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묭 May 14. 2023

형사 박미옥과 나

<여경의 전설과 초짜기자, 그리고 12년의 시간>


 그는 내가 직접 만나본 사람 중 유일하게 롤모델이라고 부르고 싶은 사람이다.

 12년 전 강남경찰서 강력계장과 2년 차 신문기자 사이로 우리는 처음 만났다. 그가 사건1번지인 강남에 투입된 이유에 관한 분석 기사를 쓰기 위해서였다. 여경의 전설, 탈옥수 신창원과 연쇄살인범 정남규 수사, 최초 강력계 여형사, 최초 여성 강력계장, <경찰청 사람들>과 드라마 <시그널>의 김혜수 님 등 수많은 수사물에 나온 여경 역할의 실존인물이자 어드바이저… 처음 만날 때부터 그는 범접하기 힘든 경력의 스타 경찰이었다.


드라마 <시그널> 포스터와 형사 박미옥의 옛 사진


 이렇게 자신을 감싼 화려한 수식어를 '사회적으로 잘 나가는 데' 써먹을 수도 있었겠으나, 그는 오직 자기 자신을 마주 보거나 후배에게 전수하는 데에만 그 경력을 써먹었나 보다. 언제였던가 그는 '정년퇴직 안 하고 제주에서 집 짓고 살까 하고요'라고 내게 말을 건넸다. 경찰 조직 내에서의 그의 상징성을 감안할 때 당연히 농담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지난해 그는 떠들썩하지 않게 소망을 실현했다. 정치권, 기업, 수많은 곳에서 그 상징성에 러브콜을 보냈을 게 빤하다. 그는 그의 상징성보다 큰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그를 지켰다.

 지난해 겨울, 휴가 중에 제주에 있는 그의 집에 찾아갔다. 이른 퇴직 후 바다마을 인근에 집을 짓고 앞마당 서재를 후배와 공유하며 살고 계시더라. 나는 퇴사를 고민하던 시기였고 답을 내려줄 사람이 필요했다. 우리는 밤늦도록 이야기 나눴고 함께 간 가족 모두 잠자리까지 신세를 졌다. 그리고 나는 더 기자로 일해 보기로 했다. 가열차게 살아보고 다시 이야기하자, 는 그의 말이 컸다. 가열차게. 뜨끔했다. 나는 그를 선배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더는 ‘형사님’이 아니기도 했고 진짜 선배라고 부르고 싶은 시점이기도 했다.

 그가 쓴 책이 지난주 나왔다. 제목은 <형사 박미옥>. 형사로서 30년을 보낸 그의 삶 자체가 한 권의 책 안에 눌러 담겨 있었다. 완벽한 제목이고 완벽한 삶이다. 얼마나 흥미진진하던지 단숨에 읽어 내렸다. 남대문 방화사건부터 굵직한 살인사건들까지 현장 냄새가 책에 진동한다. 그렇다고 자극적인 현장에 있었음을 자랑하는 방식으로 판매부수를 올리려 작정한 책은 결코 아니다. 가장 비인간적인 현장에서 수십 년 일하면서 지켜낸 인간성에 관한 분투기이자 열아홉 살 멋 모르고 순경이 됐던 한 여성의 성장기이고 성숙기이다. 최초 타이틀은 모조리 휩쓴 '강력'팀장이었지만 책을 쓰는 내내 그는 강력하기는커녕 매우 조심스러웠고 연약했던 것 같다. 그게 느껴져서 가장 좋았다. 마초적이기 쉬운 조직에서 수많은 성차별을 이겨낸 그만의 방식에 통쾌해하며 물개박수를 보낸 건 덤이다.



초짜기자 시절 쓴 기사 이야기가 책에도 잠깐 나온다


 그가 쓴 책의 항해는 결국 사람에 대한 애정이라는 항구에 닿는다. 당연한 말 같지만 그 당연함을 멀리 돌아와 찾은 사람, 그 당연함을 잃기 쉬운 환경에서도 끝내 지켜낸 사람이 말하는 당연함은 엄숙하고 빛난다. 마지막 작가의 말에 쓴 문장은 내가 12년 전 그에 관해 쓴 기사에 꾹꾹 눌러 담았던 바로 그 문장이어서 더 감격스러웠다. 취재거리를 얻기 위해 강력계장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간 초짜기자였던 나를 단번에 사로잡은 말이었다. “형사 박미옥의 철학은 사람에 대한 애정이다. 애정 없이 범인을 잡는 일에만 성취감을 느낀다면 형사가 아니라 사냥꾼이다.”


2011년 기사에 담은 문장과 2023년에 나온 책 뒷표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가 있다. 나는 이 책이 널리 읽혔으면 좋겠다. 내 책보다 백 배, 천 배는 더 그럴 가치가 있는 책이다. 진심이 그렇다. 더는 이해관계에 얽힌 취재원과 기자 사이가 아니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물론 월급쟁이 기자로서가 아니라 낡아가는 한 사람으로서의 나는 그의 여생을 영원히 취재하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경험으로만 꾹꾹 눌러서 뭘 더 보탤 것도 없는 책 한 권을 쓰고 싶다는 소망을 새로 품게 되었다. 그의 말대로, 그러려면 지금보다도 훨씬 더 '가열차게' 살아야 할 것이다.

 내 깜냥으로 내뱉을 수 있는 가장 값진 헌사를, 한 사람의 30년 생애가 쇳물처럼 녹아 있는 이 책 한 권에 바친다. 글보다 삶이 더 빛나는 책이 가장 멋진 책인 법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상에 없는 뉴스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