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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별택시 May 02. 2018

[출근 9일째] 진상(進上)과 갑질

"사람들이 너를 내버려두면 삶은 아름다울 거야"_찰리 채플린

#1. 여의도 금융감독원 기자실.



"너 어디야?"


"금융감독원에 있습니다"


기자실에 있다보니 새로 온 선배로부터 출근체크 목적의 카카오톡이 왔다. 어지간한 매체는 수습기간을 제외하면 대부분 바로 출입처로 출근한다. 기자들이 출근 하자마자 하는게 보통 그날 동선이나 발제를 보고 하는데,  이를 일일보고(일보)라고 한다.  회사별로 양식이 다르지만 대략적인 틀은 비슷하다.


새로 온 선배는 주로 은행을 출입했는데 유독 내게 관심이 많았다. 사실 첫 느낌부터가 조금 별로였다. 기자라고 하기엔 너무 약한 눈빛과 말투, 행동도 무언가 어설펐다.

주관적이지만 나는 눈치가 굉장히 빠른 편이고 사람의 심리를 읽는 부분에서 나름의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여담이지만 첫 느낌이 별로 였던 사람치고 괜찮았던 사람은 내 역사상 없었다. 한번 안맞는 사람은 앞으로 맞기도 힘들고, 성격도 노력한다고 맞춰지는게 아니다. 그 선배가 그랬다.


그 선배를 처음 봤을 때의 일이다. 가벼운 인사를 나눈 후 그 선배는 내가 쓴 시황기사를 보여주며 이거 어떻게 쓴 것인지를 물었다.

특히 그는 내가 쓴 기사가 못 미덥다는 듯, 기사 안 문장 속 데이터가 어디 출처인지, 종목별 시세, 업종별, 특징주 등을 꼬치꼬치 따졌다.


"네. 선배 말씀하신 데이터들은 거래소 홈페이지 들어가면 제공되고 있습니다"


"이 아래 연구원 멘트는 직접 딴거야?"


"네"


"○○○연구원이랑 나 아는 사이다. 확인해 본다"


그는 내 기사의 진위 여부를 따져가면서 겁을 줬지만, 얘기한 사실이 전부였기 때문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그가 잘 모르는구나 생각했다.

"(설마 시황 속 데이터가 어디에서 나오는건지 정말 몰라서 하는 얘긴가?)"


그는 내가 쓴 기사 중 문장 맨 끝의 서술어 몇 개를 고치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나 잘써서 놀랐지?"


#2. 난관(難關) -일을 해 나가면서 부딪치는 어려운 고비


출처: 비주얼다이브

다시 돌아와서 그는 내게 우리회사의 문제점을 이것저것 지적하며 의욕에 찬 모습을 보였다. 그는 월간지 편집방식과 기사의 질 등을 지적하며 이래선 안된다는 등 자신이 다 바꿀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넌 나만 믿고 따라와. 나만 따라오면 조선일보든 중앙일보든 다 갈 수 있어"


선배가 온 지 얼마 안되서 의욕이 넘치시는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그는 슬슬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리 회사는 하루에 최소 기사 10개 이상을 쓰지 않으면 난리가 난다. 나도 우라를 치든 어떻게 해서든 하루 평균 20개에 가까운 기사를 출고했다.


그런데 그 분은 하루에 기사 출고 개수가 많이 쓰면 5개 정도에 불과했다. 어떤날에는 본인이 담당한 출입처의 보도자료도 내게 보내면서.


"연습하라고 보내는 거야. 한번 정리해봐"


내용을 보니 은행의 여신 관련한 자료다. 기관에서 배포되는 보도자료는 일반 보도자료와 달리 정리가 돼 있지 않고 데이터만 던져준다. 문장 해석 능력과 데이터에 대한 배경지식이 받쳐줘야 쓸 수 있다.


보도자료 대신 처리해달라는 것 까지는 이해했다. 하지만 슬슬 더 나아가기 시작한다.


매달 말일에는 월간지 마감이라 회사 늦게까지 남아 기사 교정을 본다. 하루는 그가 "기사 그냥 몇개 우라쳐서 내 이름으로 좀 넣어줘"라고 요구했다.


황당했다. 월간지 기사는 기본이 16~18매다. 일반 인터넷 출고 기사가 보통 6~8매인데 분량만 두배 이상이다. 그날 당일 내가 마감해야 할 원고는 총 32매 이상 이었다. 그 날 난 모든 마감과 교정을 마치고 밤 10시께 다 돼 퇴근했다. 물론 내가 마감한 기사의 바이라인은 '그 분'이었다.


얼마전 그 분께서 하신 명언도 생각났다.


"난 월간지 편집도 우라 안치고 100% 취재기사로 넣을꺼야"


이쯤되니 선후배 관계는  '갑과 을'로 변질 돼 갔다. 여타 직장이란게 그렇겠지만 언론은 특히 더 수직적인 조직 문화를 요구한다. 실제 어느정도 '짬' 좀 드신 분들은 이런 문화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런 주장은 대부분 '기강확립'을 근거로 내세운다.

외근이 많은 기자 특성상 출근이나 보고 등 절차적인 부분을 관리자가 챙기는 것은 타당하다. 하지만 적지않은 언론인들이 이를 악용한다는게 문제다.

예를 들면 전형적인 '내로남불' 유형인데, 본인은 술먹고 늦어도 되고, 기사 안써도 되고, 후배한테 욕해도 된다는 식이다. 후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윗선에 보고해 인사고과에 반영하겠다며 협박을 일삼는 케이스도 있다. 보통 '쓰레기'라고 불리는 선배들이 후배의 흠집을 크게 부풀려 본인의 무기로 활용한다.

여기자들의 경우는 더 하다. 최근 '미투'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는데,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언어적인 성희롱을 넘어서 성폭행도 만연히 일어나는게 언론 집단이다. 언론 견제세력이 적다보니 일부 심각한 사건 이외에 외부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이런 유형 모두 절대복종 관계를 요구하는 언론의 잘못된 조직 문화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분명하게 정의하지만 좋은 선배란 스스로에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사람이다. 강압적인 '리더십'은 리더십이 아니다.

내가 잘못하고 있는데 너보고 잘하라고 할 순 없는 노릇이다. 왜 스스로에게 관대해지려고 하나? 그걸 누가 허락했는지 돌아보면 수직적인 언론문화가 한 몫 거들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어찌됐건 선배가 아닌 '갑'이 되버린 그는 이제 내게  아침 편집회의까지 들어가라고 한다. 입사 1년도 안된 내가 데스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우스꽝스럽게도 그는 내게 본인의 '일보'도 보고했다.

나는 그의 일보를 내 것과 취합해 회의실로 들어가 그의 발제에 대해 편집국장과 의논했다. 국장이 물었다.


"그래 ●●이는 지금 어디 있다냐?"


"금융위로 출근했다고 합니다"


그가 내게 어디 있는지 알려주지 않고 대충 둘러대라 했기에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게 됐다.


"그래. ●●보고 오늘 발제 잘 쓰라고 하고"


"네"


물론 그는 그날 발제를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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