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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율립 Mar 31. 2019

<라스트 미션> 자유의 세 가지 적들



아주 적절한 번역 제목이면서도 미감적으론 아쉬운 제목.



클린트 이스트우드 Clint Eastwood


"남자", "미국인", "영화배우", "히어로", "노인".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설명하는 수식들이다.


그는 남자다. 그가 살아온 시대에서 사회적으로 부여된 책임감을 수행하고, 낮이나 밤이나 여자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생명의 정신을 실천하는 작은 몸이다. 


그는 미국인이다. 자유와 기본권을 숭상하고, 사적 재산과 평화를 깨려는 악당들에 적극 대응한다.


그는 영화배우다. 영화란 인생의 강렬한 한 부분이다. 그의 몸짓과 대사, 표정이 그 대목의 중력을 키운다.


그는 히어로다. 신체를 앞세워 적보다 한 발 멀리 뛰어다녔고, 심장을 앞세워 적보다 촌각을 앞선 판단을 내렸고, 정신을 앞세워 관용과 공동체 정신을 수호했다.


그는 노인이다. 노인은 시들어가는 꽃이 아니라, 절정의 철학인의 표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고별작이 될 수 있는 영화 <라스트 미션>을 관람했다. 극장을 가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지만, 그 날은 특별히 취미에 헌정 행위가 더해졌다. 




영화는 우리의 영원한 과실이며 골칫덩이인 '자유'와 '자유의 적들'에 대해 얘기한다.



영웅의 골격은 지지 않는다.



자유의 첫 번째 적 - '가족'


가족은 생명이자 기쁨이고 삶의 목표이다. 그러나 행복을 보장해주는 만능은 아니다. 우리 삶에 그러한 마법은 없다. 가족은 나의 자유를 빼앗는다. 일하여 번 돈을 나눠야 하고, 여가 시간을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과 함께 보내는 시간으로 쪼개야 한다. 가족은 나의 자유를 지불하여 누리는 것이다.


가족과 자유, 이 둘은 이산적이지 않고 연속적이다. 우리는 저들 사이의 광활한 스펙트럼 위의 어느 한 점을 선택하여 취한다. 선택의 폭이 넓어진 대신에 엄청난 오해의 가능성이 생겼다. 나는 60%만큼의 자유를 원하고 상대는 30%만큼의 자유를 원하는데, 서로 스펙트럼 상 같은 지점에 있다 오인하고 결혼하는 커플들이 부지기수다. 그리고 여기서 크고 작은 문제들이 시작된다. 가족과 자유의 선택이 이진법의 지배를 받아 한 가지만 골라야 하는 거라면 이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는 컴퓨터가 아니고 사람인 것을. 자유롭게 연인을 만나고도 싸우는 게 피할 수 없는 숙명인 이유다. 유일한 해결책은 소통이고 진실함일 것이다.


얼 스톤은 자유를 위해 가족을 버린다. 그리고 그 대가를 치르고 후회한다.


"내 스펙트럼상 위치는 여기야."




자유의 두 번째 적 - '빈곤'


자유를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 돈은 세상의 대부분 가치를 환원하여 저장한 곳이다. 돈은 물질일 뿐 아니라 장소이다. 돈이 있으면 골프장, 보라카이 해변, 할리우드가 내려다보이는 대저택 등지에 갈 수 있다. 인생의 목적은 잘 사는 것이고, 잘 산다는 것을 끊임없이 전방위에서 밀려오는 시간과 공간 사이에서 유려하게 서핑을 하는 것이다. 시간은 나를 발전시키고, 공간은 나를 행복하게 한다. 지리산의 절경도 공간이고, 연인의 아름다운 얼굴과 아이의 튼튼한 두 다리도 공간이다. 공간은 이렇게 삶의 기초를 이루고 돈이 훌륭한 공간을 어느 정도 보장해준다. 돈은 그래서 소중하다.


얼 스톤은 인터넷을 무시한 대가로 돈을 잃게 되고 자유를 잃는다. 그런 그가 인생에서 뒤로 미뤄놨던 숙제들을 처리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돈의 힘이었다. 노인은 갱단들에게 호기롭게 맞서며 "누구도 이 트럭을 건들 수 없다."라고 말하지만, 어마어마한 돈을 손에 쥐게 되고는 바로 삐까뻔적한 링컨 트럭을 샀다. 성공한 원예업자로 커뮤니티에서 인정받던 얼 스톤은 경제적 고난에 빠지고 떠돌이 신세가 된다. 그러나 베테랑 회관을 리모델링해주며 십 년 전처럼 커뮤니티 파티의 주인공이 된다. 


