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수는 해변으로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습을 체크했다. 사흘 동안 선크림을 열심히 발랐는데도 얼굴이 새카매져 있었다. 광대에는 기미인지 주근깨인지 모를 것들이 스멀스멀 올라온 게 보였다. 물놀이에는 장사 없다더니, 그냥 효과도 없는 거 안 바르면 안 되나, 이런 게 바로 썬키스트 걸일까, 생각해보곤 웃었다. 까만 피부와 흰색 원피스가 대비됐다. 여기서는 새카매도 이렇게 예쁜데 서울 가면 분명 부시맨 같겠지.
단꿈 같은 여행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올 인클루시브 리조트 시설이 너무나 방대해서 아직 충분히 다 즐기지도 못했는데 벌써 내일이 귀국이라니, 기분전환을 해보려고 눈부신 해변가에 앉아 과카몰리를 한 사발 끌어안고 퍼먹는데도 좀처럼 기분이 나아지질 않았다. 어떻게 확보한 시간인데, 이렇게 보낼 순 없지. 술, 그래 술을 마시자, 해수는 지나가던 직원에게 크게 소리쳤다.
“에라두라! 언더락! 원 플리즈!”
직원이 놀라는 듯하더니 ‘나이스 초이스’라며 엄지를 치켜들고는 사라졌다. 아침부터 동양 여자애가 센 술을 시켰다 이건가. 샷으로 시켰으면 기절했겠네.
해수가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에라두라를 샷으로 마셨다. 라운지에서 체크인을 기다리다가 미니 바에 있는 에라두라를 보고는 홀린 듯이 다가갔다. 다른 술들은 모두 나와있는데 에라두라만 유리장 안에 있었다. 한잔 꺼내 달라고 하니 그때도 직원이 놀란 표정을 지었었다. 거기서 해수는 샷으로 세잔을 연달아 들이키고는 이후 점심 식사 중에 토할 뻔했다. 그래도 혼신의 힘을 다해 정신줄을 붙잡았다. 직원이 주문을 받으며 술은 됐다고 하는 해수를 보고 혹시 ‘술을 마시지 않는 고객’으로 고객 카드에 기록할까 봐 ‘나는 오늘 이미 너무 많이 마셔서 쉬어야겠어.’라고 더듬거리는 영어로 설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에라두라는 해수가 취업 전 남미 배낭여행을 하던 중에 토르티야 식당 직원이 ‘퍼킹 굿’이라며 추천해준 테킬라였다. 그때 해수는 그것이 깔끔하게 넘어가는 양주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비싸고 도수가 세서 더 이상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 취직을 하고 거래처 아저씨들을 따라간 싸구려 바에서 오줌같이 누런 양주들을 마시다가 에라두라가 생각났다. 타이트한 원피스를 입은 종업원 옆에서 과일안주 용 포크를 나눠주다가 한없이 투명하고도 맑은 에라두라가 생각났다. 기다란 테킬라 잔 안에서 멕시코의 환한 햇살을 받아 빛나던 에라두라가 생각이 났다. 그리고 해수는 칸쿤행 비행기 표를 샀다.
리조트 고객은 대부분 미국인이었다. 직원들은 해수를 동양계 미국인쯤으로 생각하는 건지 하루 종일 영어로 친근하게 말을 걸어댔다. 해수는 미국인들처럼 웃으며 능숙하게 대답할 수는 없었지만 미국인처럼 하루 종일 아무 데나 드러누워 술을 마셨다. 어디서나 손짓 한 번에 술을 주문할 수 있었다. 미국인 대부분은 다이키리라는 달달한 칵테일을 마셨다. 해수도 이튿날부터는 다이키리를 마셨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하루 종일 술을 물처럼 마시는데도 취객 한 명 보이질 않았다. 알딸딸한 기운이 오르긴 하는 걸 보면 가짜 다이키리는 아닌데, 물 좋고 공기 좋고 햇살 좋은 곳에서 행복하게 마시면 아무리 마셔도 인사불성이 되지 않는 건가, 그럼 영원히 여기서 살고 싶다고 해수는 생각했다.
