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크>를 보고
지금으로부터 한 팔십 년 뒤쯤 어느 영화감독이 <기생충>(2019)을 준비하고 촬영하던 시절의 봉준호 감독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고 했을 때, 그가 흥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전설을 두고 평정심 찾기란 상상만으로도 어려운 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데이비드 핀처는 <맹크>를 찍으면서 침착하다.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꼽히는 <시민 케인>(1941)을 집필하는 시나리오 작가 허먼 J. 맹키위츠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도 핀처는 걸작도 거장도 칭송하지 않는다. 애초부터 <맹크>는 그러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맹크>는 현재 <시민 케인>의 초고 작업으로 인해 외딴 목장에 박힌 맹키위츠(게리 올드먼)를 거듭 플래시백에 태워 과거로 파견한다. 1940년 현재의 그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에 교통사고로 다리까지 다쳐 꼼짝 못 하는 신세지만 1930년부터 1937년까지 과거의 그는 할리우드 황금기 한복판을 어쨌든 자기 발로 종횡무진한다.
파라마운트와 MGM 스튜디오에서 영화 산업 종사자들과 대면하고, 신문 황제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찰리 댄스)와 배우이자 그의 애인인 매리언 데이비스(아만다 사이프리드)와 안면을 트고, 대공황 이후 보수화된 할리우드와 뉴스 영화로 얼룩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를 목격하는 탐방의 시간은 다시 말해 ‘작가 맹키위츠 씨의 일일’이다.
영화가 그에게 아무런 임무도 주지 않고 그곳으로 보냈을 리 없다. 작가 맹키위츠는 과거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겪었던 일들로부터 글감을 얻고 구상을 구체화한다. 그리하여 현재의 그는 침대에 누워 비서이자 타자원인 리타 알렉산더(릴리 콜린스)에게 <시민 케인>의 첫머리를 띄엄띄엄 불러 준다.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저택 허스트 캐슬을 연상하게 하는 찰스 포스터 케인(오슨 웰스)의 저택 제나두에 대한 묘사다.
<맹크>는 <시민 케인>을 챙겨 보고 온 성실한 관객에게 실망감을 줄 수도 있는 영화다. 물론 <시민 케인>의 유명한 대사 ‘로즈버드’를 <맹크>에서 들었을 때 반가울 것이다. <맹크>에서 목장을 찾아온 오슨 웰스가 홧김에 술병을 내던지는 걸 지켜보던 맹키위츠가 그 모습을 영화에 써먹겠다고 말할 때 퍼뜩 <시민 케인>에서 케인이 두 번째 아내 수전(도로시 코민고어)이 자신을 떠나자 아내의 방 안의 물건들을 때려 부수는 장면이 떠올라 기쁠 것이다. 그러나 <시민 케인>을 한 번 보는 것 정도로는 잔재미 이상의 효과를 기대하긴 어렵다.
오히려 1930~40년대 미국사와 그 당시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에 관한 자료를 훑는 것이 영화를 따라가는 데에 요긴하다. 관련 정보가 없다면 어빙 솔버그(퍼디난드 킹즐리)처럼 생소한 이름의 영화인이 등장할 때마다 혼동되고, 업튼 싱클레어와 프랭크 메리엄이 맞붙은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 전날 밤 장면부터는 어리둥절하다가 흥미를 잃고 어느 순간, 잠들지도 모른다. 배짱 좋게도 <맹크>는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온 관객은 돌보지 않는다. 공부한 관객에게만 그에 합당한 즐거움을 내어 준다.
핀처의 작품 중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8)가 가진 벨벳 같은 우아함이 깔린 흑백 영화 <맹크>는 근사한 화집 같다. 안개가 낀 듯 흐릿한 화면의 톤은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인상을 주지만 등장인물의 조합과 상황에 따라 검은색의 짙고 옅음을 충분히 활용해 이미지의 단조로움을 탈피한다. 처음 만난 맹키위츠와 매리언이 밤길을 걸으며 대화하는 장면은 조명이 두 인물을 온화하게 감싸 <미드나잇 인 파리>(2011)처럼 낭만적이지만 만찬장에서 맹키위츠가 허스트를 앞에 두고 독백하는 장면은 아스팔트로 덮은 듯 어둡고 거칠다.
배우 게리 올드먼, 아만다 사이프리드, 릴리 콜린스는 화폭에 어울리는 여유와 품위가 느껴지는 연기를 보여 준다. 유머러스하고 푸근한 양반처럼 굴다가도 돌연 매섭게 치받는 게리 올드먼은 그가 아카데미 수상자란 걸 상기하게 하고, 오해받는 여인의 심정을 얼굴에 띄우는 아만다 사이프리드는 그가 <맘마미아!>의 소녀와 이미 오래전에 작별했음을 확인하게 하며, 고전적인 분위기의 릴리 콜린스는 존재 자체로 시대극의 멋을 살린다.
과거에 사람들을 직접 만나러 다녔던 맹키위츠는 현재에 와서는 자신에게 사람들이 찾아오게끔 하는데 그가 손님들을 응수하는 모습에서 드러나는 건 작품에 대한 뚝심이다. 허스트를 정조준하는 시나리오를 읽고 찾아온 매리언과 영화 제작자인 동생 조지프(톰 펠프레이)는 물론이고 퇴고 작업에서 빠지라는 오슨 웰스 앞에서도 그는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다.
<맹크>는 맹키위츠가 집 앞에서 <시민 케인>으로 받은 아카데미 각본상 트로피를 손에 쥔 모습으로 끝이 나는데, 이 마지막 장면은 영화가 맹키위츠만을 위해 차려준 조촐한 시상식처럼 보인다. 그것으로 영화는 <시민 케인> 앞에 붙는 이름에 오슨 웰스뿐만 아니라 허밍 J. 맹키위츠도 가능하다는 진심을 대신한다.
[chaeyooe_cinema]
맹크 MANK
감독 데이비드 핀처 David Fincher
위대한 작가와 영화를 칭송할 거란 예상과 달리
유유하고 꼿꼿하게 시대를 탐방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