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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Jun 21. 2023

북 페어 키드의 특별한 하루


 코엑스가 없던 어린 시절 서울에서 가장 큰 북페어 (국제도서전)는 올림픽공원에서 열렸다. 올림픽공원 키드였던지라 매년 시즌이 되면 엄마 손을 잡고 동네 마실 가듯 걸어서 전시장에 갔다. 세상 책은 다 모여 있는 듯한 거대한 숲에 둘러싸여 작고 맨질맨질한 돌멩이 하나가 된 기분. 초딩 고학년부터는 혼자 가기 시작했는데 어느 해에는 책 보다 공짜로 마신 어느 출판사 부스의 포카리스웨트 맛이 더 각인되기도 했다. 악동이라 열 번도 넘게 다시 줄 서서 받았는데 직원분은 인상 한 번 안 쓰고 계속 주셨다.


 성인이 된 뒤로는 거의 북페어를 찾지 않았다. 코엑스에는 어린 시절부터 퇴적된 추억도 없고, 책은 늘 주변에 널려 있었으니.


  얼마만이었더라. 지난주 수요일 휴가를 내고 서울국제도서전이 열리는 코엑스를 찾았다. 흠모하는 작가가 방한했다는 소식을 우연히 들어서다. 인생영화로 주저 없이 꼽는 <라이프 오브 파이>의 원작 소설 작가 얀 마텔. 영화로 처음 알게 된 뒤 그의 다른 작품까지 접하며 살아있는 작가 중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남아 있다. (조지 오웰도 없고… 로맹가리도 없고… - feat.김응용)


  그의 강연 몇 시간 전 도착해 전시장에 들어섰다. 입구에서 머지않은 곳에 나의 두 번째 책 <돈이 아닌 것들을 버는 가게>를 내준 난다 출판사의 부스가 보였다. 미리 준비한 꽃다발을 들고 찾아가 인사드렸는데 엉겁결에 유니폼까지 맞춰 입고 책 파는 알바(?)로 동원되었다. 니 책은 니가 팔고 가라는 거역할 수 없는 정언명령이었다. 한참을 멀뚱멀뚱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을 가엾이 여긴 친구 오은 시인이 대신 열심히 책팔이 노릇을 해줘서 3권이나 팔아줬다.


고마워 은아ㅠㅠ


 신기했던 건 그 사이 나를 알아봐 준 소수의 사람들이다. 첫서재 손님으로 찾아왔던 분, 모 언론사 디지털팀 기자라는 분, 동네책방 사장님 등 서너 분이 반갑다 혹은 책 잘 읽었다는 인사를 건네주었다. 몸 둘 바를 몰랐지만 그보다 더 찡한 순간은 아무래도 나의 책이 거기 놓여 있는 것 자체를 가만히 지켜보던 시간이었다. ‘북페어 키드’였던 어릴 적이 밀려와서였을 것이다. 뭘 이룬 것도 없으면서 괜히.


너만 보인단 말이야~ (feat.이홍기)


 무능력한 알바 역할을 마친 뒤에는 얀 마텔 강연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통역 없이 진행된 강연이라 절반도 채 못 알아들었지만 ‘어떻게 작가가 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만큼은 또렷이 들렸다. 그리고 엉망이었다는 그의 첫 작품에 관한 얘기도.


 강연 끝나고 미리 가져온 그의 저서 두 권에 사인을 받았다. 집에 오래 묵혀두어 누레진 책들이 다시 살아났다. 10년 전 처음 알고 동경하게 된 작가와의 기승전결에 마침내 마침표를 찍은 기분. 하나는 내 이름, 다른 하나는 연호 이름으로 사인을 받았다. 얀 마텔이 묻더라. 아들이 몇 살이냐고. 만 9살인데 몇 년 있다 건네줄 거예요, 라고 얼떨결에 대답했는데 진심이었다. 중학생이 되면 읽어보라고 슬쩍 내던져 줄 셈이다. 아마 안 읽겠지만.


너가 고마워 할 날이 올 걸?


 전날 마신 술에다 강행군 같았던 북페어 일정까지. 차 타고 한 시간 반 걸려 밤늦게 도착한 춘천에서 얼른 씻고 잠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이상했다. 몸은 피곤한데 정신이 말똥말똥하더라. 나는 명백히 각성되어 있었다. 가라앉히는 시간이 필요해 거실에 불 켜고 앉아 글을 써 내려갔다. 한 편, 두 편, 지금 이 글까지 세 편.


 내년에도 북페어를 갈 수는 있겠지만 번만큼 흥분되지 않을 것이다. 살아있는 작가 중 더 동경하는 작가도 딱히 없고, 무엇보다 내 책이 거기 놓여 있는 ‘첫 경험’을 이미 해버렸으니까. 뭔가 다신 오지 않을 생의 한 페이지를 넘긴 것 같아 서글퍼졌다.


 그나마 위안이 있다면 내 기질을 빼닮은 어린이 한 명이 이날 나와 손잡고 북페어를 처음 맛보았다는 사실이다. 평소 까부는 게 주특기인 데다 선생님에게 산만하다는 지적을 많이 받는 그 아이는 2시간 넘게 지겹다는 소리 한 번 없이 이 책 저 책 읽어보며 몇 권 직접 고르기까지 했다. 어린이책 부스 사장님들은 그게 기특해 보였는지 증정품들을 이것저것 자꾸만 고사리손에 쥐어주셨다. 30여 년 전 올림픽공원에서 내게 포카리스웨트를 열 번이고 리필해 주었던 그분처럼.


 삶은 퇴적되지만 우주는 돌고 돈다. 그걸 증명해 준 하루는 이미 과거가 되었지만 돌고 돌아 아이의 미래에 어떤 바람으로 불 것이다. 그 폐곡선 같은 안도의 마음을 기록해두고 싶었다. 일기로, 편지로, 그리고 이곳에도.


2023.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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