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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파리타Lee Dec 26. 2020

요가가 하고 싶은데, 하기 싫어

요가와 통증 

"아사나(요가 자세)는 동작을 그만두고 싶은 그 순간 시작된다"

아헹가 요가(Iyengar Yoga)를 창시한 아헹가 선생님의 말씀이다.

책에서 이 구절을 보자마자 오 마이 갓! 을 외쳤다.

그만두고 싶을 때까지 버티는 것도 힘든데 견디기 힘들 때야 말로 아사나가 시작된다니, 

수련자 입장에서는 얼마나 무시무시한 얘긴가?

아헹가 요가는 한 아사나에서 오래 머물러 있기로 알려진 요가 스타일이다.

그래서 조금 극적으로 표현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어쨌든 선생님의 말씀은 요가 수련이 갖고 있는 극기적인 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요가와 통증은 떼려야 뗄 수 없다.

사람이나 자세에 따라 적당한 세기의 자극이었다가, 발마사지를 받을 때처럼 시원하면서 아프기도 했다가, 가끔은 깜짝 놀랄 만큼 강력한 당김이 되기도 한다.

수련을 하다 보면 문득 의문이 든다.

요가는 왜 이렇게 아플까? 왜 아사나는 그렇게 아플 수밖에 없게끔 설계된 걸까?

요가 자세는 어쩌면 자극(통증)을 위해 고안된 게 아닐까?

마지막 물음은 조금 멀리 갔나 싶은 생각도 들지만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전혀 아닌 것만도 아닌 느낌이다.

유달리 뻣뻣한 몸 때문인지 내 수련은 그 누구보다도 통증과 단단히 결부된 것 같았다.


약간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요가의 목적에 대해 고민하며 파탄잘리 요가 수트라를 들춰보고

또 한참의 시간이 흘러 틱낫한 스님의 책을 들여다보다가 

불교에서 가르치는 마음을 대하는 법과 파탄잘리 요가 수트라가 말하는 요가의 정의가 많이 닮아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내 거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너, 마음


장시간 앉아서 명상을 하다 보면 몸 여기저기가 찌뿌둥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오랜 시간 명상을 해도 순환에 막힘이 없는 몸을 만들기 위해 요가가 고안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목적지로 향하는 길 자체가 여행이듯, 수련을 하면 할수록 느끼는 것이 요가 자체가 명상이라는 것이다.

'요가는 움직이는 명상이다'

어디선가 이 문구를 본 이후로 나는 줄곧 요가를 이렇게 부른다.


아사나도 몸의 유연성과 근력을 키우는 것을 넘어서 요가가 추구하는 마음 수련의 일부이다.

이는 끊임없이 일렁이는 감정의 파도를 잔잔하게 만드는 과정,

그래서 삶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발견해 나가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좀 더 들여다보기 위해 요가에서 통증을 대하는 태도를 떠올려보자.


아사나를 하며 느껴지는 자극과 통증을 가만히 관찰한다.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닌, 그저 있는 그대로 통증을 바라본다.

통증은 내가 여기 있음을 뚜렷이 자각하게 한다.

아주 작은 상처인데도 온종일 상처 난 부위가 신경 쓰이는 경험을 해보셨을 것이다.

통증은 '여기 뭔가 잘못됐으니, 어떻게 좀 해보라'며 몸이 보내는 신호이니,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통증은 이렇게 의식을 몸에 붙들어놓음으로써 우리 의식이 지금 이 곳, 이 순간에 머물도록 돕는다.

거기까지는 좋다. 근데 아픈 건 불쾌하고 싫기 마련이다.

요가를 하는 와중에도 통증이 불쾌하고 싫긴 마찬가지다.

이러한 감정은 우리가 이를 느끼는 순간에도 우리를 괴롭히지만

눈앞에 있는 대상을 삐딱하게 바라보게 해 나 자신을 더 괴로운 상황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감정에 북받쳐서 해선 안될 말을 해버리고는 후회를 하거나

자괴감에 빠져 진심 어린 조언을 내쳐버리는 그런 상황 말이다.

요가에서 아사나를 하며 자극(통증)을 의식적으로 느끼는 것은 내 감정을 자각하는 연습이다.

