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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권목 Mar 25. 2023

누구의 무엇도 아닌, _하수

에세이_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참고: 이전 글 <누구의 무엇도 아닌, _양순>

https://brunch.co.kr/@alswjd9142/44


한하수성수동 할머니친할머니

한하수는 어렵다. 하수는 양순(외할머니) 보다 어렵고 먼 사람이다.

지금도 나의 애정은 양순에게 더 기울어져 있다.

아마 하수는 양순보다 내게 덜 ‘할머니’ 같아서 그런 것인지도.

무엇이든 주려는 양순을 향한 애정은 당연하다.

하지만 양순에게 미안하게도,

‘양순보다는 하수처럼 살고 싶다, 

가끔 양순이 전전긍긍하지 말고 하수만큼 편했으면 좋겠다.’ 생각한다.

하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역시 많지만 상대적으로 그렇다.

하수는 양순보다 돈 걱정이 없고, 아픈 곳이 적고, 

죽은 자식이 없고, 어려워하는 사람이 적고, 

주지 못해서 쌓이는 스트레스도, 

흔히 주입되는 엄마와 할머니로서의 희생정신도 없다.

하수는 그렇다.

그래서 볼 때마다 새롭고, 알고 싶고, 

어떤 모습이 진짜인지 궁금한 사람이다.     


한하수는 아마 최초는 아닐 테지만 

내게 최초의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이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이야기는, 

그러니까 자기 전 누군가 읽어주는 것이 아닌 

말로 전해주었던 옛날이야기, 

그래서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이야기, 

그 답지 않게 약간의 연기를 가미했던 이야기, 

지금은 기억나지 않은 토끼가 주인공인 이야기이다.

고모 아들들이 없는 밤,

그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들었던 그 이야기 속에서 

그의 사랑을 확인하고는 만족스레 잠들곤 했다.

어릴 적 난 하수네 집에서 자기만 하면 

눈이 붓고 콧물을 흘려 어른들을 걱정시켰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난 집먼지 알레르기가 심한데 하수네 집은 환기를 잘하지 않아서 알레르기 증상을 보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늘 낮에는 어두운 부엌이나 구석 자리에만 있던, 

친척들이 많이 모이는 날에는 어쩐지 더욱 멀게 느껴졌던,

하수의 곁을 그때야 차지하고는 

하수가 어서 나를 보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수와는 그리 친하고 편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때만큼은 하수가 가깝게 느껴져 좋았다.

사실 옛날이야기는 양순이 더 실감 나게 잘해주었는데도 말이다.

내가 꿈꾸는 할머니에 늘 이야기를 해주는 할머니가 자리하는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하수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모르고, 

아무도 모르게 용돈을 준 적도 없고,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한다거나 상기시킨 적 없고, 

나에 관한 것은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그랬었나?" 하고 되묻는다. 

하지만 그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느 어두운 밤 최초의 이야기가 되어 주었고,

어린 손녀가 오면 포도 껍질과 씨를 골라내어 

대접에 알맹이만 가득 담아 건네주었다.

어느 해에는 뜬금없이 생일에 전화를 걸어 

늘 상 그래온 것처럼 생일 축하한다고 말해주었고,

정신없는 제삿날 학교 숙제로 혼자 달을 보러 나가는 나를 따라 

같이 옥상에서 달을 봐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마 사랑이었을 것이다.  

하수는 그렇게 천천히 곱씹어야 알 수 있는 사랑을 주었다.     


한하수가 최초의 이야기를 해준 사람이라 해서 

예쁘고 좋은 말만, 재밌는 말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하수는 생각을 바로 말해버리는 타입이라 

종종 주변 사람들을 기겁하게 한다.

자식, 손주 포함 본인의 외모에 대해 말하는 데 거침이 없으며,

그의 좁은 세계를 기준으로 

조금이라도 정상이라 여겨지는 범위에 벗어나는 것을 보면 

참지 못하고 말해버린다.

이를테면 낮에 병원에서 가족을 간병하는 20대 초반의 학생을 보면,

“쟤들은 학교도, 일도 안 다니나 보네.”라고 속삭인다.

속삭인다 생각하지만 꽤 큰 목소리로 말해 

서둘러 두 손으로 그의 입을 막게 하는 재주가 있다.

물론 악의는 없고 그도 막힌 입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허허 웃을 뿐.(그렇다고 듣는 사람의 기분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착한 외모에 그렇지 못한 태도를 지닌 그를 보며, 

명절마다 매번 한 포인트로 며느리를 서운하고 화나게 만드는 그를 보며,

우리 가족은 

“할머니 진짜 너무하지 않냐? 나쁜 뜻을 가진 것은 아니야. 

알지. 남을 생각 못해서 그렇지. 몰라서 그렇지.”하고 

상처받은 이를 다독인다. 

언제나 하수에게 퉁실퉁실 복스러워 딱 맏며느리 감이었던 나와 동생, 

까맣고 마른 아빠, 키가 작은 엄마, 

개 혓바닥 같이 축 늘어진 젖을 가진 그.

그런 것들이 쌓여갔다.

그 결과 우리는 이제 꼭 말 한마디에 1타 3피를 날리는 그의 역량을 지켜보며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아마 하수의 MBTI는 IST-가 아닐까)     


몇 년 전 한하수와 처음 대화를 나누었다. 

