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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권목 Oct 01. 2022

누구의 무엇도 아닌, _양순

에세이_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엄마는 내가 어릴 적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민정이 할머니는 어디 있어?”     


그러니까

“성수동 할머니는 대현이(고모 아들) 할머니고, 

전주 할머니는 수리(사촌 언니) 할머니인데,

그럼 민정이 할머니는 어디 있어?”     


아이들은 뜨끔할 정도로 예리하다.

당시 성수동 할머니(친할머니)는 고모 아들, 

전주 할머니(외할머니)는 사촌 언니의 양육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었으므로 

‘민정이’ 할머니라 부를 할머니는 없었다.

엄마는 애도 알 건 다 안다고, 

어린 자식의 결핍을 안쓰러워했다.

그렇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테지만.

이런 이유로 다짜고짜 친할머니에게 

“대현이 할머니, 안녕하세요?”라고 넙죽 인사를 해 

얘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할머니를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한다.

엄마는 이 천진난만한 멕임이 웃기면서도 

자신이 주입한 것도 아닌데 괜히 눈치가 보였다고 한다.     


다행히도 이 에피소드를 전해 듣기 전, 

할머니라는 공백을 느끼지 못했다.

전해 들은 순간 ‘나 사랑받지 못했나.’하고 

별안간 쓸쓸해져 자기 연민에 빠져 볼까도 했지만.

나에겐 유년을 아주 꽉 채워준, 

당시 전업주부의 엄마가 있었기에 

할머니가 필요하지 않았다.

물론 엄마에게는 할머니가 필요하긴 했겠다.     


‘만나면 잠시 안아주는 존재.’     

어렸을 때부터 낯가림이 심하고 집을 좋아했던 나는 

친가나 외가에 가는 것을 그리 반가워하지 않았다.

그래도 가장 낯이 익어, 의지가 되었던 

할머니들은 만나면 반갑다고 떠나면 아쉽다고 

당연하게 나를 꼭 안아주었다.

(물론 나뿐만 아니라 다른 손주들에게도 그러셨지만) 

괜히 돌아보고 비교하면 끝도 없겠지만 

사실 할머니의 향이 가득한 품 안에 

다소 억세게 안겨 있는 것으로 충분했다. 

내 할머니들은 명절을 보내고 온 

다른 친구들이 하소연하는 것처럼 

손자와 손녀를 크게 차별하는 할머니도, 

엄마나 아빠를 쥐 잡아먹을 듯 괴롭히는 할머니도, 

나와 동생을 미워하는 할머니도 아니었다. 

한 세대를 건너 더욱 너그러운 사랑을 

받을 만큼 받았으나 깜찍한 에피소드 하나로 

‘그들의 덕이 없다, 그들에게 진 빚이 없다.’ 해서 

그들을 지웠었다.

그렇게 흐릿해질 뻔하다 

필연인가 싶게 터진 우리의 입. 

이내 또렷해지기 시작한 

나의 할머니들, 양순과 하수.     


▶권양순, 전주 할머니, 외할머니     

권양순은 전라북도 정읍에서 나고 자랐지만 

말이 느린 탓에 늘 충청도 사람으로 오해를 받는다.

말이 느린 데다 순하고 인정이 많아 보이는 양순은 

어떨 때는 정말 수줍은 소녀 같지만 

결코 만만한 사람은 아니다.

양순은 종종 

“창자를 빼서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년.”이라고 

나지막이 읊조리거나 

놀라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무시무시한 악을 뿜어낼 수도 있었다.

물론 이 표현을 일곱 살의 손녀가 해맑게 따라 해 

자신이 그렇게 무서운 말을 썼다는 것을 

처음 알고는 놀라, 

이후 말을 가리는 귀여움과 배려심을 지닌 

사람이기도 했다.

(양순의 MBTI는 나와 같은 INFJ가 아닐까?)     


안검하수가 있는 양순의 작은 눈은 

웃으면 더욱 빛이 난다.

나는 늘 웃으면 웃는 모양으로 사라지는 

양순의 작은 눈을 보고 ‘할머니’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곤 했다.

양순의 눈가 주름은 그것과 참 잘 어우러져 

그 모습이 자꾸자꾸 보고 싶었다.

그 눈이 입과 함께 웃어야 안심이 되어 따라 웃었다.

그럼 양순은 나와 더 오래 웃었다.

하지만 양순에게는 맘 편히 웃는 날이 많지 않았다. 

유복한 집안에서 곱게 자랐지만 

가난한 집안의 장남에게 보내져 지독해져야만 했다.

(이제와 양순은 "그냥 침을 퉤하고 뱉어주고 나오면 되는데 바보같이.."라고 말했다.)

