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발견하는 6주간의 드로잉 여정 끝에서
나른한 토요일 오후, 직장인들에겐 꿀맛같은 휴일이지만, 오로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시간을 내는 사람들이 있다. 향유고래에서 개설한 첫 모임이자, 빠른 시간대에 마감한 타뷸라 라사 모임의 참여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 모임에서 참여자들은 6번의 모임 동안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그림으로 표출하고, 이를 함께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모임의 이름인 tabula rāsa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백지)가 의미하듯, 타인의 평가와 선입견이 배제된, 낯선 관점에서의 ‘나'를 인식하고 그리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전자기기 타이핑이 익숙한 시대에, 참여자들은 손으로 직접 그림을 그리며 화구와 재료의 촉감을 느끼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6주 간의 여정을 마무리짓는 마지막 모임은 향유고래의 새로운 연남동 창작공간에서 이루어졌다. 6번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동안 참여자들의 엄청난 열정을 엿볼 수 있었다. 오로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부산, 남양주, 대전 등등 먼 곳에서 오시는 분들도 많았다. 이들은 마지막 모임에서도 그림에 대한 집중력을 잃지 않고 진지한 자세로 창작에 임했다. 오늘 포스팅에서는 모임을 진행한 펑크마녀와 더불어, 모임에 참여했던 분들에게 전해들은 소감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아래는 펑크마녀와의 인터뷰
모임을 성공적으로 마친 소감이 궁금하다
즐거웠다. 나만 즐거웠나 싶을 정도로 즐거웠다. 다음 모임에서는 마지막 모임공간에서 더 자유롭게 진행하고 싶다
매 회별로 모임을 할 때마다, 어떤 점에 중점을 두고 준비 했는가?
그림 클래스는 워낙 많으니까, 그냥 혼자 있어도 하기 힘들고 그림 클래스 가서도 하기 힘든 그런걸 해보고 싶었다. 그림 모임인데 처음 한 두세번 정도는 그림 보다 글을 쓴다거나 설문지를 작성한다거나 그런쪽에 중점을 두었고, 평소의 나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은 나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고 싶었다 (평소에 자신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 부족하니)
결국 자화상을 그리는 모임이니까 꼭 내 얼굴이 아니라 내면같은 걸 그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에 대해 써보기, 사소한 설문이지만 모아보면 내자신을 알수있을 법한 질문들 답하기 등등을 스스로 해보기도하고 서로 공유하기도 했다. 다들 어릴 때 이후론 이런걸 해본 적이 없을테니. 유아미술교육학 서적들을 참고하기도 했고, 테크닉 신경 안쓰고 자유롭게 그리도록 유도했다. 그리기 보다 표현에 중점을 두고, 원시적인 것들 - 찢기, 막 칠하기, 종이접기 - 을 시켰다. 오랫동안 잊고있었던 것에 대한 작업을 해보셨으면 했고, 그런 의도 덕분에 색종이접기의 즐거움같은 새로운 재미를 깨달은 사람도 있었다. 아크릴 물감도 처음엔 아무도 하지 않으려했다. 그런데 캔버스를 가져와서 그리게 했더니 종이에 그리는 거보다 재밌어하면서, 그다음부터 다들 아크릴을 쓰기 시작했다. 새로운 재료에 대한 심리적인 장벽을 없앤 것 같아 뿌듯했다
막상 모임을 하고나서 발생한, 모임 전에 예상하지 못했던 점이 있었다면?
모든게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웃음) 생각보다 다들 그림을 너무 잘 그려서 놀랐다. 생각해보면 애기 때 다 그렸을텐데….다들 그런 원초적 감각이 있으면서 ‘난 못그려’라고 하지 않았나 싶다. 누구나 그림을 그리던 시절이 있있던 시절이 있었음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감정을 표현하는 책을 만드는 시간에 샘플을 만들어갔고, 샘플을 보여드린 후 작업을 시켰다. 내가 형체 없는 걸 샘플로 그려갔더니 (원래는 얼굴표정을 그리는건데), 다른분들도 다 그렇게 했다. 샘플이 무엇인가가 영향이 있었다.
가장 힘들었던 점이나 보람을 느꼈던 점은?
