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감히 파사현정(破邪顯正)을 말하는가
2024년 11월 8일부터 17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극단 고래의 <비명자들 3막: 나무가 있다>(이해성 연출, 이하 <비명자들 3막>)가 무대에 오른다. 한국 연극판에서는 흔치 않은 시리즈물이다. 1막과 2막에 해당하는 작품이 앞서 상연되었고, 이번이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다.
일단 먼저 든 생각은 ‘할 수 있는 걸 다 해볼 생각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여타의 소극장과는 다르게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연출을 최대한 시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케스트라 핏이 있으니 연주자의 라이브도 사용해보고, 전자동 장치걸이대(stage batten)도 많고 무대 사이즈도 크니까 다양한 심도(深到)로 연출해보기도 하고, 조명도 음향도 시설이 다양하고 좋으니까 영상미디어도 다양하게 활용해보자! 하는 마음이 듬뿍 느껴진 것이다.
무대 위에서 흐느적거리며 움직이지만 침묵하는 신체를 가진 ‘비명자’들은, 그중 한 명인 ‘보현’(박윤정 분)을 통해 현재 사회가 가진 억압과 폭력으로부터 도피한 주체들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비명자’는 동시대 미디어에서 소외된 인간에 대응하는 기표로 제시하는 ‘좀비’와 대구를 이루는 것이 된다. ‘좀비’가 지성을 삭제하고 욕망(식욕)만 남은 껍데기라면, ‘비명자’는 모든 욕망을 삭제하고 지성만 남은 껍데기이기 때문이다. 다만 ‘좀비’가 인간을 공격하는 폭력성, 스스로의 욕망을 거침없이 타자에게 투사하는 폭력성을 가진 존재라고 한다면, ‘비명자’는 욕망을 스스로의 내부로만 투사하는 자폐성을 가진 존재이다. 그럼에도 ‘비명자’가 인간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되는 것은, 그것이 소통불가능성으로 인한 무지(無知)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즉 두려움의 정동은 비명자로부터 발산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비명자에게 다가서고 접촉하는 주체 내부에서 발산하는 셈이다. 극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이해성은 이에 대한 단초를 불교 철학에서 얻어온 것으로 보인다. 연구소의 이름이 ‘파사현정(破邪顯正)’인 점, 전작까지 주인공을 맡았던 요한의 죽음에 좌절한 연구소 소장(김대진 분)이 본래는 승려였다는 설정, 3막의 주연을 맡은 리얼뉴스 기자 ‘오선재’(사혜진 분)의 이름도 불교에서 ‘옳다’, ‘좋다’를 뜻하는 범어 ‘Sadha’를 한역한 선재(善哉)이거나 화엄경에 나오는 수행자인 ‘Sudhana’의 이름을 한역한 선재(善財)일 것이라는 점 등이 이런 정황을 뒷받침한다.
한편, 이번 작에서 이해성은 해보고 싶은 연출을 다양하게 시도하는 동시에,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마음껏 풀어낸 것으로 보인다. 2024년 현재 전 세계 각지에서 발발한 전쟁들이 사실은 소수 권력자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 피해자들에게 공감하지 못하고 전쟁을 그저 미디어 상품으로 소비하는 대중들에 대한 비판, 현재 한국의 정치·문화·역사에 관한 비판을 읽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은 (이해성이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안을 고민하지 않는 우직한 휴머니즘에 대한 비판까지도 엿보인 점이다. <비명자들 3막>에 등장하는 인물은 한결같이 평면적이다. 심지어 주인공인 ‘선재’마저도 그러한데, 진실, 소통, 공감, 평화 등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서는 다른 그 무엇도 고려하지 않는 맹목적인 캐릭터로 무대에 등장한다. 물론 이러한 평면적 캐릭터성은 <비명자들 3막>에 서사성을 부여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평면적 캐릭터들이 구성하는 하나의 사건을 다루는 단막들이 일렬로 나열되는 극적 구조를 통해, 사건에 대해 생각하고 판단할 것을 관객들에게 종용하는 브레히트식의 서사극적 요소가 발생하는 것이다. 권력자와 정부가 말하는 ‘파사(破邪)’에서 ‘사(邪)’는 정말 ‘사이한 것’이 맞는가, 나도 언젠가는 비명자가 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비명자를 처단할 권리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다수의 이익과 정의가 과연 동의어인가 등의 질문을 던지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아마도 ‘파사현정(破邪顯正)을 발화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하는 하나의 문장으로 귀결될 것이다. 생각해보라, 군인들이나 경찰들이 갑자기 당신에게 무기를 들이밀면서 ‘너는 사이한 존재이니 파사(破邪)하겠다!’고 외친다면 그 얼마나 두렵겠는가. 당신은 그저 고통스러워서 비명을 질렀을 뿐인데, 그것이 시끄럽고 거슬린다면서, 그리고 당신가 느끼는 고통에 타인이 공감하게 되면 그 타인도 고통스러워진다면서, 그래서 당신은 없어져야 할 존재라고 한다면 그 얼마나 슬프고 참담하겠는가. 자기들이 ‘정(正)’이기 위하여 당신을 ‘사(邪)’로 규정하는 그들의 권력은, 어쩌면 당신의 투표와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서사극성을 담보하기 위한 평면적 캐릭터성으로 인하여 등장인물들에게서는 다소 밋밋한 맛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이야기하려는 주제가 전쟁과 평화, 소외와 소통, 개인의 폭력과 사회적 폭력 등 다수의 거대 담론들이라는 점에서, 마음 편하게 웃으며 관람하기 어려운 구석도 좀 있다. 하지만 130분이라는 꽤 긴 시간 동안 상연되는 작품임에도 짧은 단막으로 분할되어 있어서 빠르고 경쾌한 호흡을 가지고 있어서 지루함을 느낄 일은 결코 없다. 세 개의 작품으로 구성되는 연작이라는 점도 독특하다. 특히 비명자를 처리하는 살인 행위에 ‘파사(破邪)’라고 이름 붙인 냉소적인 태도가 재미있다.
사진 출처 : 극단 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