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에 유독 많은, 나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너의 호기심은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야. 네 경험을 듣고 있으면 넌 100살은 먹은 사람 같아."
2년쯤 전 논픽션 글쓰기 수업에서 교수님이 내게 하신 말씀이다. 소설가인 교수님은 60대를 훌쩍 넘긴, 나보다 한참 어른인 분이었기에 그 말씀이 더욱 마음에 깊게 남았다. 미국인 특유의 과장된 표현은 있지만 이 말은 내가 내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을 완전히 바꾼 말이었다.
그 수업을 계기로 난 소설 대신 에세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흥미를 느껴 당시 시작했던 브런치에도 지금껏 에세이 쓰기에 집중하고 있다.
교수님의 내 호기심에 대한 감상은 단순히 내 성향을 넘어 내 인생에 대한 예찬같이 들렸다. 내가 그동안 살아온 삶이, 해왔던 모험이 그렇게 헛된 건 아니었구나 싶은 안도감을 느꼈다.
90년대 아메리칸 홈 무비를 보며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나 홀로 집에, 미세스 다웃파이어, 시스터 액트 같은 영화를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 본 세대다. 그런 영화들을 통해 그들의 문화를 접하고 외국 생활의 로망을 키웠다. 영화에 나오는 미국 학교에는 실내 농구장과 락커가 있었고, 푸릇한 잔디밭이 깔린 이국의 동네엔 번듯한 이층 집들이 널찍널찍 떨어져 있었다. 수영장은 물론이고 뒷뜰의 나무 위에 트리 하우스까지 갖춘 집에 사는 어린이의 삶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다. 시트콤 LA 아리랑에 나오는 수영장 딸린 이층 집을 보며 나도 언젠가 저런 집에 살리라 했다.
해외 생활에 대한 동경은 중학교 때 일본 음악을 듣기 시작하며 또 다른 국면을 맞이했다.
미국행을 꿈꾸며 영어 공부를 한 것처럼, 이번엔 노래 가사와 TV 방송을 알아듣기 위해 일본어 공부에 매진했다. 중학교 때 혼자 일본어 공부를 시작한 덕에, 제2 외국어가 일본어인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도움이 많이 됐다. 원어민한테 배우겠다고 유난스레 시사일본어 학원까지 다니며 나의 해외여행과 외국생활에 대한 꿈은 커져갔다.
지금이야 주말에 홍콩이나 일본, 중국, 동남아 여행을 다녀오는 게 흔하지만,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만 해도 해외여행이 일상적이지 않던 시절이다. 해외에 자유롭게 드나들기 위해 처음 생각한 직업이 스튜어디스였다. 내 인생 첫 진로 고민 끝에 나온 답이었다. 영어와 일본어를 할 줄 아니 다른 덕목들만 갖추면 못 할 것도 없었다. 친구들과 버스를 타고 갈 때면, 난 승무원이 되어 비행기를 많이 타야 하니 버스 손잡이 따위 안 잡고 갈 수 있어야 한다고, 이렇게 열 정거장이나 왔으니 난 승무원 될 균형감각이 충분하다며 떠들던 게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고등학교에 가서는 승무원처럼 외국에 오가는 것보다 한 호텔 체인에 속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일하며 현지에 사는 게 더 좋겠다고 결론내고 호텔경영학으로 진로를 정했다. 사람마다 타고난 재능이 한두 가지 있다는데, 영어와 일어를 배우며 내 재능은 언어라는 걸 깨달은 것도 그때였다. 처음엔 외국 생활에 대한 로망으로 택한 분야였지만, 지금 보면 관광호텔 업계는 여러모로 최적의 선택이었다.
영어 특기자로 영문학과에 들어가면 더 좋은 학교, 국립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다고 설득하는 담임 선생님께, "저는 전문대를 가는 한이 있어도 무조건 호텔경영학과에 갈 건데요."라고 하니 바로 전투력을 상실하시고 원서를 써 주셨다. 그날 선생님과의 대화를 거의 20년 후에 아주 진하게 곱씹을 날이 오긴 했다.
중1 때부터 승무원이 되겠다고 했으니 진로에 대한 고찰을 일찍 시작한 편이고, 결국 계획대로 정확히 호텔경영학과에 들어갔다. 그때까지의 이야기만 봤을 때는 호기심이 내 삶에 미친 영향은 미미하다.
