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 전 희미한 기억 속 발자취를 찾아 떠난 날
남편을 처음 만났던 날 나눈 대화 중 하나는 그의 성(姓)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한국인이었지만 독일계 성을 가지고 있다. 미국 사람들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성이다. 그는 초등학교 때 누나와 함께 입양되어 미국으로 왔다고 했다. 한국 이름도 있어요, 고정철이에요. 누나 이름은 희정이예요. 편하게 술술 나눴던 그날의 대화가 사실 다른 자리에선 잘하지 않는 사적인 이야기란 걸 한참 후에야 알았다.
그는 어릴 때 부모님과 누나, 네 가족이 살았는데 2학년 때 아버지가 위암으로 갑작스레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집을 나가셨다. 할머니가 남매를 거둬 작은 아버지 댁에서 1년 정도 지내다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고아원에 갔을 땐 "너희는 나이가 많아서 입양은 안 될 거야."라고 했고, 둘은 외국에 입양되는 것보다 한국에 남는 편이 나을 거라 생각해 안심했단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과 달리 고아원에 들어간 지 불과 몇 달 만에 미국으로 입양이 결정되었고, 펜실베이니아의 한 가정에 함께 입양되었을 당시 각각 초등학교 3학년, 4학년이었다.
좋은 가정으로 입양되어 잘 사는 운 좋은 사람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케이스가 더 많은 게 입양의 현실이다. 남편도 그중 하나였다. 비슷한 연령대 자녀가 셋이나 있는 집이었다. 미국에 입양되었다가 양부모가 시민권 신청을 하지 않아 성인이 된 후 문제가 생겼을 때 한국으로 추방되는 안타까운 케이스도 많은 걸 보면, 그 정도 절차는 밟아준 남편의 양부모는 그래도 기본 도리는 했다고 봐야 할까.
아이들을 사랑해 입양한 게 아니었던 건 확실하다. 남매는 입양 온 후 늘 자신들 신세가 신데렐라 같다고 생각했다. 그 집은 모든 청소와 설거지, 빨래와 애완동물 관리까지 자식들이 도맡아 했다는데, 그나마 친자식들도 똑같이 일했다고 하니 차별은 아니었나 보다. 양부모는 집안에서 하루 종일 담배를 피웠고, 음식은 간편 조리식품이나 정크푸드 위주로 먹였다. 고등학교 때 양아버지의 차별대우와 폭행이 시작되어 남편은 집을 나왔고, 친구 집을 전전하다 성인이 되어 완전히 독립했다.
결혼 후 한글로 된 그의 입양서류와 자료를 찬찬히 살펴봤다.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할머니와 찍었던 사진, 남매의 건강 소견, 일회용 단수여권, 미국에 와서 한국어를 잊기 전에 마지막으로 쓰였던 편지까지. 미처 부치지 못한 편지는 미국에 온 뒤 1~2년 사이에 누나가 썼단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작은 아빠 안녕하세요. 저희는 미국에서 불행하게 살고 있습니다."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읽으며 눈물이 울컥하는 걸 참았다.
색이 바랜 자료들 사이의 한국 사회봉사회 명함을 보고 연락을 취해봤다. 남편이 원한 건 그들 남매를 끔찍이 아꼈던 할머니 묘소 위치에 대한 정보였다. 한국에 갔을 때 할머니 묘소나 아버지 위패를 모신 절에라도 찾아가 뵙는 게 그의 유일한 꿈이어서 나와 우리 부모님이 백방으로 찾았었다.
한국 사회봉사회에 요청해서 받은 건 그가 다녔던 초등학교 이름과 할머니의 생전 마지막 주소였다. 공공기관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제한적이라 더 이상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하다며, 남편을 잘 이해시켜 주길 바란다고 했다.
몇 년 만에 같이 한국에 간 여름, 남편이 다녔던 초등학교와 할머니 마지막 주소에 찾아가기로 했다. 아무리 덥고 스케줄이 바빠도 그것만은 꼭 하고 오자는 게 나의 각오였다.