그런데 남은 날이 이틀뿐이라 생각하니 다이키리만으로는 약발이 부족해진 모양이었다. 막 도착한 에라두라를 마시며 해수는 회사 익명게시판에 접속했다. 그곳엔 회사를 증오하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이번에는 사장이 직원들은 빼놓고 임원들 하고만 경영설명회를 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참 회사 잘 돌아가네요.’ ‘뭐가 무서워서 이제 경영설명회도 비공개로 한대?ㅋㅋ’ ‘어차피 거짓말 쇼 하는 거 안 보는 게 차라리 잘됐네요.’ 댓글들을 보며 해수도 같이 분노했다. 그래, 내가 속한 곳이 이런 곳이었지, 지금 이렇게 초조한 것도 당연해,라고 생각하며 해수는 에라두라 한 모금을 삼켰다. 목 넘김이 썼다. 해수가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며 다짐한 것이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여행 기간 동안 회사 관련된 것은 그 어떤 것도 보지 않기. 둘째, 포털사이트의 한국 뉴스와 댓글 절대 읽지 않기. 어제까지는 생각도 안 났는데 곧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스트레스가 치솟으며 자신도 모르게 폰을 꺼내 한국으로, 서울로, 회사로 접속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메일함에 접속했다. 굵은 글씨의 ‘읽지 않은 메일 196 개’가 눈에 들어왔다. 메일은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으니 제발 팀장이 지랄할 만한 건은 없기를 빌었다. 내 월차 쓰고 왔는데 이런 걱정까지 해야 되나, 그러고서는 리조트의 와이파이를 원망했다. 왜 이렇게 잘 터져서 이런 것까지 보게 만드는 거야? 일부러 로밍도 안 했는데. 해수는 이곳에서의 시간을 이따위로 쓴 게 너무 아까워져서 폰을 집어넣고 에라두라를 한 잔 더 주문했다.
*
마지막 날이었다. 해수는 방 안의 미니바에 있던 에라두라 병을 들고 컨시어지로 갔다.
“내가 오늘 체크아웃인데 말이야... 이거 진짜 조금 남았는데 내가 들고 가면 안 될까? 내가 공항까지 가는 동안 너무 슬플 거 같아서...”
해수가 떠듬거리는 영어로 말했다. 직원이 웃으며 확인해본다고 어딘가 전화를 걸더니 미안하지만 안된다고, 하지만 체크아웃 이후에도 비행기 시간까지 리조트의 모든 바와 식당은 무료이니 끝까지 행복한 시간을 즐기라고 말해주었다. 해수는 처음 대답을 듣다가 너무 상심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꼴깍꼴깍 원샷을 해버릴까 생각했지만 뒤따라 온 안내를 듣고는 어기적 어기적 로비의 바로 걸어갔다. 아직 오전이라 그런지 바는 텅 비어있었다.
“에라두라 울트라, 샷, 원 플리즈.”
넉살 좋아 보이는 멕시코 아저씨가 ‘예스, 달링’ 하며 잔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해수가 먼저 말을 걸기 시작했다.
“나는 오늘이 마지막 날이야. 너무 슬퍼. 사무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돈 워리 스위티, 잇 윌 비 오케이.”
대낮의 진상 취객에게 이렇게 따뜻한 말 한마디라니, 바텐더 아저씨는 이곳의 모든 직원이 그랬듯 프로였다. 그리고 해수는 그렇지 못했다. 눈물이 나는 척 연기하며 넉살이나 떨려했는데 진짜 눈물이 왈칵 쏟아져버린 것이다. 이래서 회사 아저씨들이 다정한 마담이 있는 바를 찾는 걸까, 하는 생각이 해수의 머릿속을 스쳤다. 서둘러 눈물을 닦으려는데 손이 잔을 쳐서 저 멀리 날려버렸다. 바텐더 아저씨가 또다시 ‘돈 워리’라며 새 잔을 내주고는 와장창 깨진 잔을 치우러 갔다.
“쏘리, 나 절대 진상 고객으로 적어두면 안 돼. 나 원래는 이렇게 취하지 않아…. 나는 여기 꼭 다시 올 거거든. 그러니까 한 번만 봐줘...”
해수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취하니 왠지 영어가 더 잘 나오는 것 같았다. 바텐더 아저씨가 다시 말했다.
“돈 워리 스위티, 잇 윌 비 오케이.”
오케이는 뭐가 오케이라는 거야, 싶었지만 이번에는 해수도 웃으며 대답했다.
“땡큐 소 머치. 잇 윌 비 오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