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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지유 Jun 22. 2020

그림으로 평가받는 학교생활이란

외국인 신입생이 처음 겪어보는 세계

보통 프랑스 미술학교가 몇년제냐 물으면 대부분은 5년제라고 답한다. 하지만 이 5년제라는 것은 3학년까지의 학사 과정, 그리고 4-5학년의 석사 과정까지 모두 포함한 것을 말한다. 처음 들었을 때는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선 기본 4년제에, 원하는 사람은 거기서 석사, 박사를 더하지만 그 둘을 합해서 8년제, 10년제라고 하진 않지 않은가. 알고 보니 미술이나 건축, 등의 특수학교들은 프랑스의 일반 국립대학 (Université) 처럼 4년제도 아니었고, 기본적으로 5년제 내지는 7, 8년제가 대부분이었다. 특히나 미술학교에서 3학년까지만 마치는 학사 과정은 그리 크게 쳐주지 않았고, "할 거면 5학년까지 하라"는 문화였다.


하지만 현실은 3학년까지만 하는 학생들이 많았고, 끈질기게 5학년까지 진급해 졸업하는 이들은 정말 극소수였다. 프랑스 교육구조는 차디찬 피라미드다. 이는 특히 국립대학에서 크게 실감할 수 있는데, 신입생 때는 1000명 가까이 있던 학생수가 2학년에는 500명, 3학년에는 200명, 그리고 4학년에는 100명도 안 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이렇게 가파른 피라미드는 미술학교에도 예외없이 적용되었고, 나는 재학했던 3년 동안 자퇴하는 동기들만 10명 이상 (1학년 당시 우리 학년은 50명이 좀 덜 되었으니, 거의 1/4 정도가 자퇴한 셈이다), 유급하는 동기들 또는 선배들 4-5명은 기본으로 봐왔다.


이 모든 것을 알 길 없던 당시 만 18세의 나는 신입생, 더군다나 대륙을 건너온 한국인 유학생이었다. 아무것도 모를 때였다. 위에 서술했던 5년제 이야기도 이론상으로만 알고 실감을 전혀 못했고, 내가 언어가 된다는 것에만 안도하고 유급만은 안 된다 다짐하며 벌벌 떨던 시절이었다. 학기가 시작하자, 교수들이 하라는 대로 일단 손발을 움직였고, 읽으라는 대로 책을 사서 읽었지만 한동안은 "?????" 상태였다. 그러다 순식간에 신입생 환영회도 지나가고, 매일 8시간이나 되는 수업을 소화하며 하루하루를 넘기다 보니 한두달은 금방 지나갔다. 그쯤 되니 적성에 맞는 과목들과 맞지 않는 과목들이 구분이 가기 시작했고 교수님들의 성격도 보이기 시작했다. 동기들과도 조금씩 맘 맞는 이들끼리 친해진 상태. 거기서부터가 진짜 학교생활의 시작이었다.


그림, 드로잉, 페인팅 등의 강의들은 지금까지 해온 것과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교수님이 대략의 주제나 테마, 또는 사용할 재료 등을 정해주시면 우리는 거기에 맞추어 각자 그리고 싶은 것들을 그렸다. 누군가는 연필로, 누군가는 유성펜으로, 누군가는 목탄으로, 캔버스 또는 종이, 더 나아가 벽 위 등등 어디에 그리는지도 다양했다. 주제는 학기마다, 또는 격주마다 달라졌다. 페인팅 강의에서 받은 첫번째 주제는 "거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근처 대형마트에서 작은 사각거울 몇개를 사서 그 위에다 아크릴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 내가 매일같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을, 하지만 굉장히 뿌옇고 두리뭉술하게 대략의 실루엣만 그렸었다. 다른 동기들은 은박지 위, 유리 위, 그리고 다양한 재료를 가지고 각자 작업을 했었다. 그림을 그리는 강의에서는 대략의 틀만 있고 꽤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그리고 조소, 사진 등의 강의도 교수님에 따라 분위기는 달랐지, 테마에 따라 자유롭게 작업한다는 틀은 비슷했다. 다만 기술을 좀더 익혀야 했다. 조소 강의는 석고와 점토 등을 어떻게 잘 다룰지, 어떻게 철과 고무, 플라스틱 등을 이용해서 기본 형태/뼈대를 잘 잡을지 등을 배웠다. 사진 강의에서는 주로 DSLR 카메라의 기능들을 이해하고 다루고, 그리고 사진 스튜디오 조작하는 방법 (조명 설치, 조명과 카메라를 연동시키는 법) 등등 기술적인 부분 위주로 배웠다. 판화에서는 어떤 재질의 판이 존재하고 (목판, 석판, 구리 등), 어떤 도구를 써야 판을 잘 팔 수 있고, 직접 그리는 것 외에 어떤 방법으로 그림을 새길 수 있는지 등을 배웠다. 프린트 강의는 많지 않았지만 간단한 도안을 가지고 어떻게 기계를 거쳐 내 마음대로 원하는 색을 입히고 원하는 재질 (천, 물건, 티셔츠 등)에 옮길 수 있는지도 익혔다.


이렇듯 미술학교의 신입생은 무조건 많은 과목을 듣고 다양한 기초 지식과 기술력을 익히는 게 최우선이라고들 한다. 그와 동시에 지금까지 '시켜서 한다', '해야 하니까 한다' 같이 수동적인 자세로 공부를 해오던 내게 중요한 한 가지를 알려주었다.


얼마나 정확하게, 그리고 "예쁘게"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을", "왜" 하는지가 더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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