여름방학이 막 끝난 8월 말의 화요일. 숙소가 있던 선릉에서 버스를 타고 강동구 성내동으로 향했다. 할머니 주소에 먼저 가본 후 학교로 갈 계획이었다. 마침내 도착한 주소의 2층 건물은 그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대로 가기엔 아쉬워서 골목 안으로 들어가 건물의 뒤편을 보며 남편에게 와 보라고 손짓했다. 건물 뒤 쪽으로 와서 대문과 계단을 보던 그가 천천히 말했다.
-여기, 우리 작은 아빠 집이야.
-작은 아빠? 고아원 가기 전에 살았던?
-응. 앞에서 봤을 땐 몰랐는데 뒤에서 보니 알겠어.
그는 순식간에 기억이 선명하게 되돌아온 듯했다. 저기 저 계단으로 올라가서 첫 번째 창문이 작은 아빠 방이었어. 현관문에서 나와 학교에 가며 저 방을 지나치면 창문에서 작은 엄마한테 꼭 인사를 해야 했지. 저 계단 옆에는 그냥 빈 공간이었는데 저걸 설치한 것 같아. 이 집이 아직도 여기 있다니. 여길 또 와보게 되다니.
70년대에 지어졌을 그 집은 주변의 건물들에 비해 확실히 낡고 오래돼 보였다. 작은 아버지 가족은 여기서 얼마나 더 살고 이사 갔을까.
몇 마디를 이어가던 그는 한동안 말없이 집을 올려다봤다.
갑자기 부모님을 잃은 채 할머니 손을 잡고 들어왔을 그와 누나. 작은 아버지는 비슷한 또래의 아들이 둘 있었다. 작은 아버지 댁에서 누나는 말도 잘 듣고 의젓했지만 동생은 말썽만 부리며 속을 썩이다 혼나곤 했다. 할머니는 둘째 아들에게 형의 자식을 둘이나 맡기는 게 불편하셨는지 "미국에 가면 더 잘 살 수 있을 거야." 라며 고아원으로 남매를 데려가셨다.
할머니라도 좀 거둬 키워주시지, 하는 원망 어린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어느 날 보게 된 고아원 가던 날 찍은 사진 속 할머니는 이미 많이 늙어계셨다. 증조할머니가 아니셨을까 싶을 정도로. 그래서 아마 하루라도 빨리 남매의 거취를 확실히 하려고 하셨던 건지도 모르겠다.
평일 낮시간 골목에는 사람 하나 없었고, 우리가 십 여분 간 서있는 동안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큰 기대는 안 했는데 작은 아빠네 주소였다니, 더운 날씨에 온 보람이 있었다. 할머니는 여기에서 돌아가셨구나.
학교보다는 이 주소에 관한 기대가 더 컸는데, 작은 아빠 댁이었다니 생각보다 큰 수확이었다.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는 이 곳을 눈으로 담고 사진으로 찍었다. 입양 후 그가 처음 찾은 한국에서의 발자취였다.
동네를 돌아보며 그가 다녔다던 교회도 찾아봤지만, 허허벌판이던 곳에 빽빽하게 건물이 들어서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지독한 길치인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동네를 몇 바퀴 돌다 포기하고 그가 다녔다던 천호초등학교로 향했다.
학교 근처는 공사 중이었다.
정문으로 들어가니 경비실에서 일반인은 학교 수업이 끝나고 방과 후 수업이 끝난 후에 들어갈 수 있다며 제지했다. 5시 반 넘어서 오시라는데 아직 세시도 안 됐다. 그래 학교는 뭐 중요한 거 아니잖아. 학교에서 나와서 집에 어떻게 갔는지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교문을 등지고 섰다.
-자 이제 생각해봐. 너는 지금 3학년 고정철이야. 수업이 끝나고 교문을 나서는 중이야. 이제 집에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겠어? 몸이 자연스럽게 가는 방향으로 한번 가봐. 이쪽이야? 아님 저쪽?
최면이라도 걸듯 주문하니 그는 "음, 이쪽인 것 같아" 라며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고 또 걷고 점점 학교에서 멀어지는데도 그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지긋지긋한 길치인데 기억력까지 꽝이라 도움이 안 된다.
기억이란 조금씩 왜곡된다.
