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aeyooe Nov 11. 2020

‘소리도 없이’ 이제 태인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소리도 없이>를 보고


※ <소리도 없이>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극 중 초희(문승아)에게 나는 두 번 부탁했다. 약국에 간 태인(유아인)이 집을 비운 틈을 타 도망쳤을 때는 다시 그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같이 온 저 사람은 누구냐고 담임 선생님이 물었을 때는 그를 유괴범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뜨악했다. 그게 유괴된 어린아이에게 할 소리인가. 나는 얼른 생각을 고쳐먹었지만 혼란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이 과정을 반복했다. 잘못하고, 아뿔싸 싶어 반성했다. 도대체 이 영화는 왜 이렇게 나를 괴롭히나 싶었지만 최근에 이만큼 관객을 참여하게 만든 한국 영화가 있었나를 떠올리니 우는 소리가 쏙 들어갔다. 착각하는 순간 당신이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안다는 듯 정신 차리라며 뒤통수를 치는 <소리도 없이>는 분명 귀한 영화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소리도 없이>


그렇다면 나는 초희에게 어떻게 잔인한 부탁을 할 수 있었던 걸까. 그건 내가 태인이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파트너 창복(유재명)과 조폭의 궂은일을 처리하는 사람이지 진짜 조폭은 아니다. 고문과 살인과 저지르는 조폭의 죄질에 비하면 창복의 지휘 아래 사람을 매달고 시체를 매장하는 태인의 그것은 가볍지 않은가.

     

또한 태인은 엄밀히 말해 진짜 유괴범은 아니다. 일이 어그러져 엉겁결에 유괴된 아이를 창복과 떠맡게 된 것뿐이고 또 둘 중 그가 하필이면 인적 드문 외딴집에 사는 바람에 그 아이를 도맡게 된 것뿐이다. 그러니 태인은 부모에게 자식의 몸값을 요구하는 극악한 인간들과는 다르지 않은가.


여기까지 생각이 뻗어나간 건 태인이 악한 자 중 가장 덜 악한 자의 위치에 있어서, 그가 자전거로 오가는 동네의 고즈넉한 경치와 분위기에 취해서 그 역시 범죄자라는 사실을 내가 잊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태인에게 호의를 느꼈던 나는 문뜩 그가 살인에 가담했고 유괴에 동참했다는 걸 깨닫고는 흠칫했던 것이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소리도 없이>


또한 나는 태인은 생각보다 믿을 만한 사람으로 오인했다. 그는 초희에게 육체적인 위협을 가하지 않았다. 살가운 성격은 못 돼도 한밤중 외따로 떨어진 화장실에 들어가 무서워하는 초희를 위해 뚝뚝한 박수 소리로 인기척을 냈다. 장기 매매업자 손에 초희를 넘겼지만 곧장 아이를 구출하러 갔다. 애가 토하자 약을 사러 나갔고 애가 사라지자 애를 찾으러 나갔다. 그리고 결국 초희를 제 손으로 풀어 줬다.

     

태인에 대한 긍정적 시각은 그에 향한 결정적 의심, 즉 그가 소아성애자일 수도 있다는 의심이 해소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의심은 특정 장면이나 행동에서 불현듯 생기는 게 아니다. 거구의 미스터리한 성인 남자와 작은 여자아이 사이의 현격한 체격과 나이 차이에서 저절로 들솟는다. 그러니 초희가 태인의 단칸방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장면에서 초긴장 상태가 되는 걸 막을 수 없다. 그곳에 태인의 어린 동생 문주(이가은)가 자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하는 관객의 입장에서 두 사람이 좁은 공간에 단둘이 있는 상황은 끔찍한 상상으로 이어져 숨이 막힌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소리도 없이>


의심의 불길은 태인이 점차 사람이 아닌 동물처럼 느껴지면서 잠잠해진다. 상체를 약간 숙이고 양팔을 늘어뜨린 채 어기적어기적 걷는 모습이나 무덤덤하면서도 은근히 심통이 난 듯한 태인의 기본 표정은 <혹성탈출> 프리퀄 삼부작의 유인원을 연상하게 한다. 그 모습에 익숙해질수록 내 눈에 태인과 초희는 덩치 큰 동물과 작은 인간처럼 보였고, 두 사람이 한 프레임에 잡히기만 해도 감돌았던 긴장감은 완화됐다. 실제로 홍의정 감독은 태인이 ‘영역을 침범당한 고릴라’처럼 보이길 바랐고, 유아인 배우에게 참고할 만한 고릴라 영상도 보냈다고 하니 나의 착각이 엉뚱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영화는 마지막에 들리진 않지만 초희의 입으로 직접 태인의 정체를 밝히게 함으로써 내가 낸 오인의 유리창을 완전히 박살 낸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학교 운동장을 빠져나와 달리는 태인을 초희의 눈으로 응시하며 그에 대해 다시 쓴다. 그는 나를 겁먹게 했고, 가두었고, 감시했으며, 팔아넘겼고, 잡으러 왔다. 그는 유괴범이다.




[chaeyooe_cinema]

소리도 없이 Voice of Silence

감독 홍의정




얼마만 인가. 예상하던 얼굴도 바라던 대답도 주지 않는 한국 영화가.
[★★★☆]



매거진의 이전글 집에 있을 때 '히치콕' 보려고 했잖아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