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런데 아무런 계획 없이 회사를 나오면 어떻게 되나요?
대학교를 10학기나 다니며 취득한 두 개의 전공과는 전혀 무관한, ‘개발자’라는 직무로 일한 지 만 4년을 앞둔 달이었다. 3년 근속 포상으로 2주간 리프레시 휴가를 다녀온 직후이기도 했다. 그즈음의 나는 ‘어제보다 오늘 더 성장하자’라는 커리어 모토가 더 이상 긍정적인 자극이 아닌 중압감으로 다가와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함으로 새벽 세네시까지 잠을 자지 못하기도 하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40살에 은퇴하는 파이어족이 되어야 하니, 지금 불행한 것을 조금 참으면 나중에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으로 꾸역꾸역 하루하루를 버티며 일하고 있었다.
그 당시 개발팀에서는 2주마다 팀의 목표 업무들을 정하고, 개개인이 원하는 업무를 맡아 처리하고, 개인과 팀의 성과를 회고하는 ‘스프린트’ 방식으로 업무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아침은 어제 맡은 업무를 다 처리해 남은 업무 리스트에서 내가 하고 싶은 업무를 새로 가져가야 했다. 일의 난이도에 따라 포인트가 매겨져 있는 태스크들, 그리고 저번 스프린트에서 처리하지 못한 태스크까지 산더미같이 쌓여있는 칸반보드. 매우 익숙한 상황이었지만 화면을 바라보는 나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더 이상 나는 아무런 태스크도 처리할 수 없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결국 그날, 팀에서 가장 긴 근속일자를 갖고 있었고 팀 매니저로부터 과분한 신뢰를 받고 있던 나는, 늘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차분한 목소리로 퇴사를 선언했다. 이유는 연봉에 대한 불만도, 업무 강도에 대한 스트레스도, 사람에 대한 고난도 아니었다.
나에겐 그저 ‘휴식’이 간절했다. 쓸데없이 강한 책임감, 실수를 용서하지 못하는 완벽주의적인 성향, 커리어 전향 후 비전공자 개발자로 일하며 느낀 열등감 등 성장의 동력이 되었던 것들은 결국 나를 번아웃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C레벨 면담을 가니, 몇 개월 간 휴직을 해보는 건 어떻겠냐 권유해 주셨다. 진단을 받을 수 있는 병이 있는 것도 아닌데(아, 사실 추적 관찰이 필요한 난소 혹이 발견된 것도 퇴사 트리거 중 하나이긴 했다.) 퇴사를 막기 위해 휴직을 권유해 주신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순간적으로 혹해서 며칠 생각해 보겠다 했다. 하지만 면담이 끝난 후 30분이 지나지 않아 결정을 내렸다.
나의 번아웃은 휴직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퇴근 후 저녁 시간에는 내일 다시 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고, 주말에는 월요일이 돌아오는 것이 두려웠고, 휴가 기간에는 휴가가 끝난 후의 업무 복귀가 생각나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돌아갈 직장이 있다는 사실이 나에겐 되려 쉴 수 없는 요인이었다.
그렇게 나의 퇴사는 일주일 만에 확정되었다.
4년이라는 근속기간은 대기업을 다니는 사람들에겐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내가 다니던 스타트업에서는 소위 ‘고인 물’이 되어가는 연차를 의미하기도 했다. 자연스레 많은 사람들이 나의 퇴사에 관심을 가졌다. 당연히 첫 번째 질문은 ‘퇴사 이유’였고, 둘째는 ’다음 행선지‘였다. 친했던 동료들에게 퇴사 소식을 알리며 매번 같은 대답을 하는 것에 지쳐서 FAQ라도 제공하는 게 맞지 않나라는 생각도 잠시 했던 것 같다. 대충 아래와 같이...
Q: 왜 퇴사하세요?
A: 번아웃에 시달린 지가 오래됐는데, 회복이 안되네요. 너무 지쳐서 잠시 쉬었다 가려고요.
Q: 아, 다른 회사로 가시기 전에 쉬시는 건가요?
A: 아뇨, 다음 직장은 정해지지 않았어요. 그냥 당분간은 쉬면서 몸도 단련하고, 공부도 하며 지내려고 해요.
Q: 예? 다른 계획이 따로 없으세요? 여행이라던가, 유학이라던가 그런 게 아니고요?
A: 아... 네... 뭐 그냥... 하고 싶었던 것 하며... 지내려고요... (근데 내가 하고 싶은 게 뭐였더라?)
사실 퇴사를 결심하기 한 달 전즈음, 따끈했던 신간인 김진영 작가님의 ‘우리는 아직 무엇이든 될 수 있다’라는 책을 읽었었다. 지금 당장 지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일을 쉬면서 삶의 방향을 찾는 ‘갭이어’를 갖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말에 많은 위로를 받았고,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결국엔 나도 갭이어를 위한 퇴사를 선택하게 되었으니 주변 사람들에게 그런 취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의 생각이 나와 같을 수는 없지. 거의 반반으로 나뉘어 나의 선택을 있는 그대로 응원하거나, 의아함을 가지며 퇴사를 만류했다.
걱정 어린 조언을 들을 때마다 ‘뚜렷한 계획이나 목표 없이 퇴사를 하는 것이 내 인생에 안 좋은 결정일까?’하는 의문이 한 번도 들지 않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나에게 퇴사가 필요한 이유가 명확했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 돌아갈 수 없다던가 하는, 혹시 모를 미래가 걱정되어 지금 계속 불행함을 느끼는 것은 결국 나를 더 심각한 우울의 늪으로 빠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렇게 퇴사한 지 10개월이 흘렀다. 일단 살고 보자며 계획 없이 퇴사했던 평범한 사람이 어떤 시간들을 보냈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떤 삶의 방향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기록하려고 한다. 퇴사를 결정하게 된(혹은 하려는) 이유, 재정 상태, 가지고 있는 스킬, 재능, 성격, 환경은 모두 다르겠지만, ‘별다른 계획 없이 퇴사를 해도 큰일이 나지 않는구나, 오히려 그게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었구나’ 하는 위로를 줄 수 있는 콘텐츠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