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에 기반한 테크닉
우리는 주어진 과제들을 완벽하게 수행하여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다 몸의 부정적인 신호가 오고, 관계에 갈등이 생기면 그제서야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이런 과제중심, 성공지향적인 삶은 현대인의 몸과 마음을 숨죽게 한다. 이런 우리에게 실패를 맘껏 해볼 수 있는 과제가 주어진다면 어떨까?
목탄은 나무로 태워 만든 가장 오래된 재료로 지금까지도 가공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인 상태로 사용하는 재료이다. 그러다보니 부드럽고 연해서 자칫 부러지기도 쉽고, 가루날림이 있어 보관이 어려워 다른 재료에 비해 인기가 없다. 그러나 막상 다뤄보면 목탄의 매력에 푹 빠지고 만다. 자연 고유의 냄새, 손의 질감, 종이에 그어질 때 내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단, 그림을 정확하게 잘 그리고 싶다는 마음만 내려놓으면 말이다.
드로잉은 정확성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사진기가 없을 시기에 정확한 사실을 관찰하여 묘사하고, 그림의 밑바탕이 되어 원하는 그림의 기초가 되고, 거친 머리 속 생각을 정교하게 정리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리고 과정의 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작품으로도 인정받는 미술이 한 형태이다. 과정의 일부분일 경우는 정확함이 더 요구되지만 작품으로선 과정이 만들어 낸 자유로운 선, 색감에 주목한다.
나는 작가들의 드로잉을 매우 좋아해서 미술관 구석에 작가의 드로잉이 있으면 한참을 머물러 감상한다. 프리즈 아트페어 홈페이지를 갔다가 배너에 걸린 개인전 광고를 보게 되었다. 드로잉만 모은 전시라니 그것도 목탄 드로잉이라니!! 가슴이 뛰었다. 아드리안 게니(Adrian Ghenie)는 루마니아 출신으로 현재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다. 아시아 첫 개인전을 페이스갤러리 서울(2022. 9. 2 ~ 10. 22)에서 연다. 그는 기자간담회에서 목탄 드로잉은 정확성보다 실수에 기반한 테크닉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드로잉 연작을 작업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원하는 선이 나올 때까지 실수를 계속하다보니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자유를 찾게 됐다.
내 마음대로 그리고, 문지르고, 지우는 행위는 자유뿐만 아니라 창조적 에너지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사람들은 좀처럼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정확하게 그려내겠다는 마음을 내려놓지 못한다. 그러다보면 그림에 끌려다니게 된다. 이미지에 집착하다보면 선 안에 갇히고 얽매이게 되어 결국 왜곡된 그림을 그리고 만다. 언제든 지우개로 지워 수정할 수 있고, 자리에서 일어나 한 두걸음 물러나 숨을 고르고, ‘낯설게 보기’를 통해 좀 더 자연스러운 결과물을 얻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최근에 드로잉수업에서 참고용 자료로 사용할 목탄드로잉 하나를 그렸다. 핀터레스트에서 보고 그릴 만한 흑백사진을 찾아보니 스타일이 좋고, 구성이 근사한 사진들이 많았다. 그러나 난 이 노인의 사진이 끌렸다. 얼굴의 옆모습만 찍힌 사진의 흑백의 대비가 극명했고, 노인의 지친 듯한 눈빛이 사로잡았다.
목탄으로 슥슥 스케치를 하고 어두운 부분을 먼저 칠하고 문질렀다. 지우개로 지우며 형태를 잡고, 목탄으로 겹쳐 칠하고 문지르기를 반복했다. 정확한 선따위는 필요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았다. 배경은 목탄을 부러뜨려 가루를 내어 문지르며 힘을 주었다. 저 선명한 노인의 푹 파인 눈과 주름을 위해 콘테를 사용했다. 어둠을 꽉 잡아내고, 밝음은 과감하게 지워냈다. 주름의 디테일은 잘 보이지 않아 도중에 그만두었다. 아마 주름에 매달렸으면 이 느낌은 나지 않았을 것이다.
목탄처럼 노인에게도 정교함은 어울리지 않는다.
삶에서 한발짝 물러나 실수를 마음껏 경험할 수 있는 목탄드로잉은 아드리안 게니가 말했던 것처럼 자유를 선사한다. 언제든지 지우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할 수 있고, 거친 재료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재료의 특성이 이끄는 대로 흘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이야말로 치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