얼 스톤은 돈을 어렵게 벌다 미끄러졌고, 이제 쉽게 벌고 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도덕심을 소진했다. 베테랑 회관의 파티에서 그의 얼굴에 마음 한편에 있는 씁쓸함이 묻어 나온다.


4차 산업을 무시해선 안된다는 교훈을 주는 얼 스톤.



자유의 세 번째 적 - '법'


법은 사회적 약속이다. 그러나 약속은 절충이고 협상이니 내 마음에 맞지 않음을 의미한다. 단 둘이 여행을 떠나더라도 수 십 수 백가지 갈등이 생겨난다. 그중에 대부분은 양보를 통해 합의가 되지만, 몇 개는 실패하고 싸움으로 번진다. 두 명의 협상도 이러니, 수 천만 수 억 명이 있는 사회의 법이 내 마음에 꼭 들리 없다. 그러나 법은 고정된 깃대이고 사람은 거기에 매달린 깃발이다. 부여잡고 버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분리되어 사회에서 격리되거나 추방된다. 법은 자유를 평생 괴롭히는 존재이다. 법은 그럼에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임이기 때문이다.


얼 스톤은 노년에 마약 운반이라는 중죄를 지으며 법을 어긴다. 사실 영화에서 관객이 한껏 감정 이입한 주인공이 법규를 어기는 것은 불편한 상황을 만든다. 관객의 도덕감을 콕콕 찌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인이나 절도 같은 범죄를 저질러도 그럴만한 인간적인 동기가 있다면 불편함은 곧 사라지고 계속하여 주인공을 응원하게 된다. 사회의 법정에서 불가능한 일이지만, 개인의 법정에선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법이 정말 골치 아픈, 자유의 적이라는 방증이다. 남한과 북한의 행사라면 한국어를 쓰고 어휘 조정을 마치면 되지만, 국제 행사에서 모두 귀에 거추장스럽게 이어폰을 꼽고 있지 않던가. 


*스포주의



영화는 얼스톤에게 정말 타당한 범죄의 정당한 동기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션스 일레븐>처럼 멋진 출구전략을 통해 빠져나가게 하거나, <쓰리 빌보드>처럼 열린 결말로 들어가게 하지 않는다. 대신 그를 수갑 채우고 법정에 세운다. 관객을 감정 이입시킨 주인공이 범죄에 연루되는 영화에서 이렇게 현실의 순리대로 흘러가게 한 영화가 있었던가?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했다. 끝까지 리얼리즘이었다. 얼 스톤은 모든 죄를 인정하고 감옥에 간다. 법정에서 최후 진술하는 부분에서 나는 전율했다.(울었다.)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포용의 정신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래, 감옥도 사회의 한 부분이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감옥까지도 사회로 영화로 포섭을 시도한다. 이 부분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관객의 몫이다. 


감옥에 응당히 수감되어 밭을 일구며 평온한 얼 스톤을 보며 내 마음도 평온해진 것은, 주인공이 인생의 황혼기에 있는 노인이라는 얄팍한 정당화에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는 이론이나 선전이 아니다. 설령 법을 어기고 감옥에 가는 이야기더라도 주제의식에 따라 찍을 수 있는 것이 영화이다. 영화라는 매체는 수렴이 아니라 발산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라스트 미션>은 영화사에 분명 의미를 남겼다.

미국 공권력의 능력 양극화가 심하다. 브래들리 쿠퍼였음 표정 보고 바로 잡았다.






*스포해제




<라스트 미션>은 표면적으로 가족의 소중함을 얘기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본의는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족이 소중함에도 개인의 자유를 즐긴 노인이 포기했던 것에 대한 소회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얼 스톤은 분명 다시 태어나도 같은 삶을 택했을 것이다. 






사족: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브래들리 쿠퍼를 자신의 후계자로, 영화적 아들로 점찍은듯하다. 










인생에서 저버린 것을 뒤늦게 갖기 위한 마지막 미션.

<라스트 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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