대학교에서는 아주 착실한 생활을 했다. 고등학교 때보다 더 착실해진 이유는 마침내 내가 원하는 것만 할 수 있게 되어서였다. 도서관에서 수시로 책을 빌려 읽었고, 매일 학교가 끝나면 영어 회화 학원, 영어가 끝나면 옆 건물의 일본어 회화학원에 갔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에버랜드와 롯데호텔로 실습을 나갔고, 1년 휴학하고 미국 플로리다 주의 호텔에서도 경력을 쌓았다.
호텔리어가 되기에 크게 부족함 없는 스펙을 쌓았지만, 막상 인턴쉽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갔을 땐 이미 큰 세상을 보고 온 후라 인생을 보는 가치관이 달라져 있었다. 한국과 미국의 호텔 분야에서 일하며 시야가 넓어지니 내가 모르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내가 일했던 플로리다 호텔에 비욘세와 그녀의 콘서트 스태프들이 며칠 묵고 갔던 영향이 있었을 수도 있다. 우리 호텔을 전세 내 묵었던 그녀의 공연 당일날 마침 휴무라 혼자 콘서트에 가서 비욘세, 알리샤 키스, 미씨 엘리엇을 본 후 불현듯 음악에 대한 열정을 깨달았다.
미국 팝 음악과 일본 음악으로 외국어를 배웠던 내가 아닌가? 난 평생을 음악에 빠져 살았는데, 왜 한 번도 음악 쪽 커리어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과거의 내 판단력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한국에 온 후 어떻게든 음반회사에서 일하기로 결심했다.
대학교를 졸업했지만 호텔 업계에 대한 관심은 사그라든 지 오래였다. 한국의 크고 작은 음반사와 소니, 워너뮤직 같은 외국계 배급사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낙방하고, 영어 실력으로 운 좋게 연봉 높은 섬유회사에 들어갔지만 음악에 대한 꿈을 마음에만 품은 채 평생 살기엔 내 나이가 너무 어리고, 벌써 포기하기에 내 인생이 아까웠다.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뉴욕의 음악 엔지니어링 학교에 들어갔을 땐 이미 호텔, 섬유업계를 거치고 난 세 번째 분야로의 도전이었다. 내 나이 스물다섯 살이었다.
뉴욕에 와서 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저작권 협회에서 인턴쉽을 했다. 그 후 유니버설 뮤직의 데프잼과 워너뮤직 같은 음반사에서도 경력을 쌓으며 꿈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결혼 후 미국에서 정식으로 취업할 수 있는 길이 열렸을 땐 또 다른 분야로 눈을 돌렸다.
학교 졸업 후 3년 간 미국 팝 음악 시장을 경험한 후 새로운 호기심을 따라가기로 했을 땐 음악 업계에 원도 한도 없었다. 내가 배우고자 한 걸 배웠으니 이제 마무리 짓고 move on 할 시간이었다.
결혼과 동시에 자격증을 취득하고 시작한 건 부동산 중개일이었고, 그 일을 4년쯤 하고 잠깐 쉬던 중 우연찮게 글쓰기로 출판에 참여할 기회가 생겼다. 글을 써서 돈을 번 건 처음이었는데, 내가 해 본 수많은 일 중 가장 내 재능을 살리는 일이란 걸 단번에 알았다.
3개월 만에 책 한 권 분량 글을 쓰고 일 년이 지나 그 책이 출판됐을 무렵엔 6년 가까이 몸담았던 부동산 업계를 떠나 본격적으로 문예창작을 배우기 위해 뉴욕에 있는 대학교에 편입한 상태였다.
약 15년 전 영문학과를 권유하신 고 3 담임선생님과의 대화를 뼈저리게 곱씹은 순간이었다. 그때는 생각도 하기 싫던 영문학과를 30대에 순전히 내 의지로 들어가는 날이 오다니.
인생이란 결국 수많은 아이러니가 만드는 완벽한 예술작품이 아닐까.
그렇게 또다시 커리어 변화가 이뤄졌다.
호텔업계, 팝 음악시장, 부동산 중개, 그리고 문예창작. 그 외에도 영어강사, 통역일, 바텐더 일도 몇 년 했고, 한 때 작사를 하겠다고 밤샘 작업을 하며 뮤지션 필에 취해보기도 했다.
여러 번 분야를 바꿔 본 사람들은 이해하겠지만, 이렇게 역동적인 삶을 살면 가장 존경스러운 건 한 회사나 분야에서 오래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에 비해 내 경험들은 수많은 시행착오의 증거처럼 느껴졌다. 전문 분야 없이 이것저것 시작했다 그만둔 것 같은 이력이 신경 쓰였고, 실제로 이력서를 쓸 때도 지원하는 포지션 관련된 경력만 넣곤 했다.
