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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주환 Nov 25. 2021

[버킷리스트] 8. 책임지기, 사랑을

<플라멩코 추는 남자> - 허태연 소설



작가 | 허태연

출간 연도 | 2021 년


수많은 이야기가 거쳐가는 하나의 삶 속에서 결국 남는 것들이 있다.

좋은 향기를 머금은 것들이라면 추억일 테고, 아쉽고 답답한 마음이 곁들 때는 후회라고 일컬어질 것들. 노년을 다녀와 본 적도 없는 필자의 섣부른 이분법일 수도 있겠지만, 글을 정리하면서 접한 ‘남는 것들’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반추는 이를 어느 정도 뒷받침해 준다. 올해 혼불문학상을 수상한 장편소설 <플라멩코 추는 남자>는 소설 속 인물에게 추억과 후회 중, 후자에 좀 더 가까운 숙제를 내어 준다. 수십 년 간 굴착기 운전사로 일하다 퇴직을 맞이한 ‘허남훈’이라는 노년의 주인공에겐 ‘남는 것’이 가슴속 무겁게 자리한다. 했어야 하는데 하지 못했던 일, 그 ‘남는 것’으로부터의 맹랑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은 소설의 적막한 근간이 된다.


남훈 씨(허태연 작가가 이 노년의 인물을 가리킬 때마다 존칭을 쓴다. 작가의 의도를 지레짐작하며 이 글에서도 그대로 존칭을 써야 할 것 같다.)는 중년 나이 한때에 ‘청년일지’를 작성했다. 그만의 버킷리스트다. 방황했던 시기를 끝마치며 각오를 다지는 마음에서 작성한 다짐 노트. 이제는 그만 쌓아야 할 과오를 정리하고 뒤로 남은 후회의 감정을 비치며, 하지 못했던 일들을 써내려 갔더라. 그의 ‘청년일지’는 그 일들을 마무리짓고자 하는 책임감이었다. 41살의 호연지기가 녹아있던 비망록을 노년이 되어서야 다시 꺼내 보는 남훈 씨에겐, 다만 숨어있던 부끄러움이 새어 나오는 기분이다.


그는 그의 어떤 ‘남는 것’을 확인했을까.


‘청년일지’
남은 생애 꼭 이루고픈 목표들을 적어뒀다는 건 분명히 알고 있었다.

‘긍정적이고, 밝은 마음으로?’
슬그머니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은 불쾌감 때문이라기보다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청년일지는 자신에게 부족했던 점, 또는 그간 피하려고 했던 일들로 채워진다.

부끄러움은 아마도 그 점에서 비롯된 감정일 테다. 어떤 일들일까. 먼저 과제 1. ‘남보다 먼저 화내지 않기.’ 남훈 씨는 틈만 나면 주변 사람에게 투덜대고 화를 낸다. 지금 옆에 있는 아내와 딸 선아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는 이 점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안다. 본인의 욱하는 성격이, 옳다고 생각하는 됨됨이와 거리가 멀어 보이는 탓에 첫 번째 과제에서부터 문제시되는데, 벌써부터 겸손한 철학가와 다름없다. 그러고 나서 책 후반부 청년일지의 마지막 7번은 이렇게 서술된다. 보연을 만나 사과하기. 놀랍지만, 남훈 씨의 딸은 앞서 말한 선아뿐만이 아니다. 남훈 씨에겐 보연이라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전처 사이에서 낳은 딸이 있다. 전처소생을 일찍이 떠나보낸 후 다른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남훈 씨는 남다른 이야기가 펼쳐질 큰 계기를 두고 있다.


청년일지의 마지막 과제는 참으로 어렵다. 그렇다 하더라도, 남훈 씨는 이를 불편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오랜 딸 보연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한다. 보연이가 어떤 존재일까, 라는 속마음의 물음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대답은 그저 소중한 딸이라는 것뿐이다. 스페인어 강사, 카를로스의 말을 빌리자면, 남훈 씨는 ‘책임을 다 하려고 하시는 좋은 아버지’로서의 윤곽과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다. 그런 아버지에게 남는 것이란 더욱 숭고해지는 책임감이다.


