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Perplexity에 재미를 붙여서 궁금한 게 생기면 무조건 거기다가 물어봅니다. 직장인에게 적합한 부업을 추천해 달라고 하니 옵션 중 하나로 프리랜스 번역을 제시하더군요(여기서 살짝 기분 상함). 하지만 저도 그런 식으로 경력을 쌓았고, 또한 영어 실력과 컴퓨터만 있으면 할 수 있으니 진입 장벽이 낮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일에 '진입이 쉬운' 것과 그 일을 '잘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번역을 잘하려면 원문 구조와 목적을 빠르게 살필 줄 아는 분석력, 적절한 어감의 번역문을 선택하는 세밀함이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를 갖추지 못하면 요행히 샘플 테스트를 통과해도 실전에서 무너질 뿐입니다. 이러한 분을 채용하면 번역사 본인도 불행하고, 인사담당자나 PM도 해결할 이슈가 생기는 것이라서 골치가 아픕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원자의 분석력과 세밀함을 판단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이력서를 활용합니다. 이력서만 봐도 어떤 사람인지 예상할 수 있고, 면접 자리에서 얘기를 나눠 봐도 그 예상은 거의 벗어나지 않거든요. 그러니 이력서를 작성할 때는 읽는 이의 입장을 많이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지원을 결정할 때는 약간의 담대함이 필요하지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경력부터 쓰시면 좋겠습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지만, 저는 지원자의 학력에 별로 관심이 없거든요.
이전 글에서 말씀드렸듯이 회사는 즉시 전력감을 원합니다. 충분한 실력을 갖춘 사람도 실무에 적응하려면 몇 개월이 걸리니 조건이 같다면 경험이 풍부한 사람을 선택하겠죠. 따라서 경력을 먼저 보여주어 '나 이만큼 일 경험이 많다'라고 어필하시라는 겁니다.
자유 양식 대신에 구직 사이트 양식을 사용할 때는 예외가 생길 수 있습니다. 사용하시는 구직 사이트가 이력서 항목 순서 변경을 지원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지원한다면 경력을 학력보다 위로 올려 보세요.
경력 외에 다른 강점이 있다면 그것부터 먼저 기술하여 돋보이게 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본 어떤 지원자는 해외 경험을 이력서 최상단에 적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자신감인가 싶었는데, 샘플 테스트와 면접을 거쳐 보니 근거 있는 자신감이었습니다. 번역도 깔끔했고, 면접 답변에도 흠잡을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조건이 안 맞아서 아쉽게 놓친 인재지만, 아무튼 이렇게 특별한 셀링 포인트가 있다면 꼭 경력을 먼저 보여줄 필요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경력이 없어서 학력밖에 셀링 포인트가 없다면 학력을 위로 올려야 하겠지요. 하지만 아무 고민 없이 다른 양식을 따라서 학력부터 올리고 보는 것은 별로 권장하고 싶지 않습니다.
대개 지원자들은 아래의 예시처럼 본인이 한 일의 종류를 나열합니다.
영<> 한 전시회 마케팅 자료 번역
한 <> 영 XX의 날 연설문 작성
그런데 이렇게만 쓰면 채용담당자는 평가하기가 막막합니다. 일단 다른 회사의 일이기 때문에 아무리 읽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냥 이런 일을 했구나~ 정도의 막연함만 있지, 지원자의 실제 경험량(또는 업무 기여량)을 알기는 힘듭니다.
저는 프리랜서로 일할 때 하루에 5,000 단어 정도를 번역했습니다. 회사원으로 일하는 지금은 약 2,000 단어를 번역하고요. 5,000 단어를 기준으로 삼을 때 1주일(주 5일)이면 25,000 단어, 1년(52주)이면 130만 단어입니다. 하지만 프리랜스 번역 일이라는 게 매일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여 연간 작업량이 몇십만 단어인 사람은 그럭저럭 경험이 많다고 판단하고, 몇 만 단어인 사람은 일이 적었다고 추측합니다. 일반적인 문서 몇 개만 번역해도 10,000 단어는 훌쩍 넘기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단어 수/글자 수로 작업량을 정량화하여 제시하면 채용담당자는 그 수치가 신빙성 있는지 검증하면 됩니다. 채용담당자의 일을 하나 줄여 주는 셈이지요. 지원자도 다른 질문을 추가로 받을 수 있으니 제한된 면접 시간을 알뜰살뜰히 쓰게 되어 좋은 셈입니다.
단어 수/글자 수로 작업량을 제시하지 않으면 경우에 따라서 추가 검증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쪽수로 작업량을 표현하면 자간, 행간, 글꼴 크기에 따라 실제 작업량이 달라지기 때문에 별로 추천하지 않습니다.
어느 공공기관의 백서 번역에 기여했다는 지원자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공신력 있고 멋있게 들리죠. 그런데 실제 작업량을 물어보니 사실은 다섯 페이지도 되지 않았습니다. 전문성을 크게 쌓은 경험이라고 보기는 힘들죠. 그런데 그 백서가 글꼴이 깨알 같고 여백도 좁았다면? 지원자 입장에서는 약간 억울할 수도 있죠. 반면 글꼴도 크고 여백과 삽화가 많았다면? 당연히 실제 작업량을 더더욱 적었겠죠. 그러니 이런 억울한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본인의 작업량을 정량화하고, 그걸 이력서에 녹이고, 면접 질문에도 대비해야 본인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해외 경험을 강조하면서 본인의 완벽한 언어 실력을 어필한 지원자가 있었습니다.
