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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주환 Feb 26. 2022

[이방인] 15. 장밋빛 미래와 후회

<장미의 이름은 장미> - 은희경 소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재판 장면이 기억납니다.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법정에서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됩니다. 그가 해변가에서 마주친 아랍인을 살해할 때 아무 동정심과 연민을 느끼지 못했을 거란 배심원들의 착오에 엉뚱한 힘이 실리고 말죠.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을 정성 어린 슬픔으로 모시지 못한 아들의 모습은 대중들의 차가운 시선을 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그 모습이 다른 범죄에 작용할 만큼 까다로운 기준이 되어야 마땅한 것일까요? 아랍인을 죽인 이유를 묻고자 할 때,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느꼈던 감정이 올바른 것이 아니었다는 증언만으로 인과가 성립해야 할까요?

뫼르소는 사회가 ‘규정’한 솔직함에 맞닿지 못한 죄로 최후를 맞이합니다. 사회가 그어놓은 선들과 점들 안에 갇히지 못한 죄로 뫼르소는 그의 철학을 접어야만 합니다. 다른 느낌과 사고방식을 가진 ‘이방인’으로서의 뫼르소를 보면서 내가 속한 사회는 어떤가를 되짚게 됩니다. 나를 규정하고 심판하는 사회의 시선을 앞두고 괜히 눈치를 봅니다. 그 사회와 더불어 지내지 못한 ‘이방인’에겐 어떨까요. 더욱 난해하고 혼란스럽습니다. 내가 속한 세상에도 자신을 완벽히 맞추어 가지 못하는데, 심지어 낯선 사회, 낯선 세상의 규정이란?

삶은 다양한 기준과 잣대의 늪으로 가득 찹니다. 규율과 규칙에 익숙해지면 다행이지만, 그러지 못한 이들도 도처에 많습니다. 나의 공간을 벗어나 다른 곳에 안착하려는 순간, 나를 향한 숱한 기준들은 거리낌 없이 내게 덤벼듭니다. 이방인들은 새로운 생활권에 몸을 맡기면서, 새로운 사상과 영역을 조심히 배워보려 합니다. 고지식한 모습은 숨기고, 낯선 이들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합니다. 여기 새로운 사람들과 친해지는 건 낯선 장소에 발을 빠르고 안전하게 디딜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됩니다. 그들의 말이 정확히 들리지 않아도 괜히 고개를 끄덕여 봅니다. 그들이 하는 말에 주의 깊게 경청을 해 보아도, 다시 내뱉어야 할 내 답변에는 괜히 거짓이 덧붙여집니다. 그들의 입맛과, 기준과, 문화를 어색한 말투와 제스처만으로 거스르게 된다면 더욱 내 행동만 굼뜨게 될 것 같습니다.

차가움이 다시금 번지는 2월, 계절의 모호한 변덕이 몸을 가렵게 만드는 이때를 빌려 답답한 응어리를 떼어내고 싶은 이방인의 심리를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차가운 한적함이 깃드는 감정, 어쩔 줄 모르겠는 방황과 그래도 무언가 새롭게 이어가고픈 방랑벽이 연초 환절기를 닮은 것 같이 느껴집니다. 좀 더 몸을 아프게 쑤시는 감정에 집중을 해보는 글로써 나름 이 계절감에 맞춰 풀어가는 것이 브런치 피드 구성을 다채롭게 시도하는 점이라 생각됩니다. 겉도는 중압감을 심히 표현한 작품들을 몇 차례 훑으며 진중하게 읽어 보고 감상문을 남깁니다.

[이방인] 감상문 리스트
# <장미의 이름은 장미> - 은희경 소설
# <겟 아웃 GET OUT> - 조던 필 영화



작가 | 은희경

출간 연도 | 2022 년


다가서고 싶었던 곳에서 우린 잠시 주춤할 때가 있습니다.

기대했던 것들이 나타나지 않고, 좀 더 우울한 면을 보여 주는 이곳에서 나는 일껏 소용없는 꿈들만 꾸어왔나 싶습니다. 실망감, 초조함, 답답함에 벗어나고픈 작은 움직임들이 나를 둘러쌉니다. 이때의 움직임들을 조용히 포착하기 위해 은희경 작가는 세세한 관찰력과 상황을 움켜잡는 듯이 군집력 있는 평소의 문체로 이야기들을 다시 펴냈습니다. 단편소설집 <장미의 이름은 장미>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모두 미국 생활에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을 보낸 한국인들입니다. 4개의 에피소들의 각 주인공들은 작가의 솔직한 문체를 잠시 빌려 그들의 불안한 목소리를 한껏 표현해 보려는 것 같습니다. 적막한 이방인들의 목소리들을 말이죠.


화자들에게서는 작든 크든, 방황하는 목소리가 뚜렷하게 들립니다. 나중에 이야기할 것이지만, 첫 번째 이야기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의 주인공 승아와 민영은 바깥 미국 현지인들의 낯선 태도에 비껴 움직여 다니는 인상을 줍니다. <장미 이름의 장미>에선 장밋빛을 냅다 그렸다가 좌절하는 수진, <양과 시계가 없는 궁전> 속에선 언어적 한계로 자신을 숨겨야만 하는 현주도 등장하죠. 마지막 이야기 <아가씨 유정도 하지>의 유정이라는 이름의 노모는 죽음의 예행 연습지로서, 그리고 끝무렵의 쉼터로서 미국 현지를 택합니다.


