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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랑부부 Mar 14. 2020

와인을 모르는 사람이 와인 취향을 알아가는 법

카베르네 쇼비뇽이 도롱뇽이냐고 물었던 나는 지금 와인취향을 알아간다.

"와인은 원래 꾸렁내 나!?"


스물 하나, 알코올에 눈을 떴을 때 사촌 언니가 와인 한 병을 들고 가족들 앞으로 왔다. 그리곤 명절 음식 준비에 열을 가했던, 법적으로 알코올을 마실 수 있는 어른들의 유리잔에 조금씩 따라주었다. 반투명한 불그스름한 액체가 투명한 유리잔에 담기니 루비처럼 예쁜 빛깔을 냈다. 우리 집에도 종종 와인이 선물로 들어와 와인병이 어떻게 생긴 줄은 알았는데 이상하게 맨날 그 병은 텔레비전 옆 장식장에 진열만 되어있고, 실제로 그 액체를 마셔본 적은 없었다. 나에게도 드디어 와인을 마실 수 있는 기회가 생기나 했는데, 스물 하나인 내가 무슨 와인 맛을 알겠냐며 그 영롱한 루비 같은 액체는 어른들 목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냄새 한 번 맡아보자고 우리 엄마 잔에 코를 대고 킁킁대니 내가 생각했던 냄새와 완전 다른 쿰쿰한 향이 후각세포를 자극했다. "엥!? 이게 뭐야? 꾸렁내 나잖아?" 포도향과 체리향 비슷하게 나지 않을까 했는데 70% 알코올 향, 20% 먼지 향, 10% 꾸렁내가 실망을 안겨 주었다. 그래도 맛은 다르겠지 싶어 엄마에게 한 모금을 빌려 마셨는데 내가 맡았던 냄새랑 똑같은 맛에다 입 안의 모든 침을 말려버리는 맛에 경악을 안고 그 뒤로 와인은 멀리했던 기억이 있다.


이랬던 나는 지금 틈만 나면 와인을 부르짖고 있다.




"피노누아가 좋아 카베르네 쇼비뇽이 좋아?"


당시 남자 친구였던 남편이 와인코너 앞에서 나에게 질문해왔다. 내가 아는 와인은 레드 아니면 화이트 또는 로제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름도 생소한 '카 뭐시기'를 묻자 당황한 나는 해맑게 웃으며 '나는 레드와인!'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마치 귀족이 기르는 도롱뇽 이름 같은 카베르네 쇼비뇽이란 걸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함께 곁들일 스테이크를 준비했다.


그가 내 앞에 놓인 목이 긴 유리잔에 미리 열어둔 와인을 잔 입구에 기울이니 검붉은 색상의 불투명에 가까운 액체가 촤르르 흘러나왔다. 포도의 껍질을 잘 짜서 거른 듯한 빛깔에 냄새가 궁금해져 얇디얇은 잔에 코를 가져다 대고 냄새를 킁! 하고 맡자 훅! 하고 들어오는 향에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아! 이거 옛날에 맡았던 먼지 냄새잖아......?'


스테이크만 찍어놓고 와인은 찍지도 않았다.


솔직히 그 꾸렁내가 두려웠지만 일단 앞에 놓인 스테이크부터 입에 썰어 넣곤 색깔만 예쁜 그 검붉은 알코올즙을 한 모금 살짝 마셨는데? 이상하다? 입 안에서 파티가 일어났다. 허브의 향과 후추의 매운맛이 와인의 쌉싸래한 맛을 줄여주고 고기의 육즙과 기름기가 떫은 맛을 지워 달콤함과 고소함이 입 안에 남아있는 게 아닌가!?




"아! 이 맛에 음식과 곁들이는 거군!"


그렇게 와인이 호감으로 바뀌었을 무렵 세계 여행길에 오른 우리는 선선한 9월의 발리에서 첫 인생 와인을 찾게 되었다. 인터넷이 잘 터지지 않는 답답한 숙소 옆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겨 간단히 맥주 한 잔과 함께 일을 하려 했는데 메뉴판에 저렴한 잔 와인을 발견하고 무언가에 이끌리듯 매운 고추와 새우가 곁들여진 오일 파스타와 함께 와인을 주문했다.


그렇게 알싸한 마늘향과 매콤한 고추 향이 풍겨오는 파스타와 노란 전구와 촛불에 비추어진 맑은 루비색으로 빛이 나는 액체가 우리 눈 앞에 놓였다. 한 모금 마시자 물처럼 가볍게 목을 타고 넘어가는데 끝 맛은 살짝 매콤하면서도 상큼한 게 꽤 매력적이었다. 이번엔 알싸하고 매운 향이 감도는 파스타를 씹어 삼키고 입을 헹구기 위해 와인 한 모금을 마셨는데? 파스타 속 고추 향이 와인의 매콤한 맛을 지워내더니 달달함과 상큼함을 남기는 게 아닌가?


