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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소서 이렇게 쓰지 마세요 (2): 커뮤니케이션

by 이태리

자아비판의 시간


이 자리에서 참회합니다... 저도 "업무상의 강점" 항목에서 커뮤니케이션이나 소통을 자주 언급했습니다. 영어로 외국 회사와 일하면서 집요하게 파고들어 문제를 해결했다는 이유에서요. 결과적으로도 그런 내용을 적은 자소서는 내는 족족 탈락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제가 썼던 의사소통 내용을 조금 더 소개해 볼까 합니다. 당시에 제가 재직한 회사는 외국 회사 A로부터 물품을 공급받기로 하고 비용도 모두 지불했습니다. 그런데 A사에 문제가 생겨서 관련 프로젝트가 모두 어그러졌습니다. 일정이 지연될수록 비용은 불어나는데, A사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 계속 물품 제공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유통사인 A사 대신에 제작사인 B사에 직접 접촉해서 물품 공급을 요청했습니다. B사 사장이 있는 곳 시차에 맞춰서 이메일을 보내고, 이메일을 보낸 직후에 전화도 했습니다. (그놈의 국제전화비!) 그렇게 한 달을 집요하게 연락한 끝에 물품을 보내주겠다는 답변을 받았고, 가까스로 물품 공급을 진행했습니다. 거의 한 달 가까이 해외 사람과 '소통'해서 문제를 해결한, 아주 뿌듯한 경험이었죠.


그런데 자소서를 첨삭해 준 친구들이나 이 일화를 들은 면접관 모두 반응이 심드렁했습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죠. 제 노력이랄 게 한 달 동안 이메일 보내고 전화한 것뿐이니까요. 회사를 위해 하라는 대로 열심히 했을 뿐인데 인정받지 못하니 상당히 허탈했습니다.


그래서 사회초년생은 소통 관련 내용을 적기 참 힘든 것 같습니다. 학교 다니면서 변변한 갈등을 겪을 일이 없고, 회사나 단체에서도 갈등을 해결하기 보다는 시키는 대로 하는 역할을 맡으니까요.


사람은 누구나 고집을 부린다


저는 면접 자리에서 모든 지원자에게 갈등을 해결한 경험을 묻습니다. 그게 회사의 주요 관심사니까요. 그런데 대다수 지원자들은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했거나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성적으로 설득했더니 상대방이 납득"했다는 답변이 잊을 만하면 나오지요.


이성적으로 사람을 설득한다는 건 판타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이성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특히나 회사에서는 지위고하가 있고, 지위 높은 사람의 의견이 가장 '이성적'인 것으로 결정이 나곤 합니다.


사람이 아닌 절차가 소통 오류의 원인일 때도 있습니다. 중간 관리자가 업무 내용을 받고 지시를 내려야 하는데 이메일이나 메신저를 확인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간 관리자가 핵심 결정을 실무자한테 떠넘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 팀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업무라면 여러 부서가 한 팀에 제각각 피드백을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난잡하게 피드백을 받는 팀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이죠. 외국계 회사라면 표현 차이 때문에 오해가 발생할 수도 있고요.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이성적 설득' 같은 두루뭉술한 얘기가 아니라 구체적인 해결책이어야 합니다. 업무 요청 방식을 바꾼다든가, 협업 툴을 사용한다든가, 업무 책임 범위를 명확히 한다든가 말이죠. 기존 절차를 간소화하는 것도 효과적입니다. 절차가 번잡해서 여러 사람이 두루 따르지 못하면 숙련된 사람도 실수하기 마련이니까요.


인하우스 번역사로 지원하는 사회초년생이나 프리랜서 번역사에게 업무 절차를 효율화할 기회가 얼마나 주어질지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에이전시에서 주는 일을 받아서 하기에 바빴으니까요. 반면에 에이전시가 발주하는 일에서 개선사항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빠듯한 일정에 비해 일이 많다든지, 최종 클라이언트가 준 자료를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전달한다든지 말이죠. 그런 것부터 적극적으로 개선해 나가면 남들도 인정할 만한 소통 오류 개선 사례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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