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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Jul 30. 2023

여름을 싫어하는 사람

<여름혐오자의 여름 견디기>


여름을 싫어한다.

어릴 적부터 그래왔다. 싫어하는 게 딱히 없는, 낙천적이라면 낙천적이고 둔감하다면 둔감한 성격인데 한여름만큼은 단호하게 싫어한다. ‘여름 혐오’에 가까우리 만큼.

더위를 못 견디는 타고난 체질 탓이 크다. 원래 열이 많은 몸이라 조금만 더워도 땀을 뻘뻘 흘리고 어쩔 줄 몰라한다. 겨울에는 껴 입으면 된다지만 여름엔 다 벗고 다닐 수도 없지 않은가. 하물며 다 벗고 다니도록 국가가 허락해 줘도 아무 소용없을 것만 같다.

 체질뿐만이 아니다. 오감 중에 다른 감각은 둔한 편인데 유독 후각이 발달해 있다. 남이 잘 맡지 못하는 냄새도 쓸데없이 곧잘 감지하곤 하는데 여름엔 다른 계절에 맡아본 적 없는 온갖 냄새가 안 그래도 민감한 후각을 더 자극한다. 숨은 쉬어야 하니까 막아낼 재간조차 없는 자극이다. 주로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쉰 내부터 찌든 물 냄새, 썩은 소금 냄새 같은 것들이 때론 싱글몰트처럼 단명하게 때론 블렌디드처럼 뒤섞여서 콧구멍으로 우후죽순 몰려든다. 위스키는 이러나저러나 향긋하지만 여름 냄새는 정반대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기도, 사람들 많은 곳에 섞이기도 꺼려진다. 그들의 냄새가 싫다기보다는 그들도 혹시 나처럼 나의 냄새를 맡고 불쾌해할까 봐 두려워서 그렇다.

 체질에도 오감에도 맞지 않는 계절을 강제로 견디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신까지 무너진다. 여름만 되면 짜증이 자주 솟구치고 성질마리도 급해진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주변 사람에게 민감하게 대하기도 한다. 타인과 시비를 가리는 일도 잦아진다. 여름은 매번 돌아오는데 어른이 되어서도 한치 자라지 못하고 어김없이 실수를 되풀이한다. 이런 나 자신을 불현듯 깨달을 때면 낯부끄러워지지만 여름엔 나를 고쳐볼 여력조차 남아있지 않기에 마냥 내버려 둔다.

 가장 큰 문제는 무기력이다. 체력이 정신력까지 끌어내리면 끌려온 정신력은 무기력을 데려온다. 여름만 되면 심신이 물 먹은 솜처럼 변한다. 부정적인 생각이 떠나질 않으니 오히려 아무 생각하지 않고 멍하게 있으려 기를 쓰기도 한다. 출근길 열차에서 매일 읽던 책도 어느 순간부터 잘 펴지 않는다. 오늘 쓸 에너지가 얼마 남아 있지 않다는 직감이 들다 보니 심신의 사용을 최소화하는 일에만 신경을 곤두세우는 탓이다. 퇴근길마다 즐거이 열어젖히던 상상의 문도 개점휴업하듯 닫는다. 퇴직하고 뭐 할까, 10년 뒤에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당장 어떤 걸 시작할 수 있지?, 누구와 함께 어떤 종류의 대화를 하고 싶은데… 따위의 생각조차 잘 들지 않는다. 상상은 기력의 산물이니까.

 그래서 매년 장마가 시작될 즈음이면 마치 피난 짐 싸듯 마음을 굳게 먹기 시작한다. 차례로 다가올 장마와 무더위 예보를 보며 달력의 숫자를 세고, 하루가 별 탈 없이 지날 때마다 연명했음을 안도한다. 여름의 정중앙에 놓인 내 생일도 그래서 행복했던 기억보다 부디 어서 흘러가기만을 기원했던 감각이 더 선명하게 남아 있다. 8월의 끄트머리 혹은 9월 초입에 접어들어 아침바람에 한 줌의 시원한 기운이라도 감돌면 비로소 해방감에 젖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9월도 안심할 수는 없다. 여름의 잔감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을 물을 때마다 의심의 여지없이 10월이라고 답한다. 10월은 태양이 말려 죽인 내 기운과 상상력과 에너지에 다시 새싹이 돋아나는 나만의 봄이다.

 여름이 없는 삶을 자주 상상한다. 북위 50도가 넘는 추운 도시를 여행할 때마다 특히 그렇다. 여기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에 덜컥 사로잡힌다. 베를린, 탈린, 헬싱키, 레이캬비크, 이르쿠츠크. 하나같이 아름다우면서 한여름 평균 최고기온이 25도를 넘지 않는 도시들이었다. 스리랑카 하푸탈레와 갈레, 태국 빠이, 베트남 달랏 등 동남아 도시들도 물론 사랑스러웠고 오히려 나의 타고난 정서와는 더 잘 들어맞았지만 결코 살고 싶지만은 않았다. 집에서 쥐가 나와도 상관없지만 여름이 한국보다 더 길어지는 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어서. (물론 하푸탈레와 달랏은 고지대여서 동남아 치고는 시원한 편이다. 그래서 여행지로 골랐기도 하다.)

