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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챗쏭 May 17. 2019

세상이 맺어 준 두 남매의 이별

어떤 파양소송 이야기

“오늘 꼭 선고를 하려고 했는데요, 못하겠습니다.
제가 이 사건을 반드시 끝내려고 어제 밤 늦게까지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새벽에 집에 가서도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원고의 사정도 참 딱한데요, 한 달 정도 시간을 좀 줄 수 있을까요?
제가 그 사이에 조금 더 나은 방안을 찾아보겠습니다.

피고측으로는 혹시 누가 나오셨나요?“


비어있는 피고의 자리에 재판장의 공허한 목소리만 울렸다.


이 사건의 원고는 ‘엄마’,

피고는 7살, 3살된 남매였다.


‘엄마’는 남편과의 사이에 결혼 후 몇 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남편은 아내에게 입양을 상의했다. 처음에 아내는 제안을 거절했지만, 남편의 긴 설득 끝에 3살 딸아이를, 그리고 2년 후에는 태어난 지 일 년이 채 안 된 남자아이를 입양했다. 그렇게 세상이 맺어 준 네 식구가 탄생했다.    


삶이 기구해지려면, 소설만큼의 상상력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일이 벌어진다.    


세상이 허락한 네 식구의 행복은 단 1년뿐이었다.

아이들의 아빠는 그렇게 네 식구가 된 지 1년 만에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아빠가 세상을 뜬 후 애초에 아이들을 입양하는데 자신이 없던 엄마는 마음이 약해져 갔다. 경제력도, 아이들과 함께 할 삶도 자신이 없었다. 엄마는 우울증에 빠져 아이들을 방치했다. 큰아이는 7살, 둘째아이는 3살이 되었을 때.


'엄마'는 아이들을 키울 자신이 없었고, 젊은 나이였을 뿐더러 재출발을 위하여 아이들을 파양하겠다며 법원에 소장을 제출했다.




파양소송을 하게 되면, 재판장은 입양된 아이와 양친과의 애착관계나 양육환경을 살펴보기 위하여 가사 조사관으로 하여금 이것을 조사하게 할 수 있다. 조사한 내용은 재판장에게 보고되고 판단의 자료로 쓰인다. 만일, 아이들과 엄마의 관계가 파양을 하고 복지시설에 맡기는 편이 더 낫겠다는 판단이 든다면, 재판장은 파양의 결정을 내리기 쉬울 것이다.


재판장은 재판 중에 조사관의 의견을 듣기 위하여 따로 불렀다.


"조사관님, 아이들을 만나보셨나요? 어떻든가요? 애들은 잘 지내요?"


"네, 판사님. 집에 가서 아이들을 만나봤는데요, 다른 어떤 평범한 집의 남매보다 가까워보였습니다. 아이들이 엄마와는 상관없이 둘이서 무척 잘 놀아요. 엄마가 아이들과 놀아주거나 돌봐주지 않다보니 둘의 사이가 더 각별해 진 것 같아요."


"방문했을 때, 엄마가 집에 같이 있었죠?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혹시 말씀해주실 것이 있나요?"


"집에 갔을 때, 작은 아이는 누나만 따라 다녔어요. 엄마가 있었는데도 곁에 가지 않구요. 7살 밖에 안 된 누나가 3살 동생을 챙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7살이면 누군가를 챙길 나이가 아니라 이쁨만 받아도 부족한 나이 아닌가.





한달의 시간을 두고 미뤘던 재판은 계속되었다.

그 사이 사건을 둘러싼 변화가 생겼다. 구청과 복지시설의 도움으로 7살 딸아이를 입양하겠다고 하는 가정이 나타난 것이다.


재판장은 다시 원고에게 물었다.


"혹시, 큰아이가 자신이 입양된 사실이나 파양될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이 사건과 관계된 내용을 알고 있나요?"


 '엄마'는 무감각해보였다. 나는 재판장이 한 질문의 의미가 그에게로 가 닿지 않았거나 또는 아무 의미없이 그를 통과하고 있다고 느꼈다. 순간 그가 텅 빈 모습으로 보였다.


"네, 다 알고 있어요. 제가 얘기해줬거든요. 입양된 것은 남편이 죽고 나서 오래지 않아 얘기해줬구요, 파양되면 복지시설에 가서 살 수 있다는 얘기도 해줬어요."


