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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소서 이렇게 쓰지 마세요 (1): 지원동기

자기중심적인 지원 동기 피하기

by 이태리

지난 글에서는 이력서를 광고에 비유했습니다. 채용담당자가 이력서를 내려서 자기소개 항목을 확인했거나 첨부된 자기소개서를 열람했다면, 축하합니다! 여러분의 광고는 반쯤 성공한 것입니다. 광고로 고객을 유인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나'를 왜 선택해야 하는지 설득할 포인트입니다. 그 역할을 하는 제안서가 바로 자기소개서입니다.


제발 자소서 좀 쓰세요


제가 지금까지 본 번역사분들은 자소서에 크게 공들여 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분들도 삼성전자, 현대자동차에 지원할 때는 공을 들이겠습니다만, 뭐 아무튼 제가 재직한 회사가 삼성, 현대는 아니니까요. 이해가 가긴 합니다. 번역 일은 구구절절한 말보다 실전이 더 중요하니까요. 서류 몇 장보다는 테스트 한 번이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자소서를 쓰시라고 권하고 싶은 이유는 바로 그 테스트 과정까지 도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소서가 없으면 채용담당자는 평가할 수단이 없습니다. 번역도 결국 사람과 하는 일인데, 이력서만 있으면 지원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 채 줄줄이 나열된 경력사항만 보고 유추해야 합니다.


회사 일은 (직무마다 다르겠습니다만) 그렇게 특출난 능력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람 능력은 어차피 다 고만고만하고, 시쳇말로 '빌런'을 안 만나는 것이 최대의 복지이고 효율입니다. 중요한 내용을 자기만 알고 있는다든가, 자기애가 너무 강해서 조금만 피드백을 받아도 길길이 날뛴다든가 하는 사람을 피하고 싶어서 자기소개서를 읽는 것이고 면접을 보는 것입니다.


번역사 분들은 대개 배운 사람들이고, 성격이 조용조용하며, 자기만의 인간적인 매력을 하나쯤 갖췄을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귀찮다는 이유로 자소서를 작성하지 않아서 '빌런' 후보들과 함께 필터링되면 좀 속상한 일 아닐까요? 그러니 자기 매력을 드러낼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지 말고 자소서를, 쫌!, 작성해서 내가 '빌런'이 아니라는 힌트를 채용담당자에게 주면 좋겠습니다.


자소서 이렇게 쓰지 마세요


오늘은 소제목을 좀 자극적으로 썼는데요, 좋은 자소서와 나쁜 자소서의 기준은 채용담당자마다 다를 것 같아요. 그러니 제가 제안해 드리는 내용은 참고만 하시기 바랍니다.


자소서에 신경 쓰는 번역사도 많지 않지만, 자소서를 제출하는 소수의 그룹에서도 읽는 이가 원하는 정보를 정확히 제공하는 케이스는 드뭅니다. 이왕 작성할 자소서, 피해야 할 점부터 먼저 소개할 건데요, 오늘 글에서는 지원동기만 다뤄 보겠습니다.


지원동기 자기중심적으로 쓰지 마세요

면접 파트에서도 다룰 내용이지만, 지원동기는 채용 과정에서 지원자와 채용담당자에게 참 중요한 화두입니다. 한편으로는 지원동기 때문에 많은 지원자가 좌절을 느끼고 세상에 대한 울분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내가 돈 벌려고 지원했지, 뭣 때문에 지원했겠음?"

"지원동기 물어보면 한 대 치고 싶음"

"회사에서 배우고 성장하겠다고 하면 왜 안 됨?"

"회사가 신입을 키워야지, 너무 착취하는 거 아님?"


하지만 여러분은 치킨을 주문할 때 여러분을 상대로 돈을 벌려는 치킨집을 고르지 않습니다. 맛있는 치킨빨리 제공할 수 있는 치킨집을 원하겠죠. 물론 치킨집의 영업 목적은 돈이겠지만, 그건 치킨 제공에 따른 대가일 뿐입니다.


이런 오해는 질문하는 방식 자체가 약간 잘못됐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왜 지원했나요?"라고 물으면 당연히 "(나는) 이러한 이유로 지원했다"라고 '나' 위주로 답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지원했느냐"라는 질문을 통해 회사가 알고 싶은 것은 "당신이 우리 회사에 무엇을 제공할 수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소서(특히 지원동기)는 자기 경험이나 장점부터 늘어놓으면 안 됩니다. 회사에 무엇이 부족한지 파악해 보세요. 적어도 이 방면에서 번역사는 다른 직종의 사람들보다 훨씬 리서치하기 편합니다.


취업 관련 학원, 강사, 유튜브 채널 등이 늘 강조하는 내용 중 하나가 현직자 인터뷰입니다. 점심시간에 나온 현직자를 붙잡고 인터뷰를 요청해라, 현업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라, 라는 것이 주장입니다.


근데 밥 먹으러 나온 수많은 회사원 중에 내가 지원하려는 직무의 선배가 누구인지 어떻게 알아볼까요? 설령 알아보더라도 남들보다 훨씬 내향적인 번역사들이 과연 말을 붙일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짓을 하러 상암까지 갔다가 너무 막막해서 현직자를 만나고 싶다고 로비 직원에게 요청했다가 '입구컷'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아무것도 얻은 것 없이 근처에서 밥이나 먹고 왔지요.


