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개 도시 한 달 살이 하는 디지털홈리스 부부가 하는 여행.
TV 프로그램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저 길을 배낭 메고 걷는 순간이 오겠지?'라고 생각한 적 있다. 물론 종교는 없지만...
'세계여행'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대부분 큰 배낭을 상상하겠지 싶다. 나 또한 '세계여행'의 로망은 등짝보다 큰 배낭을 메고 기차와 버스를 오가며 걷는 중간엔 바닥에 주저앉아 휴식을 취하거나, 멋진 절경을 보기 위해 높은 산을 거침없이 오르고 수많은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그런 여행이었다. 하지만 웬걸? 몸이 피곤하고 육체적인 고통도 조금 있는 게 세계여행의 묘미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지금 원래 통통했던 살이 더 올라있다.
우린 지금 배낭 대신 캐리어를 끌고 다니며, 가끔은 끼니를 거를 줄 알았지만 한 끼를 걸러 두 끼를 거하게 챙겨 먹고 있다. (육식 위주) 그리고 관광지보단 집과 주변 카페를 돌아다니는 게 우리의 세계여행이다.
여행지라는 느낌보다 일상을 살아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을 때, 남편에게 이런 요구를 한 적 있다.
'일주일에 단 하루 정도라도 여행하는 기분이고 싶어.'
디지털노마드의 삶은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어 아주 자유롭고 멋진 삶이구나 싶었는데, 남편을 24시간 매일매일 지켜본 결과 24시간이 모자라도록 일을 하고 있다. 월화수목금토일 다 주말 같을 줄 알았는데, 월화수목금토일 매일이 평일이다. 9 to 6 가 아닐 뿐 새벽 불빛에 눈을 뜨면 옆에서 키보드 두드리는 남편을 쉽게 발견하곤 한다. 알고 보니 이 삶은 매일 본인의 일상을 스스로 통제해야 했고, 완전한 자유는 쉬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세계 여행하는 4개월 그리고 지금까지 제대로 투어를 해본건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
이런 여행,
나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남편을 따라 디지털 유목민이 되었지만 하루 종일 일만 하는 남편과 달리 일의 양이 적은 나는 업무가 금방 끝나곤 한다. 그럴 때면 빨래나 식사를 차리거나 정리 정돈을 하는데 그래도 시간이 남을 때는 넷플릭스를 보거나, 여행지를 알아보곤 한다.
가끔은 세계여행을 하는 다른 부부들의 인스타를 보고 있으면 부러울 때가 많은데, 특히 '아, 저게 정말 세계여행의 묘미지!' 싶은 멋진 사진과 글을 볼 때면 속으로 '난 지금 여행 중인가?'라고 질문을 남겼다. 해외지만 특별할 게 없는 날들이 이어지면 그냥 일상을 사는 기분일 때가 많아 '이럴 거면 한국에 있는 거나 다름없네.' 싶은 순간들이 쌓여가고 있었다.
볼맨 소리가 가득해질 때쯤,
누군가 남긴 문장 하나로 여행에 대한 생각이 바뀐다.
'여행의 방식은 중요하지 않은 거 같아요. 여행을 하는 방법이 정해져 있진 않으니까요.'
관광지를 둘러보는 시간보다 일을 하기 위해 동네 카페를 돌아다니는 시간이 많고, 많은 국가나 도시를 둘러보기 보단 한 도시에 길게 머무는 여행은 어쩌면 아주 지루할 수 있다. 아니, 확실히 지루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여행이 익숙해지고 있다. 이 여행이 좋아지고 있다.
한 곳에 오래 머무는 건
마음에 드는 레스토랑을 여러 번 방문할 수 있고,
한 번 방문해서는 알 수 없는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하며,
어쩌면 쉽게 경험하지 못할 일들을 해볼 수 있다.
누군가는 호캉스를, 누군가는 뚜벅이 여행을, 누군가는 무전여행이 취향이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는 지루한 여행도 우리의 취향이 되어가고 있다.
아마 우리 여행은 오래 묵힌 치즈처럼
제 향과 모습을 만들기 위해
천천히 무르익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