그뿐이 아니었다. 큰아이에게 너는 어느 집으로 갈 수 있다는 것도 말해주었다고 했다.


그랬더니 묻더란다. "동생은요?" 


7살 누나는 3살 동생과 헤어질 수 없다며 매일같이 울고불고 한다고 했다. 등줄기로 뜨거운 것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왔다. 세상의 무엇이 이 아이들을 함께 살게 했으며, 이제는 이 둘을 갈라 놓으려 하는 것인가. 차라리 이 자리에서 아이들의 눈을 마주하지 않은 것만이 다행이었다. 나는 그 어떤 감정으로도 그것을 마주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중 입양이 잘 되는 것은 '여자아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 사건으로 알았다. 7살 누나는 입양하겠다고 한 가정이 나타났으므로 새로운 양부모에게 입양이 된다. 3살 동생은 아동복지회 같은 시설에서 다른 양부모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거나 보육원에서 자라게 되는 것이다. 사건은 결론을 향해 가고 있었다.



사진 unsplash_@felipe-elioenay


여전히 비어있는 피고측 자리 뒤에서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저, 제가 말씀 드려도 될까요?"

"누구시죠?"

 

사건의 제3자를 향해 재판장의 무거운 눈이 움직였다.


"전에 이 가족을 담당했던 구청 공무원입니다. 사실, 자리를 옮겨서 제가 더 이상 맡지는 않게 되었는데요, 사정이 딱해서 휴가를 내고 재판에 나와 봤습니다. 죄송하지만, 시간을 더 주시면, 아이들이 헤어지지 않도록 조금 더 방법을 찾아보면 안될까요?"


재판장은 기한을 두지 않은 채로 사건을 연기했다.


원고에게도 사정을 구했다. 원고의 사정이 어떠한지, 어떤 마음인지 이 사건을 오래 다루면서 많이 이해할 것 같다는 말과 함께. 다만, 원고의 아픈 마음을 치료할 시간을 갖게 되길 바란다고. 그리고 그 시간만큼만이라도 이 사건의 결정을 조금 미루면 어떻겠냐는 동의를 구했다.


세상의 흔한 셈법으로 보자면, '엄마'에게는 그럴 거면 왜 처음부터 입양을 했냐는, 당신의 결정에 책임을 지라는 손가락질을 할 수도 있겠다. 아이들에게는 너희는 처음부터 남매가 아니었으니 그런 운명인 것을 어쩌겠나 하는 무참한 말을 건넬 수도 있을 것이다. 절벽으로 내 모는 손가락의 힘은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미 충분했다.


'엄마'의 텅빈 눈동자를 향해, 혈육으로 맺어진 남매보다 따뜻한 아이들의 마음을, 세상은 그들을 보듬어 안아 줄 차례였다.



몇달 후, 다른 사건에 치여 이 사건을 잊어가다가 드디어는 선고 날짜가 잡혔다.


2014드단ㅇㅇㅇ호,
주문
원고와 피고들은 파양한다.


세상이 지켜주고 싶은 행복이 있다. 세상의 셈법으로 돌려 받을 무엇을 기대하지 않고 건네 진, 사람을 향한 따뜻한 마음, 선한 의지로 시작된 일의 결말 같은 것 말이다. 세상이 맺어 준 두남매를 그대로 남게 해 주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차가운 법의 언어로 그 둘을 갈라 놓는 것만이 세상이 건네 준 법원의 역할은 아니었을 것이다.



처음 누나만 입양하겠다고 한 집에서는, 동생과 헤어질 수 없다며 매일 같이 울며 지낸다는 사정을 듣고 오래 고민했다고 한다. 이미 키운 두아이가 고등학생, 대학생이 된 집이었는데, 두 아이가 좋은 형, 누나가 되어 주겠다며 여섯식구가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아이들은 헤어지지 않게 되었다.



그 둘의 소식도, 그 이후의 삶도 알지 못한다.

법원의 언어는 "엄마"에게서 버거워하는 굴레를 벗겨 주었다. 아이들은 '세상이 맺어 준 남매'로 그렇게 남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세상의 선한 마음의 목소리가 있다면, 내가 그것을 대신할 수 있다면, 새로이 맺은 여섯식구의 행복을 기원하고 싶다.






이 글은 사건을 재구성하여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 사진:  Photo by Annie Spratt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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