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짐 싸자.

순례길에서 얼마나 편할지는 짐 쌀 때 결정된다

by yule

까미노는 계획적인 짐 싸기가 유난히 강조된다. 짐은 가벼우면 가벼울수록 좋다. 기본적으로 내 짐을 짊어지고 내 발로 이동하는 여정이기에 짐이 무겁게 느껴질수록 길을 걷는 난이도가 급상승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경우로 어느 미니멀리스트 유튜버처럼 에코백 하나에 슬리퍼만 신고 까미노를 완주하는 사람도 있다고는 하는데, 그건 한여름에 걸을 때나 가능하다. 내가 갔던 10월에 그렇게 했다면 새벽에 나가자마자 만나는 살을 에는 추위와 비바람에 다시 55번 오스피탈리아(알베르게)로 돌아왔을 거다.


또한 순례자의 옷은 빨리 말라야 한다. 대부분의 순례자는 동이 트기 전 출발해서 늦어도 오후 4시에는 다음 숙소에 도착하고 체크인하자마자 샤워하고 땀에 젖은 옷을 빨래한다. 다음 날 새벽에는 마른 옷을 챙겨서 이동해야 하므로 옷이 빨리 말라야 한다. 스페인의 쨍쨍하고 따가운 햇살 덕분에 마을에 일찍 도착해서 한 빨래는 저녁이 되기 전에 뽀송해지지만, 그게 아니라면 축축하게 무거워진 빨래를 배낭에 넣고 다니거나 배낭에 달고 다녀야 한다. 그래서 다른 여행 짐보다 가벼움과 흡습속건이 중요하다. 이와 반대로 난 해외에서 여행할 때만 등산과 트레킹을 할 뿐이고, 작년 아르헨티나 여행에서도 피츠로이 같은 겨울 등산이나 빙하 트레킹을 할 때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다녔다. 하지만 까미노에서 무겁고 잘 안 마르는 티셔츠와 청바지는 기피대상 1순위다. 가족 중에 등산을 좋아해서 등산용품 풀세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 치수도 안 맞으)므로 난 까미노를 위해 웬만한 등산용품과 의류는 거의 새로 사서 떠나야 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까미노 짐은 자기 몸무게의 10% 정도면 엄청 잘 쌌다고 하던데 이 기준에 의하면 나는 6킬로그램 남짓을 가져가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결론이 나온다. 보통 순례자들이 쓰는 등산배낭은 1.4킬로그램이면 가벼운 축에 속하는데, (이게 아니면 초경량 배낭을 사용해야 되는데 그러면 짐을 메고 다니기가 힘들다.) 그렇다면 짐은 5킬로그램만 가져가라는 말이니 여행 짐 싸기 계의 미니멀리스트가 못 되는 나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처음부터 메고 다닐 짐은 배낭 포함 7~8킬로그램을 목표로 잡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일단 내게는 저번 인도여행을 준비하면서 샀던 70리터짜리 툴레 배낭이 있었다. 그러나 9월만 해도 그 1.7킬로그램짜리 배낭에서 300그램이라도 줄여보자며 다른 배낭을 알아보았고, 실제로 미국 REI에서 GREGORY ZULU 40리터를 직구 배송비를 합쳐서 15만 원 정도면 구매할 수 있길래 이걸 살까 말까 엄청 고민했는데 결국 사지 않았다.


그리하여 출발 일주일쯤 전 수많은 배송박스를 뜯어가며 순례물품을 버선트에 넣어보았는데 까미노에는 짐을 적게 가져가야 하니 배낭이 안에 든 건 없는데 배낭의 허우대는 산 만하게 큰 상황에 빠져버렸다. 그러면 압축 파우치로 배낭의 각을 잡아야 하니 무게가 늘어나는 상황이 생겼다. 결국 출발 일주일 전에 당근마켓에서 긴급하게 가져가기 적당한 등산배낭을 하나 찾았다. 사실 오스프리, 그레고리, 도이터에서 나온 40~45리터짜리 넉넉한 배낭을 원했으나, 중고거래를 하면서 그런 배낭이 내게 쉽게 올 리 없었고 회사 숙소 근처에서 34리터짜리 오스프리 스트라토스 배낭을 중고거래하는 데 성공했다. (사고 하루 뒤에 아스테릭스 50리터짜리 배낭이 올라온 걸 보고 굉장히 눈에 밟혔다.) 컨디션이 좋았던 배낭을 메고 만족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예상보다 배낭이 작아서 넣고 생각했던 짐이 다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 70리터와 34리터 배낭 2개를 두고 짐을 쌌다 풀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결국 마지막 순간에 플리스도 빼고 초록색 바람막이도 뺐다. 아이패드 프로는 진작에 포기했지만 왠지 낭만 있을 것 같아서 샀던 손바닥만 한 문고판 책도 넣는 걸 포기했다. 메모지도 슬그머니 짐에서 제외했다. 그렇게 열심히 빼고 나서야 34리터 배낭을 가득 채워가며 꾸역꾸역 닫는 데에 성공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배낭은 34리터짜리를 가져가는 게 무조건 맞는 이야기다. 겉옷을 5개나 들고 걷겠다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될 생각이었고, 옷은 압축파우치 대신 전부 지퍼백에 담아서 갔는데 이건 잘한 선택이었다.


누군가는 까미노 출발 한참 전에 모든 짐을 준비해서 걸어본다지만 나는 출발하기 직전까지 물건을 사느라 바빴다. 떠나기 1주일 전 인천 스퀘어원에 데카트론 새 매장을 오픈한다는 사실을 오픈일 전날에 알아낸 덕에 오픈일에 매장에 가서 실제로 스페인에서 살 물건도 직접 만져보며 가격 비교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티셔츠와 속옷을 산 뒤 오픈 이벤트로 지금도 쏠쏠하게 매고 다니는 배낭도 얻었다. 사실 이 배낭도 들고 가고 싶었지만 포기하고 스트링백을 대신 넣었다. 마지막 주에는 쿠팡에서 버프, 물집방지 테이프, 스포츠타월, 등산바지, 등산스틱, 인진지 이너 라이너를 샀고, 옥션에서 산 미니 발토시와 우비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지막 휴일인 10월 1일에는 다이소에서 발가락양말과 세면도구와 화장품을 담을 메시 파우치를 챙기고, 이케아까지 가서 짐 부칠 때 쓸 용도로 1000원짜리 파란 장바구니도 샀다. 그러나 이 장바구니를 포함해서 몇몇 물품은 결국 들고 가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에 네이처하이크 카본 등산스틱도 당근마켓에서 찾았었는데 판매자가 연락두절이어서 사지 못해 두랄루민 스틱을 현지 데카트론에서 구매했다. (이건 내가 구하려던 스틱을 들고 다니던 N의 스틱을 들어보고 나머지 구간을 위해 쓰겠다며 돌아오자마자 바로 구매했다.) 나중에 따져보니 까미노를 걷기 전에 물품을 사는 비용만 거의 70만 원 가깝게 들었다. 등짐이 8킬로그램까지는 되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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