소설의 이방인들은 주변 환경과 상황을 하강 이미지로 담아냅니다. 바깥으로 펼쳐내는 것이 아닌 점점 안으로 수축이 되기도 합니다. 그들에게 담대함이란 것도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언가를 경험해 보기로 했던 결심의 연장선상에서 낙오감과 방황 심리를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보다 무척 힘들고 지친 일상의 거리들, 돈벌이들, 그리고 사람들. 낯선 곳에 묻혀 사는 일들이 쉽지만은 않더라. 그들의 하소연이자, 짐짓 무거운 깨달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미국으로 떠나온 시점은 너그러운 기대감과 호기심으로 가득했습니다.

미국에서 직장을 구하기 위해, 또 다른 미래를 위해 무거운 발걸음들도 잠시 너그러워지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의 첫출발은 괜찮은 정립이었습니다. 새로운 다짐과 각오들이 뒤따라오는 윤택한 결정인 것이죠. 휴식을 위해 찾은 승아, 취업을 위해 독한 유학생활을 지내온 민영, 단기 어학연수 차 방문한 수진, 여행의 시작점이자 뭇 그리운 옛사람의 흔적을 추억하려는(‘추억’을 위해 미국에 왔다는 건 지극히 저의 생각입니다. 추억한다는 말과 행동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으니깐요.) 유정. 각자의 삶은 각자 나름의 침착한 명분이 보탬이 되었습니다.


아무 가시에도 찔려보지 못한 나방처럼 그들의 모험은 나약한 인간상에 지나지 않았음이 조금씩 드러나게 됩니다. 준비되지 않은 상황들을 마주하며 점점 속을 채워오는 긴장감이 현지의 일상을 메웁니다. 현주의 이야기는 ‘난청’이라는 소재로 이방인으로서의 초조한 처지를 부각하기도 합니다. 가뜩이나 리스닝에 약한 현주는 자신에게 묻는 말조차 이해하지 못하며 만들어지지 않은 대답 거리를 표현하기에 바쁩니다. 간혹 오해도 불러오기도 할 만큼이죠.


알아들은 단어와 구문들을 꿰맞추는 리스닝을 이번에는 한쪽 귀로 해야 했다.
앨런은 말이 빨랐지만 두 번씩 되풀이하는 버릇이 있어서 알아듣는 데 도움이 되었다.


마치 얘기를 나누고 있는 그들끼리만 일행이고 자신은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현주가 이 도시 사람이 아니어서도, 아이와 직장 등이 현주와 거리가 먼 화제여서도 아니었다. 그건 한국에 있을 때도 종종 느끼던 감정이었다. 조명이 비치는 무대에서 자신만이 일행에게서 떨어져 나와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잊히거나 제외된 존재 같았다.


현주를 포함한 이들 이방인들의 삶이 피폐해진다거나 망가진 쪽은 전혀 아닙니다. 살 곳과 먹을거리와, 심지어 풍요로운 이야깃거리들이 쉴 새 없이 그들 곁을 맴돌고 있습니다. 정해진 약속들과 그 자리에 모인 지인들은 이방인에게 무례하게 굴지 않습니다. 단지 어떤 팽창을 가로막는 벽들로 세워진 공간 안에서만 겉돌게 되는 느낌이 아주 강한 소설들입니다. 예전의 미국으로 간다는 기대감과의 괴리도 한 몫합니다. 물질적인 부족함은 없지만, 정신적인 성숙을 소망했던 최선에 다가 올라서지 못한 점은 낯선 현실에 부적응할 수밖에 없는 고단함과 지친 일상에 큰 이유가 됩니다. 독자와 소설 속 인물들은 낯선 곳에서의 존재가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서서히 깨닫습니다.


나이 든 고독감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방황은 젊은 자들의 것만이 아닌 누구나가 겪을 수 있는 삶의 고삐라는 점은 소설을 읽는 독자로서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껏 살아왔던 익숙한 장소가 아니니, 처음 일어서는 망아지처럼 위태로운 출발을 중년과 노년의 주인공마저 혼자서 겪는 과정인 것이죠. 이방인의 위치는 그렇게 고독하고, 피할 수 없는 낯섦에 대한 고찰을 안겨다 주고 있기도 한 셈입니다.




주인공 이방인들은 이내 다시 본국으로 돌아오고자 합니다. 

실패, 포기, 좌절과 같은 서러운 단어들이 떠오르는 대목들입니다. 민영의 고리타분한 공간을 조금이나마 치워주려 했던 나름의 배려심마저 거부당하는 승아는 날마다 귀국 날짜만을 기다리게 됩니다. 떠나온 것에 대해 후회의 독백을 내비치는 수진도 있겠고, 결국 타지에 관한 글쓰기를 접어두는 현주도 각 소설의 끝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들이 가고자 했던 타지인데도 결국 머무르고자 했던 곳은 원래 있었던 본국이란 점이 아이러니하기도 합니다.


