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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플 테스트: 설명할 수 있는 선택을 해라

by 이태리

고든 램지의 "헬스 키친" 시리즈를 보면 "makes sense"라는 표현이 참 자주 나옵니다. 예를 들어 동료 요리사를 평가하면서 "He makes dishes that make sense"라고 하는 식이죠. 의역하자면 "납득할 만한 요리를 만든다" 정도 아닐까요? 그렇다면 거기서 180도 다른 사람은 "말도 안 되는 요리를 만든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번역에는 정답이 없는 대신에 '정답으로 칠 수 있는 영역'이 있습니다. 그 영역을 벗어나는 번역문은 '말도 안 되는' 글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글을 샘플 테스트에서 종종 보게 되면 몹시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저는 번역문을 평가할 때 선택을 항상 강조합니다. 번역사가 모든 분야를 알 수는 없습니다. 전문 용어를 틀려도 어지간하면 넘어가죠. 하지만 그 외의 일반적인 부분, 네이티브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 고개를 갸우뚱할 그런 부분에서 고민 없이 번역문을 써 내려간 티가 나면 크게 감점합니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번역한 이유와 과정을 물어보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번역자가 종종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샘플 테스트에서 어떤 선택이 중요한지 적어 보고자 합니다.




1. 왜 영어 표현을 그대로 살릴까


영한 번역문의 독자는 한국 사람이죠. 그러면 원문의 영어 표현을 한국어 어법에 맞게 바꿔야 합니다.


In response to fast changing electrification trend, we successfully launched the Kia EV6, our first dedicated EV.


2023 Kia EV Day에서 송호성 기아 사장이 한 발언의 일부입니다. "First dedicated EV""처음으로 헌신하는 전기차"로 번역하면 말이 될까요? 아닐 겁니다. "Dedicate"는 "헌신"이지만, "Dedicated"에는 "특정 목적에 맞는"이라는 뜻도 있으니 "첫 번째 전용 EV", "기아만의 첫 번째 EV" 정도로 번역해야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한 얘기 아니냐고 하실 수도 있지만, 번역할 때도 "dedicate"가 나오면 무조건 "헌신"으로 번역하는 분이 아주 많습니다.


영국인과 한국인이 다른 만큼 영어와 한국어도 다릅니다. 영어 문장도 원문에서 벗어나 최대한 한국어에 맞게 옮겨야 합니다. 하나 더 알아볼까요?


Be the first to know
아는 최초가 되세요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예전에는 CNN을 틀면 중간 광고마다 "Be the first to know"라는 슬로건이 주야장천 나왔습니다. CNN을 보고 정보를 빠르게 습득하라는 메시지였죠. 이것을 원문에 충실히 번역한다고 "아는 최초가 되세요"라고 옮기면 어색하지 않나요? "최초의 OO가 되세요"라든지 "최초로 OO하세요"라든지 "최초"가 뭔가 꾸며 줘야 하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샘플 테스트를 진행하면 이런 부분도 "최초입니다", "최초였습니다"라는 식으로 번역하는 분이 꽤 있습니다.




2. 사물 주어의 문제


This award highlights our efforts to delivering products at reasonable prices.
이 상은 합리적인 가격에 제품을 제공하는 우리의 약속을 강조한다.


문법만 놓고 보자면 위의 문장에서 "highlight"의 주어는 "award"입니다만, 상이 사람을 강조할 수 있을까요? 마치 상이 벌떡 일어나서 수상자의 등을 두드리며 격려라도 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영어와 달리 한국어에서는 사물 주어를 쓰는 것이 흔치 않습니다. 한국어 화자에게 사물은 외부의 대상입니다. 어떤 행동의 매개체/수단이기도 하고 행동의 대상이기도 하죠. 그런 기준에서 위의 문장은 아래와 같이 고칠 수 있겠습니다.


이번 수상을 통해 합리적인 가격에 제품을 제공하는 우리의 노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이번 수상은 합리적인 가격에 제품을 제공하는 우리의 노력을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뜻깊습니다.


사물 주어를 한국어에서 무조건 쓸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물건을 정리할 때 영어로는 "This one goes here?"라고 하는데 한국어에서도 "이건 여기로 가요?"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소문"은 어떤가요? "그에 대한 소문이 사람들 입방아에 오른다", "흉흉한 소문이 돈다". 적절한 동사만 오면 사물도 주어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상"과 "강조"는 왜 어울리지 않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강조"는 사람이 사실이나 생각을 힘주어 드러내는 것이지 사물이 사람이나 사실이나 생각을 힘주어 드러낼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샘플 테스트에 임하시면 좋겠습니다.




3. 어감의 문제 - 왜 이 표현인가?


번역사는 기교를 부리기보다는 글의 목적과 독자, 맥락에 맞춰서 가장 정답에 근접한 것을 내놔야 합니다.


Eggs go well with milk.
달걀은 우유와 찰떡같이 어울린다.

This gold strap goes well with your Rolex.
이 금시계줄이 롤렉스와 찰떡같이 어울립니다.


Go well with잘 어울린다는 뜻이 있긴 하죠. 여기서 좀 더 욕심을 부려서 "찰떡같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면 무조건 통할까요? 달걀과 우유는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데다가 음식이니 어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롤렉스, 금 같은 사치품에 붙이면 오히려 격이 떨어집니다.




지금까지 샘플 테스트에서 유의할 만한 포인트를 짚어 봤습니다. 사실 더 소개할 수도 있지만, 그러다가는 글이 끝나지 않을 것 같네요. 위의 내용은 샘플 테스트뿐만 아니라 번역 작업 전반에 적용됩니다. 항상 내가 쓴 글을 이중, 삼중으로 검증하면서 다수의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선택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주에는 글의 맥락을 살펴서 번역문의 완성도를 올리는 요령을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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