장남을 사랑하지 않는 지독한 시어머니와 

장남의 뒷바라지로 자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양순에게 못된 일곱 명의 시동생들을 만나,

안 해본 장사 없이 일하고 밥을 하고 

사 남매를 키워 모두 결혼까지 시켰으나

그녀가 가장 사랑한 아들 둘은 기대만큼 잘 살아주지 못했고 

둘째 아들은 일찍이도 세상을 떠났다.

그 상실감 때문일까? 

가끔 그녀는 살아있는 딸 둘 앞에서 남들에게 

“난 자식 다 죽고 아들 하나 남았어요.”라고 무심히  말해 

딸들은 물론 딸의 딸들까지 서운하게 만든다.

하지만 서운한 건 잠시, 그런 양순을 사랑하기를 멈출 수 없다.


양순이 가장 부유하고 재밌었을 때는 

닭을 팔았을 때이다.

'생닭, 튀긴 닭, 그리고 담배'

양순과 그녀의 남편 형운이 파는 닭은 

질이 좋고 맛있기로 유명했다.

그렇게 양순과 형운은 집을 넓히고, 

대학에 가고 사업을 하고 결혼을 한다는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노후 자금을 쌓아갔다.

새벽부터 깜깜해질 때까지 양순은 

커다란 통나무 도마에 생닭을 엎어 놓고

도끼 같은 쇠칼을 들고 내리쳐, 

차례차례 그것을 토막 내었다. 

그리고는 가마솥에서 펄펄 끓는 기름에 

형운이 만든 튀김 반죽을 입혀 그것을 넣었다, 

탕탕 소리 나게 건져 식히고는 하얀 전지에 

그다음 은색 포일에 그것을 감싸아 팔았다.

그럼 KFC나 서울 통닭집에서는 절대 맡을 수 없는 

고소한 치킨 향이 퍼졌다.

하얀 전지에 싸인 치킨은 형운의 자전거에 실려 

혹은 낯선 이의 손에 들려 금방 사라지곤 했다.

하지만 그것을 가장 맛있게 먹은 것은 

양순의 손주들 일 것이다.

우리는 전주에 오자마자 혹은 떠나는 순간 

늘 막 튀겨 따끈따끈한 다리를 손에 들고 있었다.

나와 사촌은 겨울에는 가겟방 아랫목에서 밍크 담요를 두르고, 

보통은 펄펄 끓는 기름과 노오란 햇빛의 열기로 

더욱 노오란 장판 위에 나란히 앉아 조잘거리며, 

양순이 닭을 토막 내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럼 양순은 우리 이야기에 맞장구 쳐주고는 

자주 뒤를 돌아 활짝 웃었다.

양순이 웃어주면 창백한 생닭도, 수챗구멍에 걸린 닭 찌꺼기도, 

아무리 물을 찌끄려도 변함없는 도마와 

빨아도 소용없을 것 같은 양순의 오래된 앞치마도 무섭지 않았다.

양순은 끊임없이 일을 하면서도 

옆집 창고를 빌려 우리와 숨바꼭질을 했고

검은 봉다리 가득 과자와 초콜릿을 사주었고

다리를 짚어가며 “한놈 두시기 석삼 너구리”하며 

긴장감 넘치게 다리 빼기 놀이를 해주었다.

또 종종 우리는 

양순이 절인 치킨 무와 소금을 

포장하는 것에 정말 작은 손을 보태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양순과의 즐거운 소꿉놀이이었지만

그녀의 딸들에게는 여전히 치킨 무를 쳐다도 보기 싫은 

징글징글함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딸들과 딸들의 딸들은 종종 모여 말한다.

“그때 먹은 치킨이 제일이었는데. 아직도 그렇게 맛있는 치킨은 없는데.”

     

양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주 많다.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사로잡을 수 있는 타고난 이야기꾼으로

양순이 해주는 모든 이야기는 그냥 재미있다.

딸들과 딸들은 양순이 해준 이야기를 여전히 깔깔거리며, 

가끔은 숨이 넘어가게, 

"엄마는(할머니는) 진짜 웃기지 않아?!" 외치곤 한다.

더불어 미운 사람의 기분과 마음까지 헤아릴 수 있는 

사람에 대한 통찰력과 이해력, 너그러움,

그에 걸맞은 넉넉한 마음과 손까지.

(가끔은 양순이 아주 독해져 사람을 아주 미워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양순이 타고난 것들 일 수도 있지만 

온갖 사람을 상대해야 했던 험한 팔자로 절로 키워진 

역량일 가능성이 더 높다.

양순의 단골 미용실 사장님은 이런 양순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우리 엄마’로 저장하였다.

(본인의 친모는 그냥 ‘엄마’로 저장해놓고는.)

나의 험난한 수험 생활을 지켜본 양순은 

내가 속상할 때 “저런,”이라고 다정하게 말을 꺼내고 

“귀한 사람.”이라고 말을 끝냈다.