얼마 전 브런치에서 서른 넘어 석사를 시작한다는 분의 글을 읽었다.
반가운 마음에 들어가 단숨에 읽고 댓글을 적었다. 그 나이에 시작하시는 건 최적의 타이밍이에요. 저는 석사 미만 학위만 세 개네요. 그렇다. 난 석사도 하지 않은 채 학사 두 개와 전문학사 하나가 있고, 그것도 호텔 경영학, 음악 프로덕션, 영문학(문예창작) 등 서로 연관성을 찾을 수 없는 전공들이다.
영문학을 석사로 할 수도 있었지만 학사 레벨에서 기본기를 탄탄히 다지고 싶었다.
무엇이든 기초부터 배우려는 고지식한 가치관 때문에 석사 미만 학위만 세 개가 됐다. 본래 공부가 체질에 맞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전혀 아니다. 시험공부하려고 책상에 앉으면 책상 정리부터 하루 종일 하는 전형적인 공부와 담쌓은 사람이다.
계속 공부를 할 만큼 집안이 넉넉한 것도 아니고, 유학 중 학비와 생활비도 모두 직접 벌어 해결했다. 그저 궁금한 분야를 독서 이상으로 깊이 파고 싶은 호기심 때문에 이렇게 됐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주변에는 많지 않은데, 유독 그런 경험이 흔한 곳이 바로 이곳 브런치다.
브런치 메인에 올라온 글들을 보면 꿈과 행복을 위해 멀쩡히 다니던, 누구에게는 선망인 직업을 그만둔 작가들의 글이 많다. 공무원도 그만두고 초등교사도 그만두고 대기업도 그만두고 방송국도 그만두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 브런치다.
"우리"라고 칭하겠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호기심이 많아 세상의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는다. 우리가 모르는 세상에 늘 궁금증을 갖고 살아간다. 우리가 여행을 좋아하는 것도, 책을 가까이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이치다. 서점과 도서관에서 수많은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며 호기심 갈증을 해소한다.
우리는 세상을 더 잘 알기 위해 책을 읽고, 직간접적으로 삶을 경험하는 만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더 잘 알아가게 된다. 책을 많이 읽다 보니 자연히 글을 쓸 수도 있게 되어, 자연히 브런치에는 특별하지만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들의 글에 유독 공감하는 이유는 다들 내가 한 것과 비슷한 고민 끝에 비슷한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다만 많은 분들이 30대, 40대까지 유지한 커리어 끝에 그만둔 것에 비해 나는 커리어가 시작하기도 전부터 계속 바꿔왔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다.
문예창작을 배워 글쓰기를 제대로 한번 파 보자고 마음먹었을 때 안도감이 들었던 건, 그동안의 경험을 전부 활용할 수 있는 걸 마침내 찾았기 때문이었다. 내 인생 다사다난했던 이력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분야는 내가 아는 걸 바탕으로 뭔가를 창작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전공과 직종을 여러 번 바꾸고 알게 된 건 내가 단순히 호기심과 관심사가 바뀌어 옮긴 건 아니었단 사실이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아는 만큼 진화하고 발전한다. 나는 점점 새로운 것에 눈뜨고 나를 더 잘 알아가며 인간으로서 더 진화했고, 앞으로도 늘 새로운 뭔가를 배우며 살아갈 것이다. 나를 계속 움직여서 결국 원하는 삶에 이만큼 가까이 이끌어 준 호기심을 나의 어떤 재능보다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기로 했다.
그러니 인터넷이라는 무한한 정보의 바다에서 엄선된 글을 읽기 위해 브런치에 들어왔다. 블로그보다는 정제되어 있고 출간된 책보다는 다양하고 날 것인 "읽을거리"를 일부러 찾는 브런치 독자들은 (경험상) 대부분이 작가들 이상으로 호기심이 많은 지성인들이다.
당신이 어떤 선택 사이에서 망설이거나 후회한 적이 있다면, 그건 당신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진화하는 중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회적 성공과 경제적 안정을 보장하는 직업을 버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가치를 따르는 삶을 택한다. 돈보다는 소소한 행복을, 명예보다 가족과의 시간을 택하는 사람들, 우리는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게 뭔지를 배우고 선택하면서 성숙하고 현명해진다. 그런 선택을 한 용기와 호기심을 더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다.
나도 한 분야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산 결과, 변화하는 세상에 빠르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순발력과 창의력이 향상되었다. 내가 깨닫기까지 오래 걸린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이 글을 썼다. 당장은 시행착오인 경험일지언정 우리의 삶은 분명 나아지고 있다. 자신의 선택을 더 굳건하게 믿을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