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데이트 - Mr. L
그와의 만남을 돌이켜 본다. 조금 슬픈 듯 한 그의 첫인상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가 정말 슬픈 사람 이어서일까, 아니면 내가 그 사람을 그렇게 생각해서일까...
어두컴컴한 지하 레스토랑 한 구석 작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그는 나를 알아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입춘이지만 한창 매섭기 그지없는 이곳의 겨울. 그 밤바람에 차디차게 얼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지금까지 나보다 먼저 약속 장소에 나온 남자는 M이 처음이었다. 늘 먼저 도착해 숨을 고르고 자리를 잡고 있던 나는 전에 없던 상황에 조금 허둥대고 있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싼 치렁치렁한 목도리를 벗어내는 일은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무릎까지 덮는 코트의 무게도 유난히 버거운 그런 날이었다. 그는 그런 나를 말없이 보고 있다가 코트와 목도리를 받아 벽에 걸어주었다.
다운타운에서 꽤나 인기 있는 태국 음식점. 그 한 구석에 그가 자리 잡은 이인용 테이블은 전에 친한 언니들과 왔을 때 누가 봐도 소개팅 중이던 커플이 앉아 있던 자리였다. 그 커플을 힐끔힐끔 훔쳐보며 우리 나름의 연애소설을 썼던 기억이 나는데, 몇 개월 뒤 내가 바로 그 자리에 앉아 소개팅을 하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지금 건너편 그 자리에 그녀들과 내가 앉아 있다면, 누가 봐도 소개팅 중인 그와 나를 보고 어떤 이야기와 상상을 할까.
생기 없어 보이는 하얀 얼굴, 옅은 색의 머리카락과 눈썹, 어둑한 조명에 잘 알아볼 순 없지만 역시 옅은 색의 눈빛. 조금 수줍은 듯, 소심한 듯, 혹은 슬픈 듯 보였던 건 그의 선한 눈매 때문이기도 했던 것 같다.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는 듣기 좋았다. 두텁고 투박한 그의 손에는 항공 엔지니어이면서 항해가 취미라는 그의 삶이 담겨 있는 듯했다. 상대방의 이야기에 집중해 주는 것은 그에 대한 배려와 관심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면서, 그를 면밀하게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그에게 끌리는 것은 확실히 아니었다.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고, 그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레스토랑을 나와 각자 움츠린 채 밤 길을 걸었다. 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그가 나에게 다시 데이트를 신청할지는 모르겠다. 내가 확신하지 못한 것은 그가 나를 마음에 들어했을지가 아니라, 그가 용기가 있는가였다. 나 역시 나만의 거리를 둔 채 딱히 틈을 주고 있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헤어지며 나를 포옹하는 그의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나는 늘 그랬듯 어정쩡하게 수동적인 대응만 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포옹을 하는 것은 상대가 누구든 아직도 적응이 잘 되지 않는다. 그런 내 자세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용기를 주었을 리가 없다. 그래서 그에게 먼저 문자를 보내기로 결심했다.
'집에 도착했어요. 오늘 저녁 고마웠고, 즐거웠어요.'
'아, 집에 잘 도착했다니 다행이에요. 즐거웠다니 기쁘네요. 만나서 나도 즐거웠어요.'
'룸메이트와 앉아서 얘기하고 있어요. 지금 뭐해요?'
'나도 친구들과 얘기하고 있었어요.'
'우리 데이트에 대해서 이야기했어요?'
'조금요. 한 친구가 물어보긴 했어요. 룸메이트는 데이트에 대해 물어봤나요?'
'친구에게 뭐라고 말했어요?'
'어땠는지, 그리고 당신이 어떤지. 당연히 나는 좋은 얘기만 했죠.'
'하하... 좋은 밤 보내요.'
'좋은 꿈 꿔요.'
난 그렇게 비겁하게 내 대답은 하지 않은 채 그의 마음만 떠보았다. 하지만 그것이 그에게 조금 용기를 주었는지 그는 다음날부터 내게 먼저 문자를 보내왔다. 우리는 좀 더 편안하게 안부를 묻고 일상적인 대화와 사진을 주고받으며 친해졌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만났다.
둥그런 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이야기했다. 첫 만남보다 조금 더 밝아 보이는 그의 모습에 내 마음도 유연해졌다. 그를 관찰하려기 보다는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고, 거리를 두고 틈을 보이지 않으려 하는 대신 그의 옆에 살짝 더 가까이 앉았다. 그는 여전히 종종 수줍어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모습에 그의 순수함을 느꼈던 것 같다. 대체로 남자들은 자신감 있어 보이려 최선을 다하는데, M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마흔이라는 나이에 순수함이라니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렇기에 더욱 그것이 절실한 나이이기도 하다. 언제부터 순수함이 어울리지 않는 나이가 되는 걸까. 마음속에 별의별 사연들과 그보다 더 복잡한 감정들이 책 한 권 분량만큼 쌓이는 동안, 순수함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듯 사라졌나 보다. 더 이상 받을 상처가 두려워 내 진심을 가리고 감정을 숨기면서, 반대편에 숨겨져 있을 진심과 감정이 두려워 의심과 경계심으로 무장하게 된 것은 내 인생 어느 시점에서부터였을까.
그와 함께 와인을 마시고 서로 주문한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선한 눈을 바라보면서, 몸도 마음도 나른해져 갔다. 두려움과 의심과 경계심보다, 그 순간 그와의 시간을 순수하게 즐기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첫 만남에 가슴을 뛰게 하는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다시는 그런 사람을 만날 수도 없을 테니까. 마음 한 구석 아직도 보내지 못한 봄날의 눈부신 햇살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서서히 온기를 전해주는 겨울의 벽난로 같은 사람이라면, 나도 조금씩 내 진심을 내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여전히 양손을 각자의 주머니에 넣은 채였지만 가까이 걷고 있었다. 코 끝이 얼음 같았지만 그다지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 깊이 스며드는 싸늘한 겨울밤공기가 좋았고, 그와 함께 걷는 것이 좋았다. 북적이는 지하철역에서 인파에 쓸리며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같이 더 있고 싶어서 한 정거장 떨어진 한가한 역까지 걷자고 그에게 제안했다.
우리는 도란도란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눈이 쏟아질 것 같은 새까만 밤하늘을 지나 지하철 역에 도착했다. 헤어지기 위해 마주 선 남향과 북향 승강장을 연결하는 다리 위에서, 그가 키스를 해 올까 궁금했다. 솔직히 아직은 그와의 키스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가 좋은 사람인 것 같고 오늘은 그만의 매력도 보았지만, 아직 그에게 연애감정을 느끼는지 모르겠다. 그런 내 마음을 느꼈는지, 그는 또 조심스레 안아주고 손을 흔들었다.
텅 빈 지하철 승강장에서 철로를 가운데 두고 마주 보고 섰던 순간이, 나의 삶에서 그저 지나가는 한 순간일 뿐일까, 아니면 함께 돌아보는 풋풋한 추억으로 남게 될까... 너무도 아득한 느낌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삶의 그 어느 순간도 훗날 그것이 가지게 될 의미가 고정된 것은 없었다. 시간 앞에 아무런 힘도 없는 우리는 그저 이 순간 속에 서있을 뿐이다. 희미하게 보이는 그의 수줍은 미소를 가차 없이 흩뜨리며 열차가 들어왔다.
사진: PAI Northern Thai Kitchen, Toronto, 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