남편은 아버지가 초등학교 3~4학년 때 돌아가신 후 작은 아버지와 1~2년 살았다고 했다. 연년생인 누나도 입양 당시 초등학생이었으니 나는 남편이 5학년 누나가 6학년이던 해에 입양 온 줄 알았다. 그러니 5년간 다닌 학교에서 집에 가는 길을 기억 못 한다는 게 이해가 안 가고 답답했다. 5학년 때 왔는데 한국말을 다 잊은 것도 이상했다. 지금 이 글을 쓰며 팩트 체크를 위해 입양센터에서 온 이메일을 다시 보니 "천호 국민학교에 3학년까지 다닌 걸로 기록돼 있습니다"라고 쓰여있다. 이메일이 왔던 당시엔 학교 이름과 할머니 주소에 흥분해서 다른 정보는 덜 주목했었다.
그렇다면 남편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2학년이 된 직후 4월에 돌아가셨고, 그 이후 1년간은 걸어서 30분 거리의 작은아버지 댁에서 학교를 다닌 것이다. 결국 본인 집에서 학교를 다닌 건 초등학교 1학년과 2학년 초 한두 달 정도다.
우리가 한 시간 넘게 그 동네를 돌고 돈 게 이제야 이해가 가면서 미안한 마음이 폭풍처럼 몰려온다.
8월의 무더위에 땀이 줄줄 흘렀다. 남편은 더운걸 못 참아서 한국에 있는 한 달 내내 덥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는데, 오늘은 묵묵히 열심히 걸었다. 우리는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생각해보니 말이야, 우리 집 바로 앞에 엄청 큰 목공소가 있었어.
-목공소? 확실해?
-응. 내가 집에서 장난으로 작은 불씨를 던졌다가 불이 날 뻔했었어. 불길이 커지기 전에 꺼서 다행이었지 안 그럼 큰 불이 날 뻔했어. 우리 집 바로 앞에 있었는데 그 정도 규모면 아마 이 동네 오래 산 사람들은 다 알 거야.
그는 땀을 흘리며 얼굴이 벌게진 채 애써 기억을 더듬었다. 잠깐 편의점에 들러서 땀을 식히고 마실 걸 사기로 했다. 남편이 음료수를 고르는 새 나는 아무 물이나 집어서 카운터로 갔다. 중년의 사장님께 혹시 이 동네에 70년대에 목공소가 있었냐고 여쭸다. 큰 기대는 없었지만 이렇게 마냥 걸어 다닐 수만은 없었다.
-목공소요? 제재소 말씀하시는 거죠? 하나 있었죠. 큰 제재소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혹시 그 자리가 어딘지 아세요?
-거기가 70년대부터 계속 제재소였다가 한 10년 전엔가 문 닫고 슈퍼마켓이 들어섰어요. 그랬다가 그 슈퍼가 이름이 바뀌었는데 지금은 이름이 뭐더라... 아... 기억이 날듯 말 듯 안 나네요... 아, 진성 마트예요. 지금 진성 마트 자리가 제재소였어요.
생각지도 못한 소득이었다.
80년대 초부터 이 동네에 사셨다는 편의점 사장님은 확신을 갖고 계셨다. 구글 지도에 검색해보니 진성 마트가 떠서 소름이 확 끼쳤다. 지도를 보니 아까 갔던 학교 바로 옆인데 우리는 거기서 한참 먼 곳까지 와 있었다. 몇 번이나 인사를 하고 나섰다. 실낱같은 희망이 생기니 기운이 나고 발걸음이 가벼웠다.
진성 마트에 가보니 남편이 기억하던 제재소의 모습은 없고 거리에 식당과 가게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옛날엔 집이 여기 하나 저기 하나 띄엄띄엄 있고, 큰 제재소가 중간에 있고 뒤쪽에 학교가 있는 정도였다는데. 지금은 그 사이를 집과 건물들이 채우고 있다. 그때 겨우 1~2학년이었으니 기억이 가물가물 할 만도 하다.
남편 말로는 집 건너편이 제재소 정면이었다고 했다. 골목에서 고양이를 쓰다듬고 계시던 할머님께 또 여쭸다. 진성 마트가 제재소가 맞는지부터 다시 한번 체크하니 맞단다. 혹시 제재소가 어느 쪽을 보고 있었는지 기억나세요? 제재소는 저쪽을 보고 있었지. 지금 슈퍼와는 반대편을 보고 있었어. 슈퍼 뒷문이 제재소 정문인 셈이지.
