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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린 Sep 03. 2021

Fling; Fig From France, 검정치마

[초단편소설집] 당신과 나의 잠 못 이루는 밤 #1


검정치마 <201>

12 Track 'Fling; Fig From France'



/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은 , 여름이었다.


한여름에 접어들던 어느 해 7월, 내리쬐는 햇빛 사이로 소란스러운 아이들의 다양한 소리가 교내를 가득 메우던 그 시절, 그곳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었다. 남자아이들은 덥지도 않은지 쉬는 시간만 되면 웃통을 벗고 땀을 흘리는 것이 마치 여름을 나기 위한 어떤 방법인 것 마냥 사정없이 운동장을 뛰어다녔고 여자아이들은 다른 학교들보다 조금 뒤처져 아직도 천장형 선풍기를 돌려대는 교실을 빠져나와 교내 구석구석 그늘을 찾아 이동했던 여름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나는 점심을 먹고 매점에서 정확히 바나나우유 세 개가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실로 돌아가고 있던 참이었다. 여느 때와 같았으면 늘 붙어 다니는 민영이와 은민이, 예은이까지 함께였을 테지만 동방신기 오빠들의 음악방송 영상을 보러 가야 한다며 먼저 가버린 세 사람 때문에 혼자 매점을 들렀다 돌아가는 중이었다. 우리 학교 급식은 특식이 나오는 요일을 제외하곤 대부분 메뉴가 부실하기 짝이 없어서 식사 후 항상 매점을 들려야 했다. 반찬투정 때문에 급식을 모두 남기기는커녕 배식받은 것을 모두 먹고도 도저히 배가 안찬다는 게 그 이유였다.


나는 세 개의 바나나우유가 담긴 비닐봉지를 손목을 이용해 빙빙 돌리면서 반대쪽 손으로 내 몫의 초코우유를 빨대로 쪽쪽 빨아먹으며 계단을 내려가던 중이었고, 현중은 축구공을 손에 쥐고 공중으로 던졌다 받는 것을 반복하며 계단을 올라오고 있던 중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행위에 열중한 채, 서로가 서로에게 가까워져 충돌할 것도 채 인지하지 못하고는 그대로 충돌해버렸고 현중이 쥐고 있던 축구공은 허공으로 떨어져 바닥을 굴렀으며, 내가 들고 있던 초코우유는 그대로 나의 입에서 가슴께로 쏟아져 새하얀 교복을 온통 더럽히고야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놀란 채로 서로를 바라보는 현중과 나 사이에, 바닥에 온통 튀어버린 초코우유의 달콤한 냄새와 방금까지 축구를 하고 온 현중의 달큰한 땀냄새가 뒤섞여 났다.


현중은 축구를 좋아했다. 점심시간 아니, 쉬는 시간만 되면 운동장에 뛰어나가 공을 차기 바빴다. 운동장 가장자리의 그늘에 앉아 바나나우유를 먹으며 그런 현중을 보던 은민이 덥지도 않냐고 했다. 나는 현중을 지켜보다 교실로 돌아왔고, 현중은 그런 나를 보고는 이내 교실로 돌아와  옆자리에 앉았다.  옆자리에 앉은 현중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책상 위로 엎드리면 땀에 젖은 현중의 목덜미가 보였다. 나는 그곳에서 풍기는 현중의 달큰한 땀냄새가 좋았다. 땀에 젖은 머리칼과 교복, 그리고 그의 목덜미. 나의 여름.





우리가 몇 번의 여름을 함께 보내는 동안 현중은 축구를 그만두었다. 횡단보도에서 신호위반을 한 차량에 부딪혀 큰 수술을 하고 난 뒤 운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많이 울었다. 괜찮다며 큰 손으로 나의 머리를 쓰다듬던 현중이 더 이상 땀에 젖을 만큼 뛰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는 많이 슬펐다. 현중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고 나는 그의 글을 책으로 만드는 편집자가 되었다. 어른이 되면 말끔한 양복을 입고 출퇴근을 하는 현중을 집에서 키스로 배웅하고, 앞치마를 두른 채 요리를 하던 국자를 들어 보이며 마중할 줄 알았는데 그 반대가 되었다. 매일 아침, 침대에서 미적거리는 나를 겨우 일으켜 씻기고 입혀 회사에 보내는 것은 현중이었고 제시간에 퇴근은커녕 하루가 멀다 한 회식과 야근에 지쳐 돌아오는 나를 꼭 큰길까지 마중 나오는 것도 현중이었다.