낯선사람과 얘기를 잘 못하는 편이고, 수줍음이 많은데, 처음에 거기서 인사하는 시간이 힘들었다. 두 번 정도 까지는 심장이 빠르게 뛰어서 반 공황상태였다. 그 다음부터는 친해지고, 뒤로가면서 괜찮아졌다. 보람은 재밌다고 해주셨을 때. 그림이 너무 재밌다고 한다든지, 이번 모임이 더 재밌었어요 라고 했다든지, 감정표현이 없는 분들인데, 가끔 물어보지도 않는데 대답해주실 때 보람을 느낀다. 옆에 가서 물어보면 여기서 그림그리는게 너무 좋다고 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 있다면?
하나하나 다 기억난다. 이렇게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어서 흥미로웠다. 여러 나이대, 여러 직업, 여러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여서 이를 관찰하는 자체가 재밌었다.
모임이 개인 창작활동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제가 그리는 그림도 결국 일을 위한 작업인데, 그런 생각 안하고 하는게 되게 오랜만이었다. 전시를 위해, 책 만들기 위해, 웹툰 만들기 위해 그리는 그림이 아닌 아무렇게나 그리는 그림이 되게 오랜만이었고, 그게 굉장히 즐거웠다.
수업에서 진행되는 창작 메커니즘이 있다면?
텍스트가 모든 창작활동의 시작점이다. 이 그림이 완성되기 전까지 텍스트를 보면서 그림을 그리는, 일종의 초기 구상이다. 다들 텍스트를 써봤으면 좋겠다 생각했고, 그러다가 어느 시점부턴 점점 그림의 비중을 높였다. 방향을 알려주고, 뒤에서 처음에 탁 밀었을 뿐인데, 그 다음부터는 알아서 잘 그리더라.
아오이 유우가 시각장애인으로 나오는 영화가 있는데, 영화를 찍기 전에 실제 눈이 안보이는 소녀를 만났다고 한다. 거기서 찍으시는 분이 ‘눈이 안보이는 소녀를 만나서 연기를 하면 변화가 있나요?’ 라고 했더니, 변화는 없을거지만 자신감이 있을거라고 했다. 인터뷰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인터뷰 내용을 기반으로 수업을 구성했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준비가 결과물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지만 마음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깨닫고, 그것에 중점을 둔 것이다.
참여자들은 설문을 왜 했는지 모를수도 있다. 그러나 아오이 유우가 말했던 마음의 세팅같은, 마음의 변화가 있으면 하는 생각으로 준비했다. 그 이후로는 사람들이 알아서 진행하게 되었다. ‘우리 오늘 뭐해요?’라는 시간이 생길까봐 걱정했는데, 오히려 오늘 너무 뭘 많이해서 힘들다고 하는 분들이 있었다. 자유롭게 그리라고 할 때, 안 그리고 생각만 하는 분들도 있었다. 빡빡하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부산에서 오셨었는데, 사정이 생겨 더 이상 못오신 분이 있다. 흰종이에 그림을 그렸는데, 흰 바탕색을 칠하셨다. 이미 하얀데 왜 하얀색을 칠했을까 궁금했는데, 그 다음부터 오시지 않아서 알 수 없게되었다. 사진으로 찍으면 안나오는데, 눈으로 보면 종이가 울어있다. 물감이 얹어져있는게 느껴진다. 그분 자체가 되게 철학적인 느낌이 강했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분이었고, 원래 제 웹툰을 좋아하시는 분이라고 하셨다.