양순은 그런 식으로 

나의 악몽을 좋은 꿈으로 바꿔주었다.

그럼 난 양순이 고맙다가도 

실은 내가 양순의 자식을 속상하게 하는 원흉이어서, 

속으로 양순이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닐까 걱정하며 미안하다고 울면, 

양순은 “아가, 그런 생각은 하지 말어.”라고 나를 토닥거렸다. 

그럼 난 안심하고 양순의 따스함을 맘껏 음미했다.


아들을 잃고 정신없이 아들이 없는 서울로 온 양순은 

가끔 남아있는 자식들에게는 하지 못하는 말들을 

나에게 쏟아 내었다.

여기서 내가 몇 살이건 중요하지 않다.

장손도, 친손녀도 아닌 나는 

양순과 대화할 수 있는 그 특별한 시간이 그냥 좋았다.

그 속에는 양순이 좋아하는 것, 미워하는 것, 

잊을 수 없는 것들이 고루 들어있었다.

“애한테 별소리를 다 한다. 엄마한테는 얘기하지 마라.”라고 하면서도 

가끔 내가 좋아하는 포장마차 떡볶이를 사 와, 

잡채를 한 솥 무쳐, 보들보들한 두부를 잔뜩 넣은 빨간 김치찌개를 끓여, 

제철 게를 삶고 발라, 식구들 중 유난히 차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유자청을 준비하고는 나를 불렀다.

짜고 매운 것을 좋아했던 우리는 

양순의 딸의 싱거운 음식 흉을 보며 어쩜 입맛도 같냐고, 

역시 김 씨 말고 권 씨가 양반들이라고 맞장구를 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렇게 양순과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엄마도, 이모도, 사촌 언니도,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큰아들과 장손도 없는 둘만의 시간이었다.

그만큼 특별했던 기억들이 남아 

지금의 양순을 보기 어렵게 만든다.

그렇게 좋아하던 이미자 콘서트를 본 다음 날, 

양순은 뇌출혈 수술을 하고 첫 번째 입원을 했다.

양순은 스스로 대소변을 가리기 어려워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같은 병실 사람들을 보며 

저러다 병원에서만 죽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렇게 좋아하던 믹스 커피를 끊었다.

하지만 보람 없이 양순의 병원 신세는 계속되는 중이다. 

고관절 부상, 인공 관절 수술, 구강암, 항암... 이어지는 사고와 병에 

양순은 이제 병원이 더 편해 보인다.

양순의 말에는 이제 아픈 것, 힘든 것,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이 반복된다.

양순은 더 이상 먹고 싶은 것도 먹을 수 있는 것도 없다.

양순의 이야기를 더 들어야 한다는 것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과 같지 않은 양순을,

한껏 어두워진 거실과 무거운 공기를, 

마주하러 가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     


어떤 날 양순에게 은근히 

고모 아들을 편애하는 친할머니 흉을 보았다. 

양순은 바로 “외손주는 손주도 아니여.”라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

어쩜 바로 나오는 그 말에 

“나도 할머니 외손주인데?!”라고 서운하게 되물으면,

“우리는 그거랑은 다르지!!”라고 

화들짝 놀라며 웃는 양순은 

속을 알 수 없어 

정말 웃기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글을 쓰며 전과 같지 않을 양순이 너무 보고 싶어졌다.

전복죽을 사 들고 가 

깜깜한 거실의 불을 킨 다음 

꼭 양순과 반씩 나눠 먹으며 

양순의 이야기를 마저 들어야지 다짐했다. 

이제는 힘이 없어져 하얗고 말랑말랑해진 

양순의 손을 꼭 잡고 쓸며.

양순은 나를 보자마자, 

가찹게 살면서 어떻게 그렇게 안 올 수 있냐고 

서운함을 내비쳤다.

그러게... 나는 미안하면도 

이제 싫은 소리도 하는 양순이 

낯설면서도 더 좋아졌다.

트러플 전복죽을 반씩 먹으며,

양순은 여느 때와 같이 (내가 사 와서) 

넘기지도 않은 죽이 맛있다고 했고,

나의 건강과 미래를 빌며 복돈을 주었다.

복돈을 받기 민망한 나이라, 

이러면 다시 오지 않겠다고 협박을 했으나 

여느 때와 같이 양순이 이겼다.

나는 복돈을 받은 대가로, 

그녀의 맏아들과 그녀의 복을 빌겠노라 약속을 했고 

나를 안을 힘이 없는 양순을 일으켜 꼭 안았다.

다음엔 버섯 크림 리조또를 사 와 양순과 먹고 이야기를 이어가야겠다고. 

그때까지 양순은 갑자기 떠나지 않기로 약속하였다.

양순은 늘 무엇을 해줄 수 있어 기쁜 사람이라고 하니

약속을 지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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