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열의 음악앨범>을 보고
※<유열의 음악앨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의 방문자다. 빠른 75년생인 김미수(김고은)와 그냥 75년생 차현우(정해인)는 1994년 10월 1일부터 2005년 여름까지 서로의 공간을 오가고, 첫사랑으로 끝났을 관계를 운명적 사이로까지 발전시킨다.
미수와 현우가 처음 만난 날 첫 방송을 한 KBS 아침 라디오 ‘유열의 음악앨범’은 두 사람이 11년 연애사를 쓰는데 우연하고도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스크린을 습격하듯 울려 퍼지는 그 시절의 유행가는 관객에게 소환할 러브 스토리가 있든 없든 잠시간의 일렁거림을 선사한다. 이제는 누군가의 일기장 속에만 존재할 동네 제과점과 만화 대여점 그리고 천리안 이메일은 파리바게뜨 빵을 먹고 네이버 메일을 쓰며 자란 내게 각별한 추억거리로 위장한다.
과거에 대한 향수를 본격적으로 푸는 일은 나의 윗세대에게 맡긴다. 그들은 나와 달리 경험자다. 대신 나는 미수와 현우에게 집중하고자 한다. 나는 그들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기 때문이다. 윤상의 앨범을 무한 반복하며 이 글을 쓴다.
너무 달라서 어려운 사이
정지우 감독이 연출한 <유열의 음악앨범>은 남녀 주인공이 서로의 물리적인 개인 공간에 발을 들이고 그 사람의 삶에 진입하기까지의 우여곡절을 그린다. 좀 더 어려움을 겪는 쪽은 미수다. 현우가 미수의 세계에 쉽게 들어가고 적응하는 반면 미수는 현우의 세계에서 겉돌거나 튕겨 나가기도 한다.
현우의 세계가 상대적으로 미수의 세계보다 폐쇄적이기 때문이다. 그 차이는 두 캐릭터가 가진 성격과 처한 환경의 틈에서 발생한다. 미수는 부담이 적은 캐릭터다. 그에게는 갈등이 생길 만한 비밀이 없으며, 타인에게 지금 자신의 상태가 후지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솔직하다. 무엇보다 삶의 무게를 덜어줄 조력자가 그의 곁에는 있다.
현우는 미수와 정반대다. 현우는 만만치 않은 캐릭터다. 우선 그에게는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어두운 과거가 있다. 그는 그것이 밝혀지지 않도록 매일 기도하며 부러 웃는 얼굴을 연기하는 성격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는 혼자다.
다정한 미수제과점, 현우를 품다
1994년 미수제과점으로 가보자. 그곳은 과거 미수의 엄마가 운영했었고 지금은 미수가 일한다는 점에서 완전한 그의 공간이다. 그곳에 현우가 아르바이트를 하겠다며 막무가내로 입성한다. 미수에게는 그런 현우를 거부할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다. 현우는 감옥에 갔다 온 것 같다는 의심이 드는 인물이자 직접 해명할 기회가 생겼을 때도 대답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미스터리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미수는 엄마의 수제자였던 은자 언니(김국희)를 가족으로 여기며 함께 제과점을 꾸려가듯 현우도 환대한다. 그 덕분에 현우는 미수제과점에서 갓 나온 빵을 나눠 먹고 성탄 트리도 함께 장식하며 미수의 세계에 자연스레 안착한다.
캐묻지 않는 미수의 집, 현우를 껴안다
1997년에도 미수의 세계에 현우가 방문한다. 이때의 공간은 미수의 집이다. 미수는 폐점한 미수제과점 앞에서 현우와 우연히 재회한 그 날, 그를 자신의 집에서 재운다. 3년 전 현우와 좋지 않은 결말을 보았음에도 말이다. 당시 현우는 가불을 받고 자신의 무리와 함께 가게를 완전히 떠났었다.
그런데도 미수는 현우에게 과거를 따져 묻지 않고 그가 검정고시에 합격했다는 말에 자기 일처럼 기뻐한다. 그런 미수의 행동에 현우는 그간의 행적과 다시 가게로 돌아오고 싶었다는 진심을 고백한다. 조건 없는 환대가 이뤄지는 미수의 세계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좀 더 미래가 있는 방향으로 연장된다. 관계의 진전이라는 기쁨 앞에서 당장 내일 이뤄지는 현우의 입대는 슈가 파우더처럼 아주 작은 것이 되어 버린다.
미수의 그늘 아래에서는 불안하다
미수제과점이 명진 부동산으로 바뀌고 기다림과 엇갈림의 장난이 있었던 2000년을 지나 2005년이 되어서야 미수는 현우의 세계에 방문할 기회를 얻는다. 현우의 공간이 두 곳이나 등장하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된 현우가 활동하는 영상 창작 집단의 사무실과 그가 사는 집이 바로 그 공간이다.
