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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권목 Jul 16. 2023

홍반

에세이

순간순간 열감이 훅 올라오는 초여름인데, 

빼도 박도 못할 초여름인데,

여전히 겨울을 씹고 있다.     



겨울에서 이번 봄까지가 유독 길었다.

길어진 해에 꽃은 금방 피었는데, 

몸은 아무래도 꽃만 피면 다냐고, 

더 웅크린 채 그 자리만을 팠다.

방에서는 오래도록 전기장판을 정리하지 못해 틈만 나면 몸을 지졌고, 

밖에서는 남들보다 꼭 하나씩 더 걸치고는 마지못해 피어 버린 꽃을 보았다.

이르긴 하나 모두 설레버린 듯했다.

아마 퇴근길이겠지.

뒷모습이 유독 고되어 보이던 한 중년의 남성이 가던 길을 멈추어 섰다. 

자목련 꽃봉오리를 한참 올려다보더니 폰을 꺼냈다.

해가 짧아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도 

꽃봉오리는 또렷했다. 

사실 사람들이 공통으로 관대할 수 있는 구석이 별로 없기에 

우린 꽃이 피면 약속이나 한 듯 쉽게 설레는 것 같다.

우리가 같아지길 오래도록 기다린 것처럼.

중년의 남성에 끄덕이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이때만큼은 그와 내가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그의 뒤에서 조용히 폰을 꺼내 같은 것을 담았다.

사진이 실제를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설렘에 져 이리저리 움직이려 했다.



올봄에는 더욱이 이 설렘을 감당하지 못해 해만 뜨면 꽃을 보러 나갔다.

아니, 꽃을 보기 위할 때만 움직였다.

다만 활짝 핀 꽃을 보고 있어도 이상하게 몸은 으슬으슬했다.     

미세먼지가 최악이라 해가 하얀 날, 

오늘은 추울 리 없다고 생각했다.

이 시간이 가버리기 전에 서둘러 트렌치를 꺼내기로 했다.

노오란 베이지색을 기대하고 샀지만 

실은 연한 베이지색의 코트를.

그래도 올해 첫 트렌치라는 사실에 설레버려 

선물 받았지만 내 돈 주고는 사지 않을 가격이라 아꼈던 

바디워시와 로션을 꺼내 이불속에 절은 몸을 깨끗이 씻고 닦아 나갈 준비를 했다.

오늘도 이렇게 설렘에 진 것이다.

미세먼지가 최악이라지만, 

씻은 몸이 이상하게 간지럽기 시작하지만, 

그냥 봄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하지만 질세라 몸은 계속 근질거렸다.

설렘에 동조하는 이는 나뿐이었다.

밖은 여전히 추웠다.

돌아갈까 하다 그럼에도 강행하고 싶어 져 덜덜 떨며 가기로 한 길을 갔다.

북쪽으로 향하는 창밖은 정직했다. 

확실히 봄이 아니었다.

확실히 꽃을 보기는 그른 날이었다.

설레기보다는 아프고 피곤한 날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온몸을 벅벅 긁기 시작했다.

오돌토돌, 아는 촉감이었다.

꽃이 아니라 계절성 알레르기가 정말 봄이 오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러니 너도 어서 있던 곳을 나와, 만물이 꿈틀거리는 봄처럼 움직일 준비를 하라고!’



오늘은 피부과 문이 열지 않아 참았다. 손만 움직여 긁었던 곳을 또 긁기만 했다.

다음 날 환자가 적을 시간에 맞추어 병원에 갔다. 

평소 알레르기가 심한 사람은 원래 환절기에 이렇게 올라온다는, 

늘 같았던, 진단을 받았다.

질병코드를 확인해 보니 접촉성 알레르기라고 떴다.

그런데 원래 주사 한 방과 약 처방으로 쉽게 나아지던 증상이 도통 가라앉지 않는다.

단골 병원만 맹신하고 왔는데 말이다.

목, 가슴, 배, 허리,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 발목, 팔까지 낯선 홍반이 올라온다.

하나하나 점점 빨갛게 부풀어 오른다.

살기 싫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다 겨울부터 지금까지의 잘못을 곱씹었다.


‘건강하게 먹지 않았지, 늘 누워있었지, 생각이 많았지.’


개운하지 않은 겨울잠이 봄까지 이어졌다.

꼭 아파야지 성찰이라는 걸 해,

이번 봄은 지난겨울을 통째로 반성하는데 보내버렸다.

다만 아직 연두색 이파리와 매년 이름을 찾게 만드는 꽃들이 눈에 담긴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언제 밀려올지 모르는 이 설렘을 멈춰버릴 수는 없으니까.

다시 병원을 찾았고 매사 단호하고 철저해 말이 없던 의사 선생님은 답지 않게 

아주 아프다고 겁을 준 후 큰 홍반마다 주사를 놓았다.

주사를 놓을 때마다 선생님은 내 정신을 흩트려 놓으려는 듯 자꾸 말을 시켰다.


"이번 봄까지 고생할 수도 있겠어요."

 

전기장판을 치우라고 하셔 치우고 

꽃맞이를 내려놓고는 헐레벌떡 진짜 봄맞이를 시작했다.

이후에도 다시 팔다리가 근질근질해 벅벅 긁고 싶은 날이 있었고, 

그런 날이면 찬물로 샤워를 하고, 처방받은 연고를 바르고, 

가려움을 흩트려 놓으려고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그러다 겨울과 봄을 잊었다. 초여름이 되었다.

배에는 아직 희미한 흉이 있다. 

빨갛다 파랗다 회갈색이 되어버린.

원래는 5월부터 여름의 더위와 습함을 겁내고는 했는데 

이번 여름은 보다 늦게 찾아온 것 같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보다 한 꺼풀 더 길게, 무겁게 갖추어 입고 다녔다.

그러니 몸이 다시 가려워지기 시작했다.

회갈색 자국이 다시 울긋불긋, 이제 여름이라고 한다.

가벼운 달리기를 하고 있는 나날이라 건강하다고 생각했는데, 

홍반 없이도 여름임을 알고, 여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겨울과 봄, 그리고 어제 같은 날들을 통째로 곱씹어본다.

곱씹으며 배를 벅벅 긁다 너무 센 것 같아 ‘아차!’ 한다.


'수영장, 토마토, 수박, 가지, 어디서든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 양양 하조대, 초록이 무성한 숲, 그 숲의 그늘, 매미 소리, 부비프의 오미자차, 선풍기 소리, 소나기를 피해 가는 자리...'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곱씹기를 그만하기로 한다.

여름도 설렘에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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