마트 뒤쪽으로 가니 옛날식 주택들이 즐비했다. 슈퍼마켓 바로 뒤에 오래된 연립주택이 있었고, 그 뒤에는 신식 빌라 건물, 인근은 대부분 단독주택이었다. 몇 바퀴를 돌며 눈에 익는 집을 찾았지만 딱 여기다 싶은 곳이 없었다. 그가 살았던 집이 있던 바로 그 자리까지 왔는데, 여기까지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마트 바로 뒤의 연립주택을 살펴보는데 아무래도 오래된 느낌이 폴폴 났다. 딱 봐도 7, 80년대 스타일이었다. 자기 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이걸 지은 건지도 몰라, 제재소가 저기라는데 그럼 딱 이 자리밖에 없잖아. 우리는 서서 5층 정도 되는 연립주택 건물을 바라봤다.
연립주택 사시는 아주머니 한분이 쓰레기를 버리러 아까부터 왔다 갔다 하시며 우리를 보셨다. 눈이 마주쳤을 때 놓치지 않고 말을 걸었다. "혹시 이 건물 언제 지어진지 아세요?"
이 동네의 좋은 점은 토박이 거주자가 많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말을 건 분들이 모두 7,80년대에 오신 분들이었는데 이 분도 마찬가지였다. 그 연립주택은 82년도에 지어졌고 그때부터 사셨다고 했다. 우리 사정 얘기를 간단하게 하고, 제재소를 찾아 여기까지 왔는데 아마 이 사람 집이 이 연립주택 자리인 것 같다고 하니 놀라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녀는 바로 뒤 신식 빌라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이 건물이 단독주택이었어요. 한동안 아무도 안 살고 비어있다가 2008년쯤엔가? 집 장사가 이 집을 사서 허물고 이 빌라를 지었어요. 한 십 년 전만 해도 그 집이 여기 있었어요. 단층 주택에 마당도 넓은데 좀 오래됐었지.
아까 몇 번이나 지나쳤지만 너무 요즘 건물이라서 뒤에 오래된 연립주택으로만 눈이 갔었다.
아주머니의 설명은 남편이 말했던 그대로였다.
마당이 있던 단층 단독주택, 82년도에 연립주택이 지어지기 전엔 제재소와 그의 집만 있었던 자리다. 어린 그의 네 가족이 살았던, 그러다 언제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떠났던 그의 집이었다. 작은 아버지 댁으로, 고아원으로, 멀리 한국을 떠나 미국까지 가서 모국어인 한국말을 완전히 잊을 만큼 오래 살다가 한국인 아내를 만나서 돌고 돌아 다시 여기에 와 보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흘렀다.
2008년이면 나를 만나기도 한참 전이다. 진작 의지를 갖고 한번 찾아봤더라면 집이 아직 있을 때 와 볼 수 있었을 텐데. 한국인이 없는 펜실베이니아나 영화학교를 다녔던 플로리다 주에서는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뉴욕에 오고 나서야 그는 잊고 살던 한국문화와 재회했다.
아쉬움에 그 건물 주위를 맴돌며 애꿎은 건물 기둥을 만져보고 건물 꼭대기를 올려다 보고 건물 주소를 사진으로 남기며 한참을 서 있었다. 건물을 올릴 정도면 마당이 넓은 집이었겠다. 좋은 집에 살았었구나 입양 가기 전에는. 그는 더위에 지친 건지 기쁜 건지 슬픈 건지 온갖 감정이 다 섞인 얼굴이었다.
집도 찾았으니 시원하게 팥빙수나 먹으러 가자.
오늘 출발할 때만 해도 그가 살았던 집이 있던 곳을 찾을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 걷느라 고생은 했지만 보람 있는 하루였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도 생기를 되찾았다. 내가 아니었으면 절대 찾지 못했을 거라며 이렇게 마음먹고 자기를 데려와주고 사람들한테 물어물어 끝까지 찾아줘서 너무 고맙다고 했다.
여전히 할머니와 아버지 묘소를 찾고 싶은 마음엔 변함이 없다.
그래도 작은 아버지 댁과 오래전 살던 집이 있던 곳이라도 찾아서 속이 다 후련하고 마음이 푹 놓인단다. 그 세월이,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내가 얼마나 헤아릴 수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