통증을 억지로 참지 않는 것은 감정을 억누르거나 무시하지 않는 것이고

의식적으로 통증을 관찰하는 것은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하는 연습이다.

나를 괴롭히는 감정을 알아차리고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마주할 수 있으면 

이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파탄잘리 요가수트라는 요가의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yoga citta vritti nirodha

요가는 일렁이는 마음(의식)의 파도를 잠재우는 것이다.


우리는 아사나와 통증을 통해 마음의 파도를 알아차리고 잠재우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마음의 미묘한 파도, 선입견과 편견


우리가 세상을 인지하는 과정을 파탄잘리 요가 수트라는 바다와 파도에 비유한다.


바다 밑에 세상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지만 끊임없이 일렁이는 파도 때문에 그 진짜 형태를 알아볼 수 없다.


바다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이고 파도는 우리가 세상을 인지할 때 개입하게 되는 우리의 경험, 기억, 자아, 감정, 생각 등의 마음의 활동이다.

파도가 이는 바다에서는 바다 밑의 형체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듯

매 순간 변화하는 우리의 마음이 자의적으로 만들어내는 렌즈를 통해서는 세상의 참된 모습을 알아차릴 수 없다.

내 진정한 자아를 알아차리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선입견과 편견은 우리가 평소에 알게 모르게 자주 사용하는 렌즈다.

아마 편리함으로 따지면 이만한 렌즈가 없을 것이다.

의식할 것도, 의심할 것도 없이 보던 대로만 보면 되기 때문이다.

선입견과 편견에는 좋고 싫음, 긍정과 부정이라는 감정이 깔려 있다.

이들은 '독일 사람들은 차가워'처럼 편향성을 뚜렷이 드러낼 때가 있는가 하면

'등산은 힘들기만 하고 재미없어'와 같이 경험이나 취향을 앞세워 존재하기도 있다.

보이지 않는 적이 더 위험하듯, 습관이 되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의심 없이 행하는 것들이 우리에게는 더 큰 짐이 되기도 한다.

등산은 정말 재미없기만 한 걸까? 이제까지의 경험만 그랬던 게 아닐까? 등산이 재미없다는 생각 때문에 그것을 새로이 발견할 찬스까지 보내버리는 건 아닐까?


남편과 대화하다가 다툼이 될 뻔한 어느 날, 그가 말했다.

'나는 그냥 내 의견을 말했을 뿐인데, 너는 이상하게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거 알아?'

그 말을 듣자 지금 내 마음이 언짢고 불쾌해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왜 가끔 남편과의 의견 차이에 나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반응할까?

무의식적으로 결국은 내 생각이 맞다고 여기는 건 아닐까? 혹은 언쟁이 시작될 거라는 생각에 지레 예민해져 버리는 게 아닐까? 그나저나, 우리 둘 다 결국은 더 나은 결정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 아닌가? 남편의 생각도 내 것만큼이나 중요하고 의미 있지 않은가?


사실 싫은 것을 달리 보려고 노력해도 결과는 여전할 수도 있다.

남편과의 대화는 또다시 언쟁으로 번져버릴 수도 있고 등산은 이번에도 힘들기만 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한들 언쟁이 되어버리기도 전에 혹은 등산을 가기도 전에 기분 상해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렇게 해서 괴로운 건 결국 나인데 말이다.


수련을 꾸준히 하기 위한 세 가지 마음의 트릭


수련이 참 하기 싫을 때가 있었다.

수련 시간이 다가오면 하고는 싶은데 동시에 하기 싫은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잘 들여다보니 하고 싶은 것은 이성에 따른 의지요, 하기 싫은 것은 몸이 보내는 신호였다.

그냥 아프고 힘들어서 하기가 싫은 거였다!

수련 후 아무리 기분이 좋다 한들, 그리고 아무리 큰 해방감과 깨우침이 있다 한들, 수련을 하는 과정, 그러니까 아사나를 연마하는 과정이 아프고 힘든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 뻣뻣한 몸으로는 더더욱.

힘들 걸 경험으로 아는 나는 무의식적으로 수련을 거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수련 루틴을 포기할 것인가?

