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이지 Sep 07. 2020

8. 그리움과 외로움, 그리고 연애

여덟 번째 데이트 - 눈사람



“휴가는 겨울이 끝나갈 무렵 가는 게 좋아. 휴가 갈 생각으로 겨울을 버티다가, 많이 지칠 때쯤 따뜻한 곳에서 에너지를 받고 와서 남은 겨울을 버티는 거지. 그리고 너무 일찍 갔다 오면 아직 한참이나 남은 겨울에 더 우울해지거든.”

“그럼 우리 생일 때 같이 가면 되겠네.”


캐나다 살이 16년 경력으로 얻은, 적절한 겨울 휴가 시기에 대한 나름의 이론을 열변하던 내게 그는 대뜸 말했다. 초봄인 우리 생일이 딱 일주일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방금 확인한 후였다. 첫 데이트 내내 무표정이더니 같이 생일 기념 휴가를 가자며 슬쩍 미소를 흘리던 그. 기나긴 겨울이 어김없이 다시 시작되던 즈음 M을 만났다.

 

그는 말수가 적고, 표정이 무뚝뚝했다. 포르투갈 후손답게 검은색 수염이 짙은 얼굴이 남자답긴 했지만, 눈빛은 꽤 날카로웠다. 내가 좋아하는 따뜻하고 선한 느낌은 아니다. 첫 데이트 중에 하키 경기가 생중계되고 있는 화면으로 자꾸 눈을 돌리는 그가 나는 못마땅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에게 별 느낌이 없다. 하지만 나는 그가 다시 만나자고 하면 그러기로 이미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나는 무뚝뚝한 그가 다시 만나자고 할 것을 확신했다. 나는 소개팅 여덟 번만에 많이 변한 듯하다.


서로 가슴 뛰게 시작했던 관계도 오래가지 못했다. 오히려 그 후유증에 아직도 마음이 시렸다. 그럴 바에 차라리 별 느낌 없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덜 힘든 방법이 아닐까 생각했다. 솔직히, 그렇게 가슴을 뛰게 하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내 앞에 앉아 하키 경기에 눈이 가있는 이 남자를 알아가기로 했다. N을 잊기 위해 M을 만나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도움이 된다면 마다하지 않을 생각도 있었다. 


“지금 긴장돼?”


내게 다시 눈을 돌린 그가 물었다.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했다. 나는 이제 첫 만남에서 딱히 긴장하지 않는다. 익숙해지는 건지, 초연 해지는 건지. 그것이 무엇이든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너는?”

“아니.”

"그런데 넌 잘 안 웃네. 안 그래?"


나에게 긴장했냐고 물은 것에 대한 반격이었다. 그러자 그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어 보였다. 너무도 인위적인 그 표정에 피식 웃음이 났다. 보기보다 따뜻한 사람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M을 만나기로 한 것은 더 이상 외롭지 않고 싶어서였다. N과 헤어진 이후 오랫동안 다른 남자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마음속의 N 대신에 다른 사람을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흐려지는 그의 미소, 그의 목소리를 붙잡아 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의 외로움은 커져갔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N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그를 그리워하기 위해 혼자이기를 선택했고, 그것이 나를 외롭게 했다. 외로울수록 그가 더 많이 그리웠다. 


그리움과 외로움, 그 상관관계는 무엇일까. 외로워서 그리운 마음이 드는 것일까, 누군가가 그리워서 외로운 것일까. 그리움은 '간절히 생각하다'의 명사형이고, 외로움의 사전적 정의는 '홀로 되어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이다. 그리움은 대상이 있지만, 외로움은 혼자라는 상태에서 오는 감정이다. 홀로 됨은 함께라는 경험을 통해서 자각된다. 그렇다면 외로움은 함께함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외로워하는 내게, 누군가는 나 자신을 더 사랑하라고 했다. 또, 더 강해지라고 했다. 어떤 이들은 외로움 자체를 즐길 줄 아는 것이 성숙함이라고 했다. 그들에 따르면 외로움은 나의 부족함이었다. 나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해서, 나약해서, 성숙하지 못해서 외로운 것이다. 함께함에서 시작된 외로움인데, 그것을 감내하고 극복하는 것은 오롯이 나 혼자의 몫이었다. 나의 외로움이 그렇게 위로받지 못하고 가지지 말아야 할 감정으로 치부될수록, 나는 더 외로워졌다. 나의 외로움을 이해해 줄 사람을 찾고 싶었다.


Jack Astor's Bar & Gill, CF Shops at Don Mills, Toronto, ON


M과 나는 첫 만남 이후 서로 아침인사를 건넸고, 두 번을 더 만났고, 키스를 나누었다. 그는 여전히 말이 별로 없었지만, 오히려 그런 그가 편하게 느껴졌다. 무뚝뚝한 그가 가끔 건네던 내가 보고 싶다던 말이 진심일까,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향한 누군가의 그리움을 느낄 때, 그의 외로움이 전해질 때, 나는 혼자가 아님을 깨닫는다. 외로움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 그 외로움을 같이 나누자고 마음을 열어 올 사람을 찾고 싶다. M이 그 가능성을 가진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

 

그 해 겨울, 정말 거르지 않고 주말마다 눈이 왔고, 주중에도 종종 눈이 왔다. 본업 이외에도 제설 사업을 하던 그는 눈이 오는 날이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했다. 눈이 멎는 봄이 오면 더 자주 나를 보러 오겠다고, 그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 하지만 주말이면 연락이 되지 않고, 번번이 약속 전에 연락이 끊겼다가 며칠이 지나서야 다시 나타나는 그의 행동에서 진심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겨울이 깊어지도록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나의 외로움은 녹지 않고 쌓여만 갔다. 


이제 연애를 포기해야 할까 하던 내게 친구는 '넌 외로움을 많이 타서 안돼'라고 했다. 나를 오랫동안 옆에서 보아온 그녀의 말이 맞다. 나는 본래 외로움을 많이 탄다. 아무리 주위에서 혼자로서 강해지라고 훈계를 해도, 혼자여서 외로운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관계 속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깨닫고,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배우고,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과정 속에서 성숙하고 강해지는 것이 정말 고독함을 통해 강해지는 것보다 열등한 것일까. 나 자신을 덜 사랑하는 것일까. 


따뜻하게 스며들던 봄날의 햇살, 가슴 설레도록 속삭이던 달콤한 바람, 나를 감싸는 보드라운 꽃잎의 감촉. 그 함께였던 기억들을 향한 갈망이 내 외로움의 근원이기에, 그것은 처음부터 홀로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외로움은 극복해야 할 'Weakness'가 아니라, 혼자서는 어찌할 수 없는 'Vulnerability'이다. 그런 나를 그대로 이해하고 안아 줄 사람과 함께 하고 싶은 것, 그 사람을 향한 그리움으로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 더 단단해지기 위해 꿋꿋이 버텨온 나의 외로움을 보듬어 주려는 것. 그것이 내가 애틋한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다. 




사진: King Tabs, Toronto, ON

매거진의 이전글 7-7. 그는 나의 럭키 넘버 세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