나는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슬리퍼를 신은 채 버스정류장에서 어김없이 나를 기다리는 현중의 모습을 좋아한다.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방에서 하루 종일 책을 읽고 글을 썼을 현중에게서 오래된 책 냄새가 났다. 지난여름, 젖은 교복을 입은 현중의 달큰한 땀냄새만큼이나 나는 그것이 좋았다.





현중은 버스에서 내리는 나를 발견하고는 손에 들고 있는 두 개의 초코우유를 흔들어 보였다. 야근이나 회식으로 늦을 때면 현중은 지친 나를 위해 언제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준비해 두었다. 나는 초코우유를 볼 때마다 우리가 처음 마주쳤던 때를 기억하곤 한다. 초코우유로 온통 더럽혀진 내 교복 블라우스를 보고 어쩔 줄 몰라하던 현중은 자신의 교복 블라우스를 허겁지겁 벗어주었다. 초코우유에 젖어버린 블라우스와, 땀에 젖어버린 블라우스라니. 나는 별 차이 없는 선택지를 두고 오래 고민하지 않았고 그렇게 하루 종일 현중의 교복 블라우스를 입고 다닌 후로 현중의 냄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무슨 생각해, 현중이 초코우유에 빨대를 꽂아 건네면서 물었다.  생각. 나는 얼렁뚱땅 대답하며 초코우유를 입에 가져다 댔다. 달다. 현중은 자신의 초코우유에도 빨대를 꽂고는 우유를 쥐지 않은 다른 손으로 나의 손을 맞잡았다. 여름밤의 공기는 여전히 뜨겁고 습해서 맞잡은 현중의 손과 걸을 때마다 부딪히는 팔의 살결이 끈적였다. 그럼에도 나는 맞잡은 현중의 손을 더욱 세게 고쳐 잡았다. 현중의 목덜미는 오래 전보다 조금 굵고 까매졌지만 그때처럼 여전히 땀에 젖어있다.


" 집에 아이스크림 사놨어 "

" 진짜?!?! "


그새  먹었는지, 나와는 다르게 빨대 따위 꽂지 않은 현중은 목덜미를 뒤로 한껏 젖혀 입을 크게 벌리고는  우유팩을 위로 들어 탈탈 털었다. 나는 현중의 말에 걸음을 멈추고 자리에서 방방  정도로 호들갑을 떨었다. 내가 초코우유보다  좋아하는 것이 바로 아이스크림이라는 사실을 현중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야 알았다. 녹을까  집에 갖다 놓고 다시 나왔어. 하며  우유팩을 접는 현중이 너무나 사랑스러운 나는 팔을 뻗어 한참이나 위에 있는 현중의 머리통을 두세  쓰다듬었다.


" , 하지 마라... "


꼴에 이제 많이 컸다고 내가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것을 싫어하는 현중은 머리를 뒤로 빼며 미간을 찌푸린다. 나는 그런 현중의 손을 다시 맞잡고 빨리 집에 가자며 현중을 이끌었다. 한여름에 에어컨이 고장 난 우리 집에는 현중이 자취를 시작할 때 샀던 오래된 선풍기가 겨우 달달거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그 선풍기 앞에 나란히 누워 커다란 숟가락으로 한통에 담긴 아이스크림을 뒹굴거리며 퍼먹겠지.


신이 나서 현중의 손을 잡아끌며 뛰어가는 나를 현중이 멈춰 세우고는 맞잡지 않은 나머지 손으로 나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갑작스러운 현중의 행동에 의아하기도 전에 현중의 입술이 짧고도 진득하게 나의 입술에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나는 순간 느껴지는 현중의 달큰한 땀냄새와, 맞닿은 입술에서 오래도록 머문 초코우유의 달콤한 향에 금세 혼미해졌다.


" 가자 "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제는 먼저 나의 손을 이끌고 걸어가는 현중의 걸음을 따라간다. 맞잡은 두 손이 길게 늘어지다 이내 짧아져 나란해진다. 여전히 변함없는 나의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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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순간들,

당신과 나의 잠 못 이루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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