아버님은 책임을 다하려고 하시는 거야. 세상에는 그러지 않는 아버지들도 많아. 선아 아버지는 좋은 분이야.

 



조금만 되짚어 보면, 그가 퇴직 후 목욕재계를 하고 생소한 스페인 문화를 배우려고 한 것은 같은 이유에서라고 생각이 든다.

소설의 초두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저 아버지로서의 진실되고 정돈된 사랑을 보여 주려는 마음 한 가지에서 청년일지를 다시 살피는 모습이 역력하다.


과제 2. 청결하고 근사한 노인 되기. 낡은 속옷은 몽땅 버릴 것. 멋지고 깔끔한 새것으로 구입한다. 그다음 백화점에서 명품 정장을 살 것!

과제 3. 외국어 배우고 해외여행 하기.

과제 4. 건강한 체력 기르기.


남훈 씨는 무언가를 딸에게 표현하고 싶다. 미안하고, 용서를 받고, 다시 아버지로서 선택받기를 원하는 단어들. 자신의 진심을 가장 솔직하게, 두루뭉술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 그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인 문장을 형성할 수 있는 언어를 배우고자 ‘주어-동사-목적어’ 순으로 구조가 형성된 스페인어를 선택한다. 처음에는 동사부터 나오는, 몇 안되는 언어 중에서 선택하려고 하지만 그중 아일랜드어와 아랍어는 그의 정감과는 거리가 멀다 한다. 그렇게 남훈 씨는 딸에게 말끝을 흐리지 않을 적절한 표현 수단을 찾아낸다.


또 한 가지의 수단은 스페인의 전통 춤곡, 바로 플라멩코다. 속도감 있는 스텝과 박자, 유연한 손동작을 요구하는 플라멩코는 ‘타지를 떠돌며 살고 사랑한 집시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플라멩코를 출 때 가장 중요한 명목은 ‘사랑’이고, 우리의 남훈 씨는 바로 그 요점을 가지고서 딸에 대한 마음을 소화해 내기로 한다. 배우고 싶은 외국어는 스페인어, 가고 싶은 여행지로는 스페인, 건강한 체력은 플라멩코로. 이제야 그는 몇 가지 청년일지 과제들을 지켜나갈 수 있게 된다. 한 발짝 한 발짝 옮겨가는 발걸음엔 설렘과 동시에 초조함이 묻어나고, 독자는 차분하되 도전적인 그 모습을 편안히 읽어낸다.


카를로스는 빠른 손놀림으로 프레젠테이션 슬라이드를 넘겨 플라멩코를 추는 남녀의 사진을 보여줬다.
‘그래 저거다.’
남훈 씨는 자기가 맞춤 양복점에 무엇을 두고 왔는지 그 순간 깨달았다.
‘춤이라도 출 수 있게 해 드리지요’
두고 온 것은 바로 재단사의 이 말이었다.




“새로운 언어 형식이 새로운 관계를 만듭니다.”

스페인어 강사 카를로스의 한 줄 대사는 뭉툭한 손끝으로 등을 두드려 주는 것만 같다. 언어를 배우다 보면 조금씩 걱정이 덜어지는 느낌이 들 것이라는, 여린 한 줄을 읊는다. 남훈 씨에겐 그 어떤 말보다도 위로의 것이다. 몇십 년 만에 문득 찾아간 보연은 냉대한 태도를 비추지만, 이내 아버지가 부재했던 평생에서 마지막의 기회를 줍는다는 생각으로 남훈 씨와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남훈 씨는 어영부영한다거나 미지근한 반응을 절대 보이지 않는다. 주어와 동사를 앞에 두는 스페인어를 미리 배운 덕분이다. 조금의 설렘과, 조금의 부담을 가슴 위 얹혀놓고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처의 흉을 절대 보지 않는다. 서서히, 좋은 아버지이고 싶었던 자신을 보여 주기 시작한다.