탈라몬티 몬테풀치아노 다부르조, 테이블 와인으로 괜찮다고 한다. 이탈리아 와인이다.


이때부터 와인은 음식의 맛과 향에 따라 또 다른 향과 맛이 나는 걸 알게 되었다.




"발리에서 마셨던 그 와인! 그거 마시고 싶어."


발리에 있는 내내 그 와인을 즐기다 발리를 떠나게 되니 영 아쉬울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국의 대형마트 와인코너를 기웃거렸지만 결국 찾을 수 없어 제법 규모가 큰 토탈와인샵 직원에게 물어보니 그 와인 자체가 미국에 들어오지 않는단다. 아쉬움을 안고 우리가 원하는 와인 맛을 이야기하자 와인샵 직원이 기다렸다는 듯 본인이 적극 추천하는 와인 몇 개를 소개해주었다. 왜 이 와인이 유명한지, 어떤 지역에서 어떤 방식으로 생산되는지, 맛은 어떤지 신나게 설명하는 직원을 따라다니며 와인 두 병을 골라 담고 마지막으론 유튜버가 추천했던 와인도 한 병 골라 집으로 돌아왔다.


와인샵 직원이 추천해준 와인 한 병을 열어 와인이 어느 정도 숨 좀 쉬었지 않을까 싶을 때 지인들 앞에 놓인 잔에 쪼르르 따라주었다. 사실 처음 마셔보는 와인이라 내가 사 온 와인이 맛이 없으면 어쩌지 싶었는데, 그 우려가 단 한 모금으로 지워졌다. 그 검은빛에 가까운 붉은 액체가 입 안으로 흐르자 끈끈하고 묵직한 느낌이 혀 위로 쿵! 하고 얹어졌다. 그렇게 진득함이 혀를 훑고 목구멍으로 사라지자 진한 포도향과 은은한 상큼함 그리고 미묘한 단 감칠맛이 여운을 주었다. 음식 없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은 이 와인이 내 두 번째 인생 와인이 되었다.


그냥 마셔도 좋았던 이터 나파밸리 2018. 최근에 2017년산을 마셔 보았는데 맛은 비슷했다. 미국 와인!
진하고 묵직한 포도향과 걸맞게 색도 검은색에 가까운 붉은빛이다. 과일이나 치즈보단 기름기가 있는 육류와 매콤함이 느껴지는 음식을 곁들였을 때 더 맛있었다.


다음 날, 유튜버가 추천했던 와인도 칭찬일색이었으니 분명 맛있겠지 싶어 맛이 들길 기다렸다가 기대에 찬 한 모금을 홀짝였는데,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혹시 음식과 함께 곁들이면 더 나을까 싶어 함께 마셔봐도 영 시원치 않음을 느끼곤 와인은 '취향의 차이'라는 걸 깨달았다.




"취향이란 건 도전 그리고 우연과 경험이 녹아 만들어지는 거 같아."


만약, 그 꾸렁내 나는 게 와인이라 정의해놓고 그 거부감 드는 액체를 등지고 있었다면 아마 나에게 술이란 소주, 맥주 그리고 막걸리가 전부였지 싶다. 카베르네 쇼비뇽이란 게 궁금해 앞에 놓인 맛있는 스테이크를 방패막이 삼아 한 모금했던 도전이 와인에 대한 호감으로 바뀌었고, 인터넷이 터지지 않아 우연히 들어간 레스토랑에서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와인 한 잔을 주문한 우연이 인생 와인이  것처럼  취향은 색다른 것의 도전과 우연이 엉겨 만들어졌다.


아마, 취향을 확고하게 다져가는 건 세계여행도 한몫하고 있다. '여행은 나를 알아가는 시간.'이라고, 어쩔 수 없이 놓인 낯선 환경은 외향적이지만 호기심은 강해도, 내성적이라 도전하지 못하는 나의 등을 떠밀어 새로운 음식을 먹게 만들고, 새로운 경험을 하게 만든다. 그렇게 다져진 경험들이 또 다른 취향을 낳고, 내가 가진 취향을 확고하게도 하고 어쩔 땐 취향을 변하게도 한다. 내가 가진 와인에 대한 편견을 내려놓으니 와인의 다채로운 맛들을 경험 하며 새로운 취향을 쌓고 버리기를 반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와인 잘 알게 되었느냐?

아니, 나는 여전히 와인을 잘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좋다.

모르니까 편견을 버리고 새로운 걸 도전하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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