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데이트 - Mr. L
2020년 2월, 영화 기생충이 영어가 아닌 언어의 영화로서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에서 작품상을 수상했다. 그 덕에 캐나다에서도 최초 개봉 때 보다 더 많은 극장에서 기생충이 재개봉되었다. 영화의 자자한 명성에 주위 지인들은 이미 첫 개봉 때 보았고, 혼자 영화 볼 용기가 없는 나는 M을 떠올렸다. 미국에 출장 가 있는 그가 돌아오면 같이 영화를 보자고 제안한 날은 발렌타인데이였다. 우리는 이미 돌아오는 일요일에 만나기로 계획이 있었지만, 실은 나도 발렌타인데이에 데이트를 하고 싶었다. 이제 두 번 만난 남자에게 대놓고 발렌타인 데이트를 제안할 수 없었는데,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은 훌륭한 핑계였다.
극장 앞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수많은 커플들로 가득했다. 그 속에 우리도 있었다. 화이트 와인으로 쪄낸 홍합찜을 나눠먹고 레스토랑에서 발렌타인 기념으로 내놓은 로맨틱한 감정과 욕망... 을 돋운다는 칵테일도 마셨다. 자신의 배와 항해에 관련된 에피소드를 신나서 풀어놓는 그와의 대화가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그러면서 마음 한구석에서는 지난번 데이트 이후 그가 했던 말을 자꾸 떠올렸다.
'키스해 주고 싶었지만, 입술이 터서 네가 꺼려하지 않을까 확신이 없었어.'
세로로 꽤나 깊이 갈라진 아랫입술이 첫 만남 때부터 아프겠다고 생각했었다. 게다가 그것 때문에 키스하고 싶은걸 참았다니 안쓰러운 마음에, 만나러 오는 길에 좋은 립밤 하나를 사서 그에게 선물했다. 지난번 키스 얘기도 있었고 오늘은 발렌타인데이니까 그가 키스할 확률이 높아졌다. 게다가 둘이 영화라니... 당연히 영화 보는 내내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의 부스럭거리는 움직임 하나, 내쉬는 숨소리 하나. 모든 것이 의자 팔걸이 하나 사이로 너무 크게 다가왔다. 안 그래도 영화를 보고 나면 말이 없을 만큼 지치는 편인데, 그날은 멍한 정신으로 영화관을 터벅터벅 겨우 걸어 나왔다. 영화 내내 부스럭거리더니 영화만 본 그도 말이 없었다. 영화관에 들어가기 전과는 사뭇 다른 온도였다.
'그는 아직도 망설이는 걸까, 아니면 마음이 바뀐 걸까... 그리고 그에 대한 내 감정은 무엇일까.'
지하철을 기다리는 몇 분간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가 키스를 하지 않은 것이 의아했지만 미묘하게 안심도 되었다. 혼란스러웠다. 그의 진심은, 나의 진심은 무엇일까.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번에도 내가 탈 지하철이 먼저 도착했다. 나는 승강장을 가득 채웠던 인파의 절반에 휩쓸려 핀치행 열차로 빨려 들어갔다. 시야를 가린 사람들 사이로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를 다시 만나야 했다. 잡힐 듯 말 듯 불분명한 상황과 감정이 견딜 수 없이 싫었다. 그를 한번 더 만나면 확실해질 것 같았다. 우리의 끝, 아니면 우리의 시작이.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우리 아직도 일요일에 데이트하는 건가?'
그는 사실 우리가 서로에게 그다지 끌리지 않는 것 같다고, 그만 만나는 게 좋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럼 나도 그에게 들지 않는 연애감정을 억지로 끌어내려했다고 수긍할 생각이었다. 그가 정말 내 이상형과 너무 다르거나, 혹은 아직도 남아있는 N에 대한 감정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데에 장애가 되고 있을지 모른다. 후자라면 큰일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M을 다시 만난다면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 애매한 감정의 실체를 캐낼 생각이었다. 나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계획이 다 있어야 했다.
'그럼.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너무 흔쾌한 대답이었다. 그래도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 이번에는 확실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강수를 두기로 했다.
'나 요리해줄래? 내가 와인 가져갈게.'
그가 요리를 좋아한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던 것을 이용했지만, 그래도 그의 집으로 나 자신을 초대한 것은 너무 대담했다. 그가 어떻게 생각하고 반응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 나도 그 생각하고 있었어. 스테이크 어때?'
'진짜?'
'응, 으깬 감자랑 벨페퍼랑 같이?'
'아스파라거스!'
'어떻게 하는지 모르지만 해줄게.'
'농담이야 ㅋㅋㅋ'
편식은 하지 않지만 아스파라거스는 싫다고 했던 그를 놀리면서 혼자 비장했던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래도 그가 정말 아스파라거스를 준비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가볍게 까만 티셔츠를 입고 나를 기다리며 럼을 마시고 있던 그는 자신의 집이어서인지 훨씬 편안해 보였다. 아직 벽에 걸지 못해 바닥에 세워둔 사진들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추워하는 나를 위해 담요를 찾아주고 벽난로를 피워주는 그의 모습에 그가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나에 대해 물어보고, 많이 웃었다. 그의 이야기 중에는 남에게는 쉽게 하기 어려운 아픈 과거의 이야기도 있었다. 그의 슬픈듯한 첫인상이 그래서였을까. 그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었다.
어느새 우리는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마시던 와인은 이미 반이상 줄어있었고, 요리는 뒷전인 채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와 웃음기 가득한 눈빛에 빠져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게 호감이 있었지만 다시 만나자고 할 용기가 없었던 것을 그는 고백했다.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나도 그가 좋다고 대답했다. 그의 고백에 그냥 답한 것이 아니다. 너무 복잡한 생각들이, 조심스러우면서도 조급했던 모순된 내 마음이 그와 함께 있으면서 아무 의미가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선하고 따뜻한 미소가 좋았다.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좋아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나를 보며 처진 눈매가 더 내려가게 웃는 그가 좋았다.
그의 눈꼬리가 더 길어지더니 그는 나에게 키스했다. 내 어깨를 끌어당기는 그의 팔에는 한껏 힘이 들어가 있었다. 더 가까이,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을 때까지 그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용기가 없었다던 그의 말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그는 뜨겁게, 거세게 키스를 했다. 이전까지 조심스러웠던 모습과는 너무 다른 그에게 놀랐지만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그리고 N과의 기억을 떠올렸다. 숨이 차도록 가슴 뛰었던 그와의 첫 키스, 그리고 서로를 원했음에도 끝내 가지 못했던 그와의 시간을 떠올렸다. 다시 올 것이라 굳게 믿었기에 기다리기로 했던 그와의 시간이 영영 오지 않을 줄은, 가슴 아린 후회로 남을 줄은 그때는 몰랐다. 그 후회를 이제는 떨쳐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M의 오른손을 이끌어 내 가슴에 얹었다.
사진: 기생충의 박사장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