 매해 여름마다 이런 여름 혐오가 정점에 이를 때면 나는 한없이 작아질뿐더러 뭐랄까, 한껏 ’ 조롱받는 ‘ 기분에 휩싸인다. 원초적으로 나는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다. 현실세계에서도 에너지가 넘치는 편인데 상상에 쏟는 에너지는 그 몇 배쯤 된다. 그래서 가끔은 열이 많은 나의 타고난 체질은, 혹시 과한 열정이 몸의 열기로 치환되어 나타나는 증상이 아닐까 심각하게 숙고해 본 적도 있다. 과학적으로는 증명되지 못할 추론이겠지만 직감은 확실히 그렇다. 그런데 여름은 ‘네가 아무리 뜨거워봤자야’라며 더 큰 열기로 나를 쉬 집어삼켜버린다. 세상은 크고 무섭다고, 너의 열정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조롱하듯 경고하는 것만 같다. 그 현타가 나를 더 깊은 무기력으로 이끈다. 요컨대 여름은 내게 어른스러운 척을 거두고 뾰족한 본성을 실토하라고 고문하는 고약한 계절이자, 존재가 무색해지며 그저 견뎌낼 도리밖에 없는 잔인한 섭리인 셈이다.

 이런 내게 최근 몇 년 들어, 여름과 관련한 불행과 다행이 하나씩 번갈아 찾아왔다. 먼저 불행은 지구온난화다. 안 그래도 못 견디게 더웠던 여름이 갈수록 더 더워진다. 그냥 망했다… 싶었는데 죽으란 법은 없는지 다행히도 한 줌의 다행이 함께 찾아왔다.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체질이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예전보다는 땀도 덜 흘리고 더위를 덜 탄다. 한여름 밤에는 잠잘 때 에어컨이 예약된 시간에 꺼지면 5분 내로 알람 맞춰놓듯 일어나던 나였는데 몇 해 전부터는 에어컨이 꺼진 상태로 한두 시간씩 더운 줄 모르고 자기도 한다. 그저 나이가 들어서 체질이 변하고 있는 걸까? 공교롭게도 더위를 덜 타기 시작한 시기는 내 안의 열정과 에너지가 예전 같지 않다고 감지하기 시작한 시기와 묘하게 겹친다. 근거 없는 나의 추론을 다시금 더 확신할 수밖에.

 그렇다면 지구온난화 속도가 빠를까, 아니면 내 체질이 변하는 속도가 빠를까. 후자를 열렬히 응원해 보지만 내 능력 바깥의 문제다. 그들이 힘겨운 속도 경쟁을 하고 있는 사이 차라리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차분하게 준비하는 편이 더 현명할 것이다. 일단 지구온난화를 늦추는 일에 최대한 동참하는 생활습관부터 다져야겠다. 이렇게 전 지구적 정의와 나의 이익이 완벽히 일치하는 경우라니! 더불어 체질 변화를 부추기기 위해서는 - 내 추론에 따라 - 내면에서 들끓던 열정과 에너지도 조금씩 줄여나가야 하겠다. 사실 이건 좀 슬프다. 늙음을 이런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다니.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계절과 마찬가지로 삶 또한 곧 가을을 준비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긴 했다.

 이것저것 다 떠나서 여름을 견디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한국을 떠나 여름 없는 세상으로 탈출하는 일일 게다. 북위 50도가 넘는 나라로의 이민! 늘 꿈꾸었던 순간이지만, 나는 결국 그러지는 않을 것 같다. 타지에서 먹고살 만큼 별다른 재능이 있지도 않고, 무엇보다 여름 외에는 지금 내 환경과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내가 여름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기만 하면 이들과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또 하나, 내가 매력을 느끼고 멋지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중에는 여름을 몹시 사랑하는 사람이 유독 많았다. 나는 여름을 싫어하지만 동시에 여름을 닮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동경의 마음을 품고 있던 셈이다. 여름 없는 세계로 탈출한다면 그들이 여름을 사랑하는 이유를 끝내 이해하지 못할 터이다. 나는 꼭 알고 싶다. 그들이 여름을 맞이하는 방식을. 그리고 언젠가 나도 그들처럼, 여름을 견디는 게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불가능해 보이지만 꼭 불가능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며드는 요즘이다. 하필 여름의 정중앙 격인 날짜에 세상에 태어났기에 어쩌면 여름을 사랑해내는 일이야말로 나의 존재 가장 밑바닥까지 사랑해내는, 생의 마지막 운명 같은 과제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렇게 장황하게 나의 여름 혐오를 해명한다고 해서 그간 살아오며 여름이 올 때마다 저지른 잘못들이 다 용서되지는 않을 터이다. 여름에 갑자기 뾰족해진 내게 서운함이나 실망을 느꼈던 이들에게 이 해명이 충분히 납득될 리도 없겠고. 그래도 이렇게 여름에 관해 전부 털어두고 나니 더운 날씨에 조금은 머릿속이 시원해진 기분이 든다. 그걸로도 충분하다. 여름을 견디는 내게는 그것마저 절실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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