가끔은 쓴 것도 먹고 힘든 일도 해야 하지 않은가? 삶이 이를 요구하기도 하지만 내 균형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리하여 약은 맛이 아니라 머리로(나를 위해) 먹는다는 생각으로, 수련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게 도와줄 지혜를 찾아 나선다.


1.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내가 찾은 첫 번째 조언은 우리의 몸은 매일매일 변화하고 새로우니 오늘의 수련이 어제 같지는 않을 거란 점이다.

어제 먹은 음식, 했던 활동, 호르몬 주기 등으로 인해 우리 몸은 매일 다르다.

그래서 오늘의 수련은 어제와 같지 않고

어제는 몸이 쌀부대처럼 무겁고 둔했어도

어제는 백밴드를 할 때 특히나 자극이 심했어도

오늘은 다를 수 있다.

실제로 수련을 하다 보면 그렇다.

어제는 힘겹게 되던 자세가 오늘은 가벼이 되기도 하고

오늘은 몸이 유연하다가도 내일은 돌덩이 마냥 둔해지기도 한다.

강물은 계속 흐르기 때문에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했다.

어제의 경험에 주눅 들지 말고

오늘은 오늘의 새로운 수련을 하렸다.


2. 내 몸 받아들이기


한 유튜브 영상에서 키노(Kino MacGregor) 선생님이 말했다.

수련을 하면서 몸이 아픈 건 자연스러운 거라고,

오히려 몸이 변화하고 있다는 신호이니 긍정적인 거라고 말이다.

이 말이 나에게는 큰 위안이 됐다.

그래도 몸이 너~무 아프다면 통증이 아무리 자연스러운 거라 해도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너무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무리함의 발원지를 쫒아가면 불만족과 욕심을 만날 수 있다.

불만족은 내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데서 온다.

내 몸은 지금 이만큼만 가능한데 그것 이상을 하려고 채근할 때 무리가 온다.

욕심이 앞설 때는 힘으로 밀어붙이기 일쑤이고, 아이러니하게도 힘을 쓰면 아사나는 더 안된다.

몸이 경직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럼 힘으로 더 밀어붙이고 그 때문에 아사나는 더 안 되는 악순환이 찾아온다.

거기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내 몸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릴랙스. 내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수련 시작 전에 스스로를 일깨운다.

그리고 몸에 힘이 들어가는 낌새가 느껴질 때마다 되새긴다.

습관은 강력해 의식으로 붙잡아두지 않으면 방심한 사이 또다시 하던 방식으로 되돌아가버린다.

그래서 자꾸 나를 일깨워줘야 한다.

 내 몸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존경하자.

그럼 긴장이 풀리면서 몸에 자연스럽게 공간이 만들어지고, 신기하게도 힘을 들이지 않아도 자세를 더 깊이 가져갈 수 있다.


3. 도움 안 되는 생각은 차라리 안 하는 게


요가를 하며 체력적으로 힘들었던 기억이 매트 위에 서는 걸 방해한다.

우리는 경험에 의지해 대상을 바라보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수련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그리고 오늘의 수련이 꼭 어제 만큼 힘들거란 보장이 없다는 걸 안다면

실천을 방해하는 '어제에 대한 기억'은 냉정하게 접어버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실제로 해보니 이만한 명책이 없다.

습관적으로 통증의 기억이 떠오르면 의식적으로 생각을 거기서 그만둔다.

아무 기억도, 경험도 없다는 듯 머리에 텅 빈 공간을 내어주고 다른 할 거리를 찾아 나서거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매트를 펼치고 수련을 시작한다.

이게 얼마나 효과적인지, 이 생각의 트릭을 실천하고부터는 수련 전에 안개처럼 은근히 존재하던 거부감이 사라지고 억지로 하는 것과 같은 마음씀 없이 매트 위에 올라갈 수 있었다.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생각은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아닐 때도 참 많다.

특히 습관적인 생각일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생각은 거기서 잘라버리는 게 낫다.

그리고 좋은 소식은

수련을 하면 할수록 통증도 덜해지고 매트 위에 서는 것도 쉬워진다는 사실이다.




발바닥에 오장육부가 다 있듯, 요가 수련에는 우리의 삶이 녹아 있습니다.

차파리타의 홈요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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