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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림 Dec 12. 2023

조물주를 기쁘게 하는 법

초단편소설


흠, 내가 인간을 처음 만들 땐 말이야.

이렇게까지 똑똑해질 줄 몰랐단 거지.

인간을 지켜보면서 "오호 이거 봐라?" 할 때가 몇 번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손금이야, 손금.


인간을 빚을 때 그 애들 안에 갖가지 재료들을 넣거든.

재료들이 고유의 에너지를 내기도 하고, 재료들끼리 섞여서 전혀 다른 에너지가 나타나기도 하지.

수백 가지 재료들 중에서 적게는 수십 개, 많게는 재료들의 절반 정도를 섞어 만들 때도 있어.

들어가는 재료들도 다르고 재료들끼리의 조합도 달라지니 인간이 이토록이나 다양할 수밖에.

하루에도 새로 태어나는 인간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어떻게 인간을 하나하나 다 다르게 만드느냐고?

이런이런.

그러니 내가 조물주 아니겠어?

참 인간들은 말이지, 너무나도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니까.

인간을 만든 내가 인간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존재겠어?

그게 다 내가 두뇌를 키우는 실험을 한 바람에 성질이 영악해진 탓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지만 뭐.

머리가 커진 덕에 자기네들이 모든 걸 통제하고 정복할 수 있다며 기고만장해졌지.

그러니 내가 다양하게 만들었던 인간 종들은 다 사라져 버리고 이제 호모 사피엔스니 뭐니 하는 한두 가지 종류만 살아남았잖아.

인간들은 은행나무*의 겸손함을 좀 배울 필요가 있어.


아무튼, 인간을 다 빚은 다음 마지막으로 손에다가 그 애들의 기본값들을 새겨두는 거지.

인간들도 보니 뭔가를 만든 다음에는 한 귀퉁이에다 그 물건에 대한 정보를 적어두더군.

그런 거랑 비슷한 거라고 보면 돼.

그 기본값에는 이런 것들이 들어있지.

생물학적으로 연결된 다른 인간들 - 애들은 그걸 '부모'라 하더군 - 의 정보,

성격과 성향,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

주어진 생명 동안 느긋하게 살아갈지 치열하게 살아갈지

사는 동안 대체로 배가 부를지 고플지

건강하게 살아갈지 다치거나 병이 들지

삶의 어디쯤에서 큰 사건이 일어날지

어떤 인간들과 가까운 관계를 이룰지 -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인 관계든 -

그리고 언제 어떻게 죽을지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야.

인간들이 아주 궁금해하는 것들이지.

한 인간에 대한 기본값들을 이렇게 양손에다 새기는 거야.

그래서 그 애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건 손바닥만 들여다본다면

나는 그 애가 누구인지, 언제 그 애를 빚었고,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있다고.


그런데,

이런 중요한 정보를 왜 이렇게 눈에 잘 띄는 곳에 새겨놨냐고?

원래 중요한 건 가장 평범한 곳에 숨겨야 하는 법이야.

인간은 손을 많이 쓰니 당연히 손에는 살점과 근육을 이루는 재료를 넉넉하게 넣고,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어야지.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손에는 주름이 많을 수밖에 없어.

그럼 인간은 손에 있는 선들을 당연한 걸로 생각할 테지.


그런데 아까도 말했듯 인간들의 두뇌를 키우는 실험을 하면서 내가 한 가지를 간과한 거야.

인간은 호기심이 엄청나다는 것.

왕성한 호기심이 커진 두뇌를 만나 인간은 내 예상보다도 빠르게 성장하고 발전하기 시작했지.

그러다 보니 손에 있는 이 암호에 관심을 기울이는 별종 인간들도 생겨난 거야.

'손금'이라는 이름까지 붙이면서 말이지.

그 후로 인간들은 나름대로 이 손금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어.

그 모습이 아주 흥미로웠지.

"그래, 어떤 내용이 숨겨져 있는지 어디 한 번 마음껏 들춰보거라." 하는 마음으로 지켜봤어.


그런데 말이야.

그중에서도 제법 똑똑한 아이가 있더군. 동쪽이든 서쪽이든 여러 곳에서 그런 애들이 나타났어.

선의 모양과 길이, 선명도와 개수 등을 제법 재치 있게 풀어내더구먼.

대체로 틀리지만 비슷하게 맞춘 것도 있었지.

가령 이런 거야.

그 애들이 '운명선'이라 부르는 게 있어.

손바닥의 가운데에서 세로로 길게 이어지는 선이지.

이 운명선이 길고 짙다는 건 한 인간이 혼자의 힘으로 무던히도 노력해서 원하는 것을 어느 정도 이루었다는 걸 뜻한다더군.

본래 내가 아이에게 주었던 삶의 모습 - 인간들은 이걸 운명이라 부르더군 - 을 꾸준하고 치열한 노력으로 바꾼 애들의 손에 생기는 선이야 그게. 꽤 비슷하게 접근했더라고. 아무튼 그런 선을 손바닥에 깊게 새긴 애들은 내가 다른 아이들보다 더 눈여겨보곤 하지. 대견하잖아?


그와 같은 맥락으로 손금은 계속 바뀔 수 있다는 것.

그 발견도 제법 칭찬해 줄 만해.

내가 새긴 건 어디까지나 기본값일 뿐이고, 나는 언제든지 어떻게든지 그 애들이 그 값을 바꿀 수 있도록 모든 가능성을 조금씩 열어두었거든. 그 비밀을 발견한 애들은 자신을 변화시켜 인간 세상에서 크게 한발 나아가곤 하지. 그런데 아직 그걸 밝혀내어서 가능성의 문을 연 아이들은 아주 적어. 그래도 한 세기에 열 명 남짓은 꾸준히 나오니 기특하지. 그 아이들의 삶을 지켜보면 아주 재미있어. 흥분된단 말이야. 끊임없이 뭔가를 만들어 내고 파괴하는 이 일도 따분해지려던 참이었는데, 이런 아이들 덕에 다시 재미를 붙였지. 역시 인간이란 참 재미있는 존재야.


자, 그러니까 내가 준 삶대로 살다가겠다는 안일함은 그만 떨쳐 버리고, 내가 열어둔 가능성을 발견해서 삶을 재미있게 한 번 살아보라고!

그래야 너희를 만든 나도 즐겁고 보람 있지 않겠어?

아이들아, 나에게 더 큰 즐거움을 다오!




*은행나무는 1문 1강 1목 1과 1속 1종만이 존재하는 유일한 생물종이다. 과학자들은 7속 수십 종이 있었다고 추측하지만, 거의 멸종해서 현재에는 동아시아에 1종만이 남아 있다. 이게 어떤 것인지 감이 오지 않는다면 척삭동물문에 속한 모든 척추동물 중 인간만 살아있다고 보면 된다. 참고로 멸치와 인간은 모두 척삭동물문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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