소설의 후반부는 스페인에서의 짧은 여행을 담는다. 오랫동안 해외여행을 소망했던 남훈 씨는 딸 보연이와 함께한다. 젊은 날의 잃어버린 유흥을 찾는 도피처가 아닌, 부족했던 용기와 책임감을 원래 있던 곳으로 데려오기 위한 안식처, 그곳은 기나긴 날들 동안 연습했던 플라멩코의 나라다. 플라멩코는 사랑을 담았다 했다. 상대와 맞잡은 손과 지긋이 바라보는 눈빛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끈은 오랜 시간 동안 플라멩코가 이어져 오도록 사랑의 역사를 쌓아왔다. 플라멩코의 춤사위 안에는 남훈 씨의 눈빛과, 시간과, 사랑이 담긴다. 여행 마지막 밤, 칸타오라(cantaora, 플라멩코를 부르는 여성 가수)의 음색은 플라멩코를 추는 한 남자의 춥지 않은 여정을 깊게 밝혀 준다.


관계를 다시 짚는 과정을 그린 소설 이야기 속에서는, 용서와 반성을 매개로 서서히 돌이켜 가는 편안함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남훈 씨는 청년일지로 인색했던 지난날을 반성한다. 스페인어와 플라멩코는 숨어있는 진심을 드러내 주는 괜찮은 방법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보연은 떠나갔던 아버지의 선택을 용서한다. 이 모든 맥락에서, 서로를 온전히 편안한 눈빛으로 바라볼 수 있는 소설 마지막의 두 사람이 결코 단순한 과정을 건너온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청년일지의 과제들을 부단히 실천하며 공들인 시간은 무척이나 길고 초조했던 것과 동시에, 서로에게 허락된 마음의 공간은 그만큼 깊고 멀었다. 새로운 관계는 그렇게 오래 만들어진 결과물이자, 서로에게 책임껏 몰입한 사랑의 어느 한가운데를 이룬다.



 

소설의 이야기는 끝이 나지만, 남훈 씨와 보연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그의 청년일지에는 이런 과제도 있다. 과제 5. 죽은 다음 어디에 묻힐지 결정 해 둘 것. 과제 6. 자서전 쓰기. 남훈 씨는 과거의 이야기에만 몰두하지 않는다. 새로운 관계를 새롭게 읽는 법을 찾고자 한다. 곧 다가올 죽음을 이야기하고, 죽음 앞에서 준비해 두어야 할 것을 이야기한다. 미처 가르쳐 주지 못한 부모로서의 지혜와 조언들, 한평생이 짙게 묻어나는 발걸음들의 여정을 꼭 남은 딸들에게 전해 주고자 한다. 갸륵하고 굳건한 그의 또 다른 다짐이 정신적으로 딸들에게 물려받아지길 간절히 원한다.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남훈 씨는 자서전을 집필하는 데에 몰두한다. 인생의 일순간들을 남기려는 기록의 욕구보다는 그간 해주지 못했던 사랑과 책임의 표시로 글을 적어 둔다. 그동안 알려 주지 못한 기나긴 아버지의 일생에서 짧은 한 마디라도 거두어 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윽고 남훈 씨는 청년일지에 한 가지를 더 써 두기로 한다. 과제 8. 한 달에 한 번은 꼭 보연을 볼 것.


남훈 씨와 보연 두 사람의 관계는 서로에 대한 오랜 부재 끝에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 변화는 잠잠하면서도 긴장감 서린 서사 위에 드러나며, 나로 하여금 더욱 이 관계에 몰두하게 공든다. 선물 같은 딸아이 선아와, 남편의 비밀을 줄곧 모른 체했던 아내의 이야기를 무심코 제쳐두면서까지 감상문을 남훈 씨와 보연 두 사람 위주로 적어 낸 변명 하나를 콕 박아 둔다.


‘Te quiero, hija mía. (사랑한다, 내 딸.)’

‘Yo también, papá. (나도요, 아빠.)’

‘어떻게, 스페인어를?’
‘배우기 시작했어. 아빠의 언어를.’

‘누가 그랬는데 새로운 언어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준단다 앞으로 좋은 일이 생길 거야 네 삶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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