경력란에는 10년 가까이 통역 일을 했다고 적혀 있었죠. 하지만 꼬리 질문을 계속 던지며 파고들어 가니 실제 통역 건수는 10회가 채 되지 않았습니다. 모두 일회성 업무였으니 작업 일수도 길지 않았죠. 며칠 일한 것을 10년 차 통역사의 경력으로 부풀려 놓으니 당연히 좋게 평가할 수 없었습니다.
공공기관의 영문 에디터 채용 공고를 보시면 "재직 기간과 겹치는 프리랜서/개인 사업자 기간은 경력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식의 문구가 가끔 보입니다. 회사에 재직하면서 프리랜서 일도 꾸준히 그리고 많이 했을 리가 없으니 프리랜서로 이름만 걸어 놓은 기간까지 경력으로 쳐서 지원서에 작성하지 말라는 얘기 아닐까요? (그런 식이면 저는 벌써 10년 차입니다) 따라서 진짜 경력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만 모아서 작성하시면 좋겠습니다.
"최고"라는 말처럼 모골이 송연하게 하는 표현이 또 없습니다.
"최고의 품질로 보답하겠다"라는 사람한테 배신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거든요. '최고'를 말하는 사람은 많아도, 그걸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은 정말 찾기 힘듭니다. 오히려 사사건건 '왜요?'라고 의문을 제기했던 제 동료가 지금은 제일 신뢰할 만한 번역사로 자리 잡았습니다.
번역에 '최고'라는 개념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빼어난 번역문도 검증하는 사람의 눈에 차지 않으면 그저 수정이 필요한 일일 뿐입니다. 실력이 부족한 번역사도 쓴소리할 사람이 주변에 없다면 자기 실력이 최고인 줄 알겠죠. 그러니 가장 좋은 태도는 내 실력이 최고가 아니라는 의구심을 갖고, 항상 내 결과물이 맞는지 검증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잘했다, 누구보다도, 굉장히, 최고의, 절대 실망시키지 않는 등의 미사여구를 이력서에 남발하지 마시고, 셀링 포인트와 정량화된 결과만 제시하시면 좋겠습니다.
이력서에 사진은 가능하면 넣으시라고 권장합니다.
사진은 면접관에게 선입견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공정함을 위해 사진 제출을 배제하는 블라인드 채용도 있죠. 통번역대학원이나 해외 대학의 취업 센터에서도 (영문) 이력서에 사진을 넣지 말라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이 글의 독자분들은 대개 한국에서 일자리를 찾으실 것이므로 사진을 넣으십사 권하고 싶습니다. 지원하는 회사의 채용담당자가 사진이 없다고 박하게 평가할지는 담당자 자신만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고지식하게 학교에서 배운 대로 사진을 첨부하지 않아서 혹시 있을 손해를 볼 필요가 있을까요? 물론 저도 외국 회사나 블라인드 채용에 지원할 때는 사진을 첨부하지 않습니다.
가끔 보면 경력란에 그간 거래했던 고객사 이름을 기재하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이 부분은 본인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채용담당자 입장에서는 알 만한 회사와 거래한 지원자에게 더 눈이 갑니다. 아는 PM이라도 있으면 평판 조회를 요청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이 부분은 제가 모르는 추측의 영역입니다. 고객사 이름으로 이력서를 돋보이게 하고 싶다면 이 방안도 고려할 만합니다.
하지만 지원자 입장에서는 어렵게 획득한 거래처 정보를 아직 거래도 트지 않은 남에게 공개할 이유가 없습니다. 저도 이런 이유로 고객 목록을 요구하는 회사에는 아예 지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잘 선택하여 결정하시기를 바랍니다.
지원자 검증 때문에 이 부분이 필요할 수도 있으나, 굳이 무리해서 적을 필요는 있나 싶습니다.
이 부분은 위에서 언급한 작업 정량화와 연관이 있습니다. 모 번역 에이전시에서 몇 년간 일했다고 기간만 기재하는 것보다는 번역 작품을 나열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 있게 보입니다.
하지만 애초에 번역 에이전시(기존 고객사)가 비밀 유지를 강력하게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번역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번역 작업이 완료된 이후에 이력서에도 적지 말라고 공지를 '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번역: XXX"라는 문구 한 줄 때문에 번역하는 경우도 왕왕 있는데, 그렇게까지 규제해야 하나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공지를 했는데 굳이 이력서에 작업명을 적어야 하나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작업명을 직접 쓰지 않고, 수행한 작업의 성격을 풀어서 쓰는 편입니다. 공간이 부족한 경력란에는 적지 않고요, 경력기술서를 별도 페이지에 할애하여 아래와 같이 적는 겁니다.
유명 코믹스 원작 블록버스터의 속편 (90분, 영한)
번역 에이전시의 채용담당자들이 위와 같은 서술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일면식도 없는 그들에게 비밀 유지 서약을 어겨 가면서 업무 관련 정보를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