하지만 대개 회사는 번역사에게 현업의 이해라든가... 그런 거창하고 중요한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역 내지 않고, 번역문 매끄러우면 그만이지요. 그런 건 파악하기 쉽지 않겠어요? 지원하려는 회사의 공식 웹사이트를 방문하거나 회사가 발간한 자료 등을 보세요. 번역사만의 세심함을 발휘해서 문체, 폰트, 레이아웃, 내용, 일관성 등에서 문제점을 찾아보세요. 그러면 내가 회사에 무엇을 제공할 수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건 모두 여러분이 학교에서 공부하며, 또는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이미 했던 일입니다. 그걸 회사가 알아볼 수 있게 잘 정리해서 '우리가 찾던 인재구나!'하고 깨닫게 해 주면 될 뿐입니다.


지원동기 뭉툭하게 쓰지 마세요


[웃자고 쓰는 자소서 표현 블랙리스트]

명사: 경험, 분야, 기회, 전문성, 문화, 경청... etc.

형용사: 다양한, 풍부한, 좋은, 깊은, 세심한... etc.

경험: 해외 여행, 어학 연수, 외국인 친구들이랑 파티한 거... etc. + 번역한 거


2000년대 대학생들은 방학 때 해외로 봉사활동, 워킹 홀리데이, 배낭여행 가는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갔다 온 사람이건, 갈 사람이건, 아직 안 간 사람이건... 그만큼 해외 경험에 대한 정보를 직간접적으로 쌓았다는 것입니다. 그랬던 사람들이 이제는 채용담당자가 되어 여러분의 지원서를 평가합니다. 언어 전문가가 필요해서 채용 공고가 열린 건데 어지간한 해외 경험을 역량의 근거로 제시한다면 채용담당자의 눈에 차지 못할 것입니다. 해외 경험을 쓰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해외 경험만으로 언어 전문가를 자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래는 제가 즉흥적으로 작성해 본 지원동기입니다. 설득력이 있나요?


미국에서 대학교 4년간 공부하며 현지인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습니다. 인종의 용광로라는 미국에서 다양한 국적의 친구를 만나며 문화 차이 때문에 적응이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문화를 존중해야겠다는 마인드로 친구들의 말을 경청했고, 그 결과 원만한 친구 관계를 맺고 문화 차이를 극복했습니다. 이러한 해외 경험을 통해 쌓은 언어의 전문성으로 누구보다도 완벽한 번역을 제공하겠습니다.


대부분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하지만 상당히 많은 분들이 지원동기를 이런 식으로 쓰십니다... 이러면 채용담당자는 '아, 그냥 찔러나 본 지원자로구나'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큽니다. 미국 생활과 번역 실력에 큰 관계가 있지도 않고, 경청 마인드로 모든 갈등을 해결해 버린 비현실적이 이야기니까요.


설령 미국에서 값진 경험을 했더라도 위의 지원동기는 그걸 드러내지 못합니다. 두루뭉술한 미사여구만 써서 뾰족함이 없거든요. "좋은", "다양한 국적", "존중 마인드", "경청", "원만한", "전문성", "완벽한" 같은 거요. 좋은 관계란 무엇인가요? 같이 밥 먹고 영화 봤으면 좋은 관계인가요? 완벽한 번역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건가요?


번역 경험도 그냥 쓰지 마세요. 어려운 문서를 번역해 봤다고 작성하면 읽는 사람은 '아, 그런갑다'하고 넘어가겠지만 실제로 번역 품질이 완벽했는지는 당사자와 그 고객만 알 뿐입니다. 번역은 매 순간이 선택입니다.

프로젝트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었고, 그걸 어떻게 해결했는지 풀어내야 채용담당자를 설득할 수 있습니다. 아래에 또 예시를 작성해 봤습니다.


N년간 프리랜서 번역가로 활동하며 IT, 마케팅, 메디컬, 회계, 미디어 등 다양한 분야의 문서를 번역하여 완벽한 품질의 번역문을 제공했습니다. 통번역대학원에서 Trados 사용법을 배웠으며 memoQ, Phrase 등 여러 가지 툴을 사용할 줄 압니다. 스타일 가이드와 TM을 참고하여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번역을 수행했습니다. 또한 MTPE 작업을 수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AI 번역에 대한 이해도가 높습니다.


저는 제 전문 분야에서 빠르고 정확한 번역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자신감은 단순히 "다양한" 분야의 글을 "많이" 번역해 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문제를 맞닥뜨릴 때마다 고민하고 해결한 경험이 쌓였기 때문에 판단력이 빨라진 것입니다. 그런 문제 해결 과정을 제시해야 설득력이 있지, 경험을 늘어놓기만 하는 지원동기는 이력서, 경력기술서 항목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모바일 게임 번역 경험을 바탕으로 [회사명] OO 앱의 현지화 품질을 개선하고자 지원합니다. 앱 번역은 여러 작업자가 공동으로 번역하기 때문에 번역의 일관성을 유지하기가 힘들고, 이는 고객 불편으로 이어집니다. 저는 n편의 작품을 번역하며 업무 과정에서 정보 공유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을 원인으로 파악했고, [협업 툴]의 [기능]을 사용해 업데이트 내용을 전파했습니다. 이를 통해 주요 UI 텍스트의 번역어를 모든 작업자와 실시간으로 공유했고, 앱 번역과 관련한 고객 문의를 월 평균 X건에서 Y건으로 줄였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현재 올라와 있는 공고를 바탕으로 적어 봤습니다. 썩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위의 예시보다는 좀 더 구체적이지 않나요?


번역사는 멋진 직업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평생 한두 분야만 경험하지만, 번역사는 업무를 통해 여러 분야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지식을 쌓습니다. 그러한 강점을 "다양한", "많은" 같은 뭉툭한 언어로 뭉개지 마시고, 자신의 재능을 빛낼 수 있는 뾰족한 언어를 고민하여 찾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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