이 대화는 양순과 나누던 대화와 같은 재질이었다.

자식들에게는 하지 못했던 말을 내게 해주는 하수가 좋았다.

딸이 둘이면서 꼭 나 같은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지나가는 말을 하는 하수가 좋았다.

50대, 완주군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한 한하수는 

촌스럽게 커피 한 잔을 못 마셔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다정한 곳이라고는 한구석도 없으며 늘 한하수를 무시했지만, 

그 시절 때리지 않고 자식들 모두를 대학까지 보내고 

서울에 집까지 마련한 할아버지에게 

미움이나 사랑보다는 고마움이 큰 사람이고(심지어 한하수는 그 무시를 당연히 여길 때도 있다),

할아버지 덕에 일 한번 하지 않고 편하게 살았다고는 하지만 

그래서 어쩐지 세상으로부터 멀어져 

아무것도 한 게 없게 된 쓸쓸한 사람이고,

긴긴 세월 취미가 없어 불행하다는 사람이고,

부유한 집의 막내딸로 살며 많은 선 자리를 거절하다가 

어쩐지 할아버지(외모가 아닐까)가 끌려 결혼하게 된 사람이었고

(그에게 결혼을 안 한다는 선택지는 없으니),

정작 본인의 결혼 전 이야기를 해줄 때만 웃지만

내 결혼을 바라는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결혼의 장점을 물으면 

혼자 벌어먹고살 수 있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다시 정정해 주는 사람이기도 하다.

하수와 같이 웃고 울었던 날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날 이후 한하수를 좋아하기로, 다시 보기로 다짐했다.   


얼마 전 오랜만에 이전과 같은 딥토크를 기대하며 그를 찾았다. 

보지 못한 사이 좋아진 얼굴과 달리 

그의 마음은 지쳐있는 상태였다.

하수는 계속 똑같은 이야기를 처음 하는 것처럼 했고 

나 역시 처음 듣는 것처럼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반복에 혹 한하수가 맺힌 게 있을까 생각하면서. 

그는 전보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했고 

그의 남편과 시어머니를 옹호하며 자신의 삶을 부정하지 않으려 애썼다.

결혼관도 조금 바뀌었다.

하수는 애를 낳지 않은 우리 세대의 문제점을 꼬집으며 

우리나라의 미래를 격하게 걱정하기 시작했다.      

하수에 대한 내 마음과 관심은 전보다 커졌지만  

여전히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인지 아닌지, 

애정인지 호기심인지, 

확신을 가지고 답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집에 갔을 때 과일과 티비를 권하다가도, 

바쁘니 어서 가라고 서둘러 끝인사를 하던 옛날 옛적 한하수 보다,

3시간이 넘게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어 지친 내가 겨우 간다는 말을 꺼내니, 

지금 간다니 서운하다고 말하는 지금의 한하수가 좋음은 분명하다.

양순과 다르게 내가 건네는 적은 돈을 한 번에 받는 한하수가 좋음은 분명하다.

(“돈도 없으면서.”라는 말을 잊지 않고)

넘어질까 무서워서 집 밖을 나가지 못하고 있지만 

대신 집에서는 꽃무늬 조끼, 꽃무늬 바지, 형형색색의 스카프를 두르고

앉아있는 한하수는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많이 다르고 어색한 하수와 내가, 

많이 다르지만 꽃무늬를 좋아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우리가,

봄이 되면 누구보다 화사하고 사랑스러운 꽃무늬 옷을 입고 

꽃을 보러 같이 공원에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좋지 않을까, 

그럼 한하수가 아무리 간절히 바란다 해도 쉽게 얻어지지 않을 

'죽을 복'에 덜 매달리지 않을까 하고, 

자꾸 그런 꿈을 꾸게 된다.      


권양순과 한하수를 찾을 때면 

매번 그들은 내게 서로의 소식을 묻다 서로의 삶을 부러워한다.

그럼 난 누구를 위해 말해야 할지 몰라 고민한다. 

어떨 때는 듣는 이를 생각하지 못하고 

신이 나서 서로가 부러워하는 점을 강조하여 말하다,

아차 싶어 각각의 손을 감싸고 쓸어 본다. 

그럼 그들은 똑같이 자신의 이전 같지 않은 손을 부끄럽게 여긴다.

“아이고 우리 할머니 고생 많았네.”하고 넌지시 마음을 건넨다.

‘난 당신의 삶이 좋다고, 대단하다고, 고생한 거 맞다고.’

나는 권양순과 한하수의 어떤 부분이 되어갈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의 삶을 적극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

되고 싶지 않은 삶이라고 함부로 말할 수도 없다.

그네들을 보며 마지막으로 그들의 죽을 복을 빌 수밖에 없다. 

권양순과 한하수는 내가 이런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면 어떨까.

둘 다 내가 돈을 잘 벌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둘을 호강시키지 못할 것이고 

그토록 바라는 죽을 복을 선물할 수는 더욱이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그들이 원하는 만큼 자주 방문하지도 못할 것이다.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권양순은 아무것도 없다고,

한하수는 네가 해줄 수 있는 건 없다고 말할 것 같다.

그러나 무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나는 멋대로 

남은 날은, 그리고 그들이 없을 날에, 

양순과 하수를 내 할머니,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양순과 하수로 대하겠다고, 기억해야겠다고, 

그래야겠다고 다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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