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앞을 지날 때마다 좋아하던 곳이 사라진 자리에 눈이 간다. 몇 달 사이에도 휙휙 달라지는 풍경을 신경 써 본 적이 없는데, 한번 눈에 들어오니 계속 관심을 두게 됐다. 그까짓 건물 하나 사라졌다고, 혹은 인테리어가 조금 바뀌었다고 추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 달라지면 자꾸 그곳에 달라붙어 있던 기억이 함께 날아가는 기분이 든다.
서울역사박물관에 갔던 날이 생각났다. 그곳에는 지난 몇백 년간의 서울의 모습이 다양한 형태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나의 기억은 누구도 사진 찍어 주거나 기록으로 남겨 주지 않으니 오롯이 내가 스스로 기록을 모아 박물관이 되어야 한다.
며칠 전에는 눈을 뜨자마자 자꾸 확인하고 싶은 곳이 생각났다. 출근이고 뭐고 훌쩍 가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한낱 직장인에게 그런 용기가 있을 리 없지. 출근하는 버스에서 내내 떠올리며 궁금해하다가 기분만 가라앉았다. 막상 직접 가서 눈으로 확인했다가 예전의 풍경을 전부 잃어버린 걸 알게 되면 더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았다. 그 가게는 잘 있겠지. 그 사람은 잘 지내겠지. 오후 내내 그런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마음껏 궁금해하고 나서 이제는 그곳을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다시 갔을 때, 차라리 ‘여기서 그 사람과 이런 일이 있었나’ 싶었을 정도로 모든 것이 달라져 있기를 바라게 됐다.
어떤 기억에는 지금 만나면 너무도 다르게 느껴질, 사람이 있다. 그때 만났던 사람이 이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으며, 어떤 기분이었고, 지금은 여기가 이렇게 바뀌었네, 하는 말을 재잘대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 말을 할 때의 표정도 떠오른다. 행복했겠구나, 가끔은 힘든 날도 있었겠구나 하며 눈가에 주름이 잡히도록 웃던 모습을 마음으로 사진 찍어 둔다. 그렇게 찍어 둔 사진은 궁금할 때 차마 꺼내 보지도 못하고 그런 일이 있었지 하며 고이 간직하곤 했다. 지나치게 상대의 근황을 궁금해하는 게 나에게 독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 한 명을 잃을 때마다 거기에 딸린 많은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렸다. 좋아하던 장소, 유머 코드, 화젯거리, 그 사람을 만난 계절. 함께한 많은 풍경을 그 사람의 기억과 함께 큰 주머니에 마구잡이로 담아서 내다 버려야 했다. 주머니가 너무 무거워서 한참을 낑낑대며 끌고 다녔다. 그러다 귀퉁이가 삭아서 안에 든 것들이 스멀스멀 빠져나가 가벼워질 때쯤에서야 홀가분하게 그 모든 걸 버리곤 했다. 홀가분하게 주머니를 버리기까지 아주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만 빼면 그 사람을 떠나보내느라 아쉬운 마음은 그럭저럭 정리가 됐다.
며칠 전, 카페에서 만난 B가 같이 만나던 사람의 이야기를 꺼냈다. ‘P씨가 사람들 앞에서 언니 얘기를 하더라고요.’ 머리가 멍해졌다. 갑자기 나를 왜 입에 올렸을까. P와의 마지막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P를 포함한 모두와 멀어지려는 나와, 그런 나를 말리던 P.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멋대로 행동하다가 뒤늦게 후회할 것 같아서 다시 P에게 연락했던 나. 지금 생각하면 애초에 감정에 취해서 섣부르게 결정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후회가 밀려온다.
공동의 목표도 있었고, P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과 잘 맞아서 오랫동안 함께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그 관계를 정리하던 날에는 우리는 둘 다 너무나 날이 서 있었다. 내가 또 어디서 이런 성격, 가치관, 코드, 이야깃거리를 가진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 후회하면서도 끝내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결국 P를 떠나보내며 좋아하던 카페에도 발길을 끊었고, 같이 세웠던 계획도 영영 기약 없는 다짐으로 남았다.
P를 떠올리면 밤새 진탕 술을 마시고 취해서 걷던 종로의 거리가 생각난다. 취해서 비틀거리는 P를 데리고 24시간 문을 여는 카페에 갔다. 다른 사람들이 술을 좀 깨라고 마실 걸 가져다줬는데 이를 마다하고 황당한 소리만 해대길래 조용히 카페 의자에 눕혀 재워버렸다. 합정의 어느 지하 술집에서는 보드게임을 하며 술을 마셨다. 꼬맹이 ‘아보카도’가 가져온 게임을 하며 진 사람에게 술을 먹였는데, 공교롭게도 P가 계속 마시게 됐다.
모임 날이든 주말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피 튀기는 토론을 하고, 술을 진탕 마셔댔다. 누군가는 현실을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과거를 이야기했다. 그러면서도 결론은 항상 우리의 꿈 이야기였다. 너무 취해 있었는지 그때의 나는 우리가 말하던 꿈이 금방 손에 잡힐 것 같다는 망상에 빠졌다. 매일이 그렇게 슬프면서도 즐거웠던 때는 다시 없겠지.
멀어지고 싶지 않기도, 다시는 보고 싶지 않기도 한 사람들이 차곡차곡 쌓인다. 가끔 그들과 만나던 곳을 지나가며 우연히 마주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고민하기도 한다. 신기하게도 매일 많은 사람을 마주치는데 그중에 소식이 궁금했던 지인을 본 적은 거의 없다. 그럴 때면 괜히 긴장하고 고민한 내가 바보 같기도 하고, 혹은 이제 우리가 눈앞에서 마주쳐도 서로를 못 알아볼 정도로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풍경은 달라지고, 옆에 선 사람도 계속 바뀐다. 만나는 사람마다 특별한 추억이 생기는 게 조금은 두렵다. 그나마 위안 삼을 수 있는 건, 사람을 하나 잃을 때마다 그 자리를 또 다른 사람이 채워준다는 것이다. 그때 그 사람을 놓지 않았다면 지금 이 사람을 만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괜히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이전에 멀어진 사람과 했던 즐거운 일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한다. 대부분은 굳이 마음먹지 않아도 새 사람과 또 새로운 결의 즐거움을 찾게 되지만. 그때 그 사람과 지금 이 사람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겨우 균형을 맞추고 있는 기분이다.
누군가 갑자기 그때 왜 그랬냐고 물으면 설명할 방법이 없다. 너무 많은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어디서부터 풀어내야 할지 나도 모르겠다. 고민을 하다 결론만 짧게 이야기해 버리면 상대는 내가 의도한 것과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다. 오해를 사는 건 두렵지 않다. 오히려 오해를 풀려고 정리되지 않은 말을 내뱉는 게 더 두려웠다.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은 날아가 버린다. 특별하지 않은 하루도 언젠가는 그리워질 것 같아서 자꾸 글로 남겨두고 싶어졌다. 장소도, 사람도 계속 바뀌겠지만 생각은 내가 하고 싶을 때마다 자유롭게 할 수 있으니까. 사람을 잃으면서 함께 잃는 것이 아무리 많아도, 그때의 공기와 세세한 감정은 하나도 버리고 싶지 않다.
글을 쓰면서 매번 이중적인 생각이 든다. 아무도 이 일을 몰랐으면 하다가도 아니, 언젠가는 누군가 이 글을 읽고 그때의 나와 비슷한 마음이 든다고 해 줬으면 하는 상반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