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술사> - 파울로 코엘료 소설
작가 | 파울로 코엘료
출간 연도 | 1988 년
질서 있지 못한 납과 구리 조각들에게서 아름다운 가치를 생성하는 일련의 연금술 이야기는 대부분 황금빛 후광으로 갈무리되며, 그 결과물의 형태라 할 수 있는 ‘금'은 우리에게 지대한 욕구의 자산이 된다. 그렇기에 더욱 신비스럽게만 느껴지는 연금술에 대해 작가 파울로 코엘료는 상당히 가뿐한 문체로 그 영역의 문을 넓혀 주고 있다.
그러나, 그 문을 통과하여 주인공 산티아고와 함께 피라미드에 도달할수록 나는 연금술이나 보물의 위치를 익히는 것이 아닌, 나 스스로가 이미 연금술사로서의 분명한 자격을 지녔다는 사실을 점점 깨닫고 있었다. 산티아고와 함께 피라미드에 묻힌 보물을 꺼내기만을 기다리다가, 문득 보물을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게 된 것이다. 보물은 정말로 피라미드에 있었던 것일까?
그는 꿈을 좇아 어디든지 쉽게 길을 떠날 수 있는 양치기가 되길 원했고, 꿈을 좇아 아버지로부터 자금을 얻어 양들을 샀으며, 꿈을 좇아 양의 털을 깎고 팔았다. 곧 그의 앞에 집시 노파와 신분을 숨긴 살렘의 왕, 멜키세덱이 등장한다. 집시 노파는 산티아고가 보물이 숨겨진 곳으로 여정을 떠날 것임을 점치고, 살렘의 왕으로부터는 여정에 필요한 금화와 우림, 툼림이라는 보석을 건네받는다. 든든한 지원과 함께 산티아고의 여정은 문제없이 시작되는 듯하다. 단, 그가 곧 짊어질 지혜의 무게를 앞두고서.
무언가를 온 마음을 다해 원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거야.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은 곧 우주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때문이지.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게 이 땅에서 자네가 맡은 임무라네.
…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된 유일한 의무지.
살렘의 왕, 멜키세덱은 산티아고에게 앞으로 펼쳐질 여정길에서 수많은 '표지'들을 놓치지 말기를 조언한다. 표지. 내 안의 마음과 나 자신을 수평적으로 이으며 진정한 자아의 모습을 향해 나아가는 길, '자아의 신화'의 구성분. 멜키세덱의 조언대로 산티아고는 그 표지들을 하나씩 찾아나간다. 그는 배를 타고 먼저 도착한 이집트(?) 지역 크리스털 상점에서 일을 시작한 후 본인에게서 열정의 뜀박질을 기억하게 된다. 상점 주인의 머리카락은 짐짓 살렘의 왕의 것과 무척 닮아있기도 하여 그의 조언들이 뇌리에 스치기도 한다.
마치 그 늙은 왕이 이곳을 지나며 자신의 표지를 남겨놓은 것 같군.
산티아고가 피라미드에 묻힌 보물을 찾아 나서는 과정 단계 하나하나는 '자아의 신화'를 엮어가는 산실이다. 그 과정 동안에서 마주하는 세세한 경험과 사물들은 산티아고가 기억하는 '표지'로서 그의 마음에 남아있게 된다. 양치기 소년은 세상의 모든 곳을 체험하고 모든 곳에 대해 울부짖고 삼키려는 강한 소망이 있었다. 그 꿈을 본격적으로 담고 나서는 그의 첫 발걸음으로 위대한 역사서를 펴내기 시작하고, 역사서 페이지마다 그를 단련하는 '표지'들로 채워지는 것이다.
(목표, 목표의식은 '자아의 신화'로 성립된다. 이후 목표를 바라보고 생성되는 감각, 직관, 이성, 감정, 외부, 내면 모두로부터의 경험들은 그 자체로 또 당돌한, 신화의 한 페이지, '표지'로 자리 잡는다.)
알 파이윰의 오아시스에 살고 있다는 연금술사를 만나려는 영국인과 함께 동행을 시작하는데 연금술사를 먼저 만나게 되는 자는 영국인이 아닌 바로 산티아고. 그런데, 연금술사의 외모에는 딱히 신비스러운 구석은 없다. 오히려 그가 산티아고에게 전해 주는 연금술사의 본디 이야기들이 더욱 매혹적인 갈망을 불러일으킨다.
연금술사들은 어떤 금속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가열하면
그 금속 특유의 물질적 특성은 전부 발산되어 버리고
그 자리에는 오직 만물의 정기만이 남게 될 거라고 믿었다.
그들은 이 최종 물질이 모든 사물들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언어이므로,
이 물질을 통해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발견한 물질을 '위대한 업'이라고 불렀다.
