었으니 우린 맥주 한잔 할 자격을 얻었다며 건배를 하고, 서로가 먹을 미스터리 초밥을 골라주었다. 추운 날 긴 산책 끝에 마시는 맥주 한잔에 몸이 나른해지자, 바에 나란히 앉아 있는 그의 넓은 어깨에 기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말을 걸어오는 그의 입술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부끄러워져서 다시 맥주를 마셨다.


모든 것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내 피곤을 말끔히 걷어준 우리의 산책, 정말 천사일지도 모를 그녀, 테이블이 없어 바에 나란히 앉아야 했던 레스토랑, 그리고 내 곁에 계속 머물고 있는 그의 목소리. 그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준비된 것처럼 완벽하게 느껴졌다.

 

그가 나에게 근처 지하철역에 내려 주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우리 집까지 데려다줘도 괜찮을지 물었다. 아직은 이른 사이이기에 내가 조심스러워할지 모른다는 것을 배려한 그의 마음이 고마웠다. 나는 내가 그를 편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어서 집까지 데려다 달라고 했지만, 또 그래야 키스를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Queen Street West, Toronto, ON


레스토랑을 나와 차로 돌아가는 길에 한 젊은 커플이 우리를 지나갔다. 원피스를 예쁘게 입은 여자는 꽃 한 다발을 손에 들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남자의 손을 잡고 있었다. 서로 가까이 붙지 않고 거리를 둔 채 잡은 손이나 긴장한 듯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둘의 걸음걸이가 누가 보아도 오늘부터가 일일인 커플이었다. 나는 우리를 지나쳐 멀리 사라지는 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 지나간 저 커플 봤어? 나 ‘너희 둘 정말 잘 어울려!’라고 말해주고 싶었어. 아까 그 여자처럼 말이야.”


고개를 돌려 그 커플을 보고 난 N이 대답했다.


“그럼 우리도 이렇게 하지 뭐.”


그리고 그의 커다란 손이 내 손을 잡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의 행동에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손에 힘도 주지 못하고 수줍게 내 손을 잡은 채 그는 앞만 보고 걷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의 옆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섰다. 딸아이의 손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손을 잡아본 것이 얼마만인지, 그 느낌이 무엇인지 잊은 채 살아왔다. 그 따뜻함이 나에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을 지나, 그 아프고 슬픈 시간을 지나 그의 손을 잡고 걷고 있는 이 순간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나를 집으로 데려다주는 길에 그는 아무런 준비도 계획도 없었던 오늘의 데이트가 너무 즐거웠다고, 이런 시간을 가져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행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그에게는 어떤 특별한 노력 없이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이런 시간이 흔하지 않다고 했다. 그런 시간을 함께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는 그는 분명 키스를 청해올 것이다.


집 앞에 도착한 우리는 차에서 내려 작별인사를 했다. 다음날 출장을 떠나는 그는 그 사이 만나지 못하지만 언제든 문자 보내자며 나를 가볍게 안아주고 떠났다. 그렇게, 그냥, 떠났다. 키스도 없이!




사진: Woodbine Beach, Toronto,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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