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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epitup Apr 25. 2023

나를 지켜줄 단단한 세계

일의 바운더리 밖에서 자존감을 지키는 것들을 만들기

퇴사가 결정된 후 많은 사람들에게 '쉬는 동안 뭘 하고 싶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다. 거창한 계획이 딱히 없다는 대답에 평소 취미가 뭔지 물어봐주는 분이 있었다.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고 '그러게, 내 취미가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개발자로 커리어 전향한 후에는 쉬는 시간에 일에 대한 공부 외에 다른 것을 하는 것은 사치라고(그렇다고 공부를 엄청나게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면서) 생각했다. 일을 할수록 컴퓨터 공학 기초 지식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열등감에서 비롯된 생각이었다. 그 결과 개발자로 일한 4년 동안, 나는 일과 나를 분리해 줄 그 어떤 취미도 갖지 않았다.


살면서 가져봤던 취미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대학생 때는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찾아 쿠키를 굽고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는 취미가 있었다. 꾸준히 다시 시작했고, 또 꾸준히 그만두기도 했지만 블로그를 열심히 한 적도 있었다. 대학교 전공 특성상 디자인 툴과 영상 편집 툴을 끼적거렸던(?) 경험이 있어 유튜브도 도전했다가 빠르게 포기했던 전적도 있다. 그리고 첫 직장을 다닐 때는 가죽을 좋아하고,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도 좋아해서 가죽공예를 배워보기도 했다. 나름 재밌게 공방을 다녔던 기억이 있지만, 커리어 전향을 위한 데이터 사이언스 부트캠프에 등록하면서 그 취미도 빠르게 잊혔다.


그리고 퇴사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어느 공방의 가죽공예 제품들을 보게 됐다. 가죽공예를 그만두고 나서 다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희한하게도 '지금이 다시 제대로 해볼 수 있는 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충동적으로 공방에 정규 클래스 수강을 등록했고, 가죽공예를 다시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디자인을 그리고, 패턴을 만들고, 재단하고, 제작하고. 예전에 다녔던 공방과는 여러모로 정반대 스타일의 공방이었지만, 나에게 더 잘 맞았는지 이번에는 훨씬 더 재밌었다.


초기 작업대 풍경

집에서도 취미를 지속할 수 있도록 다시 도구들을 사들이고, 공방에서 배웠던 것들을 응용해서 계속 제품을 만들어봤다. 깔끔한 재단, 스티치의 완성도, 단면의 마감 등 잘하고 싶어서 욕심나는 부분이 많았다. 가죽공예 제품 사진들을 찾아보며 내 것과 비교하고, 더 잘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았다. 그러다 보니 실력이 쑥쑥 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 시절의 나는 취미 생활과 더불어 컴퓨터 공학 기초 공부도 꾸준히 하고 있었는데, 알고리즘 문제가 안 풀려서 '나는 진짜 똥멍청이인가 봐...'라는 자책을 하다가도 가죽공예를 할 때마다 느껴지는 성취감으로 자존감을 끌어올렸다.


아, 회사에서 일을 할 때만 얻을 수 있던 성취감을 회사 밖에서도 얻을 수 있다니. 남들보다 잘하는 것이 있다는 것, 계속 잘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이 자존감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는지. 그리고 그런 것들을 삶 속에 가능한 다양하게 심어놔야 나의 세계가 단단해질 수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항상 모든 일이 잘 풀릴 수는 없다. 오늘 잘 풀리던 문제도, 내일은 안 풀릴 수 있다. 회사를 다니던 시절 그럴 때마다 나는 자존감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개발자를 하는 것이 맞나?'

'동료들한테 피해만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 연차에 이런 것도 모르는 게 맞는 걸까?'


일을 좋아했던 만큼, 일에서 성장이 없다고 느낄 때마다 괴로워했다. 일로만 가득 찬 나의 세계가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그럴 때 내가 떨어진 자존감을 올릴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면, 내 세계가 더 단단해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취미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수단이 된다. 누군가는 달리기를 하기도, 누군가는 춤을 추기도, 누군가는 요리를, 사진을, 뜨개질을 하기도 한다.

회사를 다닐 때 이런 사실을 몰랐다는 것은 약간 안타깝지만, 지금이라도 알게 되었으니 나는 남은 인생을 더 건강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쉽게 무너지지 않는 나의 단단한 세계를 만들면서.


혹시 일이 당신을 힘들게 한다면, 재능이 없는 것 같고, 성장에 정체기가 온 것 같아 자존감이 떨어진다면, 성취감을 느끼게 해 줄 취미를 가져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취미를 통해 올라간 자존감은 다시 일에서도 더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줄 것이다. 모두의 단단한 세계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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