그럼 난 어떻게 미래를 짐작할 수 있을까? 그건 현재의 표지들 덕분이지.
비밀은 바로 현재에 있네. 현재에 주의를 기울이면,
현재를 더욱 나아지게 할 수 있지.
…
하루하루의 순간 속에 영겁의 세월이 깃들어 있다네.
나를 참되게 표현하는 모습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때, 추구하던 내면의 진실을 부여잡을 때, 충만한 깨달음의 범위는 내가 거쳐 온 표지들, 즉 지상 모든 존재들에게까지 미칠 수 있다. 사막의 모래 알갱이 하나하나는 사소한 미물처럼 보이더라도 그 알갱이들이 모여 산티아고가 피라미드까지 도달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었다. 한 가닥의 물줄기가 모여 알 파이윰의 오아시스를 고이게 했으며, 오아시스는 마을을 이루고, 마을은 사랑을 알게 해 준 소녀 파티마를 있게 해 주었다. '만물의 정기'와 '위대한 업'은 그 모든 존재들의 가치를 시나브로 체화하며 도달하는 인지적 지점이다. 산티아고에게 그 지점은 과연 피라미드에 있었던 걸까.
산티아고와 연금술사 눈앞에는 우뚝 선 피라미드가 보인다. 그러나, 그들을 방해하는 자들의 인간적인 욕구 앞에서 계획이 좌절될 위험을 마주한다. 바람으로 변신하는 마법을 요구하는 장군과 산티아고의 금화를 낚아채려는 병사들의 탐미적 관점은 잠시 연금술에 혹닉한 독자의 호기심을 꾸짖는 수단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 서투른 호기심을 자상히 배 불리는 듯, 피라미드 앞 쓰러져 있는 산티아고에게 내뱉는 마지막 병사의 발언이 소설 속 가장 큰 표지가 된다. 산티아고가 오랫동안 추구했던 보물이자 '만물의 정기'가 닿은 성물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지금 네가 쓰러져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나 역시 이 년 전쯤 같은 꿈을 두 번 꾼 적이 있지.
꿈속에 스페인의 어떤 평원을 찾아갔는데,
거기 다 쓰러져가는 교회가 하나 있었어.
근처 양치기들이 양 떼를 몰고 와서 종종 잠을 자던 곳이었어.
그곳 성물 보관소에는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지.
나무 아래를 파 보니 보물이 숨겨져 있지 않겠어.
꿈을 좇던 스페인 안달루시아 평원의 양치기에게는 여정을 떠나기 전부터 스스로 보물을 간직하고 있었다. 항상 지키고 있던 그 자리, 양들과 함께 현재의 순간에 가장 충실했던 시간이 머무는 안달루시아 평원에는 그토록 찾던 보물이 산티아고 발아래에서 들춰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든 시간들이 괜한 걸음이었을까. 산티아고는 병사의 말을 듣고 허탈함이 아닌 오히려 '솟아오르는 기쁨으로 가슴이 터져나가는 것 같았다'고 한다. 삶의 주역은 그를 피라미드에 데려다 놓은 그의 발걸음들이었다. 또한 발걸음을 옮기면서 만난 집시였고, 살렘의 왕이었고, 연금술사였다. 여정이 없었으면 만나지 못했을 사랑, 파티마였다. 자아의 신화를 구성하는 모든 표지들과 그 현재가 산티아고의 기쁨을 이루고 있음을 알기에, 축복의 귀환만이 그를 기다린다.
연금술은 납과 구리와 같은 원료들로 금속을 뽑아내는 진귀한 서사다. 그런 진귀한 속성은 금으로부터 비롯되기보다, 만물의 근원에 비유되는 납과 구리의 금빛 태동에 있지 않을까. 수많은 표지들을 만나 자아의 신화를 이룩해 나가던 산티아고의 첫 발걸음과 다름없으니 말이다. 긴 산티아고 여정의 숱한 몸부림과 경험들은 정련되는 납과 구리의 모습을 인간적으로 형상화한다. 어엿한 산티아고에게 값진 현재들이 모여 주었듯이, 원료에게는 값진 연금술의 작업이 필요하다. 기쁨의 깨달음이 산티아고로 하여금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듯이, 정제된 금속 물질에서는 납과 구리의 더없는 생명력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고서.
지금 이 순간에도 금빛 같은 납과 구리에게, 나를 바친다.
연금술사 산티아고의 발자국을 배우며.
오직 금만을 찾으려는 자들이 있었네.
하지만 그들은 결코 그 비밀을 찾아내지 못했어.
납과 구리, 쇠에게도 역시 이루어야 할 자아의 신화가 있다는 걸 잊었던 걸세.
다른 사물의 자아의 신화를 방해하는 자는
그 자신의 신화를 결코 찾지 못하는 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