그러나 모두 현우만의 독립적인 공간이 아니라는 점에서 미수제과점, 미수의 집과는 차이가 있다. 미수가 일하는 출판사 건물 위층에 현우가 속한 집단의 사무실이 있고, 1997년 미수가 살았던 집에 현우가 월세를 들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수는 현우의 집안에 들어가자마자 욕실을 살펴보며 옛집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데에 더 열중한다.
두 세계의 미묘한 공존. 그것은 마침내 미수가 현우의 물리적인 공간(집)에 진입했음에도 여전히 그가 현우의 세계 바깥에 존재한다고 느끼게 한다. 첫 번째 단계조차 넘지 못한 미수는 당연히 현우의 내면을 볼 수 있는 두 번째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다. 막 연인이 된 두 사람의 간지러운 장면들이 이어졌음에도 내가 그들의 관계에서 불안감을 느낀 이유다.
미수, 침입자가 되다
미수는 결국 현우의 세계에 침입한다. 현우 몰래 현우가 숨기는 과거와 연관된 인물들을 직접 만난다. 애인에 대해 전부 알지 못한다는 공포에서 벗어나야만 그를 정확히 사랑할 수 있음을 미수는 알기 때문이다. 동시에 언제쯤 괜찮아질지 알 수 없는 그를 편안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 또한 미수에게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환대할 준비를 하지 못한 현우는 만남 사실을 알게 된 뒤 미수 앞에서 처음으로 욕을 하며 난폭한 모습을 보인다. 화를 못 이겨 자기 집 문을 박차고 나갔던 현우는 간밤의 주먹다짐과 은자 누나와의 시간을 통해 미수를 환대할 마음을 먹지만 늦는다. 현우의 반응을 통해 자신이 그의 세계의 완벽한 침입자임을 확인받은 미수가 그전에 모든 노력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온 현우는 미수가 아닌 미수가 벗어두고 간 생활복과 마주한다.
현우의 실패는 영화에 무해하다
이별 뒤 현우는 처음으로 미수의 세계 진입에 실패한다. 미수가 더는 그를 환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미수를 좋아하는 출판사 대표 종우(박해준)가 그 세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우는 미수와 관련된 어떤 물리적인 공간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이별 뒤 그가 미수의 집이나 회사 안에 있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미수의 사진을 천장에 붙여두었던 사무실은 계약 만료로 진입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미수가 탄 종우의 차 안으로는 들어가기는커녕 그 차를 따라잡기 위해 그는 고행하듯 달린다.
그러나 이러한 현우의 진입 실패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현우의 역할은 길 한복판에서 미수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그 고백 덕분에 미수가 현우에게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유열의 음악앨범>이 보여주고 싶은 사랑의 기적은 줄곧 실패해왔던 미수가 성공해야만 완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라진 세계, 달라진 두 사람
드디어 미수가 현우의 세계로 갈 차례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이 과정 전체가 이전까지와는 확연히 달라진 것이다. 나쁜 쪽으로 말이다. 이 부분 부터 미수와 현우의 세계는 모호해진다. 미수제과점과 두 사람의 집처럼 현실감을 주었던 물리적인 개인 공간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유열의 음악앨범’이라는 거대하고 추상적인 개념이 들어선다.
고유한 성격과 기억을 가진 미수와 현우라는 캐릭터는 익히 본 멜로 영화 속 환상의 남녀 주인공이 되어 제 모습을 감춘다. 그래서 미수가 현우를 만나기 위해 죽기 살기로 달리는 장면과 현우가 다시 만난 미수의 얼굴을 사진으로 남기는 장면은 예쁘지만 공허하다. 세계 전체가 붕괴하는 변수로 인해 미수는 또다시 현우의 세계에 완전히 진입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유열의 음악앨범>은 해피 엔딩이다. 라디오 방송의 마지막 멘트가 언제나 희망적이듯 말이다.
해피 엔딩을 맺기 위해 영화가 무리한 것으로 추측된다. 앞서 말했듯이 <유열의 음악앨범>은 사랑의 기적을 말하는 영화이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별한 것으로 끝내도 이상할 것 없는 두 남녀를 다시 연인 사이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실성이 떨어지더라도 라디오와 젊음이 가진 낭만과 유명 팝송이 가진 분위기의 도움을 받아 마지막을 꾸며야만 했을 것이다. 알면서도 못내 아쉽다. 이런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영화를 보는 동안 미수와 현우 그리고 두 사람의 동네에 정이라도 든 걸까. 아니면 지금 내가 듣는 윤상의 목소리가 센티멘털해서일까.
[chaeyooe_cinema]
유열의 음악앨범 Tune in for Love
감독 정지우
그 시대의 사연과 그 시절의 유행가가 서로의 손뼉을 딱 하고 마주치면,
나는 그곳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