단편소설집의 제목이자 두 번째 이야기인 ‘장미의 이름은 장미’는 달콤함이 그대로 머무를 줄 알았던 착각과 허상의 단면을 보여 줍니다. ‘장미를 그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달콤한 향기는 그대로이다’는 작가의 생각은 이방인들의 첫출발에 대한 아쉬운 시선으로 드러납니다. 줄곧 새로운 준비들과 알찬 일상들이 기다릴 줄만 알았지만, 현실을 살고 나면 예상하지 못했던 두려움과 방황감이 엄습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입니다. 장밋빛은 어두운 현실을 가리도록 종용하는 거짓된 힘으로 비칩니다. 내가 기다려 온 바를 무조건적으로 아름다운 청사진으로 그려내도록 하는 사탕발림, 그것이 ‘장미’라는 소재의 역할이 됩니다. 겉은 아름답지만 조심하지 않으면 날카로운 가시에 찔려버릴 수 있는 흔한 비유가 되새겨지는 듯하네요.


나는 왜 떠나온 것일까. 누군가를 더 이상 미워하고 싶지 않을 때 혼자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규칙적이고 또 가시적으로 발전이 드러나는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는 생각. 대체 왜 그런 진지한 생각을 했을까. 그런 점 역시 내가 아는 범주 안에서 틀을 만들고 그 틀에 맞도록 의미를 재단하는 독선적인 진지함의 한 방식이 아니었을까. 나를 증오에 빠지고 용서를 외면하고 또 결별에 이르도록 만든 순정의 무거움, 그리고 서로 다름에서 생겨나는 일상의 수많은 상처와 좌절들, 낙관적이지 못한 복잡한 생각과 그것을 납득시키기 위한 기나긴 말다툼을 통과하고도 나는 여전히 그 틀에 갇혀 있는 게 아닐까. 내가 과연 떠나오기는 한 것일까.




소설은 장밋빛이 사라지는 지점에 다다른 이방인들의 경험에 더욱 집중을 합니다.

결국에 다시 떠나기로 마음을 먹는 주인공들의 여한과 주눅듦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작가가 소설을 시작한 계기는 아마도 ‘후회’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떠나온 것에 대한 후회, 그리고 그것을 치유할 공감력들을 모으기 위한 소설을 써 내려갈 것을 스스로 주문했을지 말이죠. 고독의 시련과 서글픔을 한 명이 아닌 네 명의 주인공들에게 나누어 둔 점은 이방인들의 공통점을 보여 주려는 현명한 의도였을지도요. 처음 이야기인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에서 승아와 민영이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르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노을이 사라진 하늘과 강에는 어둠이 깔려 있었다. 강 건너편 고층건물들은 마지막 빛에 의지하여 검은색 조형물처럼 변하더니 어둠이 더 깊어지자 점점 화려한 불빛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불빛의 그림자가 강물에 반사돼 마치 어둠을 밀어내듯 더욱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었다.
“근데 저기 건너편은 어디니?” 승아가 물었다.
“맨해튼, 여기에서 보아야 한눈에 볼 수 있어. 가까이 가면 너무 크니까.”
승아는 머릿속으로 이 도시에서 남은 시간을 헤아렸다. 이틀은 더 맨해튼을 볼 수 있었다.


저로선 같은 한국인들로만 둘러싸여 살아온 탓에 타지에서의 외로움을 거의 모른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들이었습니다. 전혀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한국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제 스스로가 어느 정도 배려를 해주는 게 맞다는, 서슴없는 고민만 하고 지내왔습니다. 은희경의 <장미의 이름은 장미> 소설집이 들춰낸 사실은 그러한 고민을 북돋워 주진 않습니다. 직접적으로 다가오지 못하던, 절제되고 숨겨있는 이방인으로서의 내막의 불안감을 느껴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엄중한 문체가 오히려 책에 담겨 있습니다. 누군가를 배려하고 이해하려는 보통의 생각 이전에, 배려를 ‘당하는’ 입장이 무엇인지를 느껴보라는 투가 강합니다. 그래서 화자는 타지에 방문한 보통의 한국인들입니다. 한국에 들어와서 살아가는 외국인이 아닌 것이죠. 한국 사람들이 이방인으로서 점찍히는 께름칙한 상황과 멍한 표정들에 대한 묘사, 머무르기보다 잠시 지나치는 곳으로써의 일시적 공간성을 독자들에게 열렬히 확대시켜주는 이야기들이 모여들면서 독자들은 어두운 고독의 이면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굴하지 않고 이겨내는 도전적 모험이 아닌, 그대로 추락하고 현실을 직시하는 이들의 꾸밈없는 솔직함들이 이 책의 무거운 전제이자, 주제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장밋빛을 다시 찾으라는 메시지를 과감히 접습니다. 장미의 이름은 장미. 이 왜곡된 달콤함을 무너뜨리고 그저 처절한 삶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것이 은희경 작가만의 조용한 바람입니다. 들려오는 숱한 이방인들의 여정이 쉽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들어주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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