다음 모임에 대한 계획이 있나
저같은 경우는 원데이 클래스, 1대1클래스 같이 짧고 간소하게 했으면 하는 생각이 있다
모임에 참여한 분들 역시 처음에는 ‘이 모임이 괜찮을까?’라는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끝까지 열정을 발휘하며 마지막 모임까지 성실하게 참여하셨다. 벌써 모임이 끝나냐며 아쉬워하시는 분들도 있었다. 아래는 일부 참여자 분들의 인터뷰이다
모임을 끝까지 수강한 소감이 궁금하다
“처음 생각했던것과 달랐다. 그림만 그린다 생각했는데 첫 시간에 설문조사 한것도 그렇고, 커리큘럼이 나름대로 갖춰져있어 자기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자화상을 그릴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림 모임으로만 읽고 들어와서 그리는 모습만을 상상했던 것 같다. 첫날부터 둘러앉아 서로를 그려주고, 주제도 자기를 알아가는 것들을 하게돼서 예상밖의 일이긴 했으나 그게 또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표현하는 방법을 여러가지 배우고, 자기자신을 표현하는 시간을 가진 후 작품 구상을 하는 컨셉은 본적 없는 수업이어서 좋았다”
“자화상이라는 큰 주제는 있었는데, 종이도 오리고 형태도 명확하지 않고 지정된 것 없이 자유롭게 자기 스스로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훨씬 더 좋았다. 정해진 방향대로 흘러가는 것 보다 나았다"
모임에 참여하기 전과 후에 어떤 것이 달라졌는가?
“그림 그리는 시간이 늘어난 것 같다. 그림은 그리고 싶을 때만 그렸는데, 생각만 하지 막상 그리는 시간이 적었다. 전시 덕분에 꾸준히 그릴 수 있어서 좋았다”
가장 인상깊게 그린 그림이 있다면?
“서로의 자화상 그려주기. (대부분 그렇게 생각) 책자로 된 것"
“감정 그리기. 단어 몇개 주시고 (슬픔, 분노, 기쁨) 그거에 대한 감정을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것"
모임을 통해 발견한 나 자신의 새로운 모습이 있는가?
“분노!!!(웃음) 내 자신이 이렇게 분노할 줄은 몰랐다. 그리면서 희열을 느끼고 힐링이 되었다. 물감을 뿌리고 긁으면서 스트레스가 풀렸다”
“잃어버리고 있었던 가장 좋아하는 것을 찾은 느낌이다. 요리 전공이었는데 현재 요리를 안하다보니 무미건조하게 살았는데, 이렇게 모임에 오니 너무 기분이 좋았다”
“내가 되게 특징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펑크마녀님이 모아주신 것을 보니 다른분들이 그려준 제 모습이라든지 그간 그린 그림들이 하나의 특징이 있다는걸 느꼈다.”
모임을 통해 느낀 창작의 고뇌 같은게 있는가
“처음엔 감이 안 잡혔다. 주제가 없다보니, 자유롭게 정해야 되니까 감이 안 잡혀서 헤맸다. 한 번 정해지니 더 재밌어지긴 했지만”
“뭘 그려라 라고 했으면 그걸 그렸을텐데 정작 내가 뭘 좋아하는지를 몰랐던 것 같다. 빵을 좋아하는데 그걸 잘 표현할 수 있는 재료를 찾다보니 오일파스텔에 빠지게 되었다"
모임 이후에 미술분야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였는가?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그림을 지속적으로 그리게 되었다. 고등학교 수업 이후 처음으로”
“예전이었으면 안 가봤을 법한 전시회에 좀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사람 얼굴 전시회에 관심이 없었는데, 자화상을 그리고 나니 궁금해져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모임을 진행한 펑크마녀님에 대한 소감
“실제로 보니 귀여우셨다. 만화로만 봐서 매치가 안됐다. 블로그도 보기는 했는데 어떤 성격인지는 알 수 없었는데 직접 보니 너무 귀여우시더라"
“처음에 수업을 리드하시는 분이셔서, 선생님의 딱딱한 이미지를 생각했는데, 되게 자유롭게 풀어주셔서 더 좋았다”
훈훈한 인터뷰와 함께 타뷸라 라사의 6주간의 여정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타뷸라 라사 모임 작품의 전시회는 6월29일 토요일 오후 3시 연남동 향유고래의 집(마포구 성미산로 17길 112 1층 - 아래 지도 참조)에서 약 일주일동안 상설 진행될 것이며, 새로운 타뷸라 라사 모임은 전시회가 끝난 후 개설될 예정이다. 향유고래는 앞으로 연남동을 기반으로, 다양한 모임들을 개설할 예정이다. 문화예술 모임에 관심이 많은 분들의 다양한 니즈를 충족시킬 수 있는 수업들로 여러분을 찾아뵙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