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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름 Mar 17. 2022

그런 마음조차 사랑일 때가 있다

<1차원이 되고 싶어> 서평

 2002년 가을, 조성모의 <가시나무>라는 곡이 히트를 쳤다. 성대의 떨림까지 느껴질 정도로 아련하게 시작하는 노래의 첫 부분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애절한 멜로디만 듣고 막연하게 슬픈 노래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가사를 곱씹어 보니 화자의 마음이 얼마나 많은 생각으로 복잡했을지 조금이나마 이해가 된다. 이제 와서는 가시나무의 가사가 단순히 사랑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내 주변 관계를 가사에 대입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이 쉴 자리가 없다’는 말처럼, 현실의 무게만으로도 충분히 무거워서 다른 사람에게 곁을 내어 주기가 힘들 때가 많은 것이다.     


 언제부턴가 ‘사랑’이라는 단어가 어색해졌다. 글로 쓰기도, 입에 담기도 오글거리고 어색한 느낌이다. 그래서 로맨스가 주된 내용인 소설이나 영화에도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특히나 영화는 간질간질한 내용보다 슬픈 내용이 많아서 더 보고 싶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나 무겁게 느껴진다. 좋아하는 감정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려면 어떤 마음이어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는다.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마음 졸이던 때가 이미 너무 오래전 일인 것만 같다. 지금 다시 그런 간질간질한 마음을 느낀다면 설렘보다는 불안에 가까울 것 같아서 막연하게 어떤 감정을 사랑이라고 규정하는 게 어렵다.

 로맨스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박상영 작가의 글은 특별했다. 표지에 끌려 집었던 <대도시의 사랑법>은 가벼우면서도 마음 한켠이 답답해지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억지로 눈물을 쥐어짜는 내용은 아니어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었다. 서점에 갔다가 표지가 눈에 띄어서 책을 펼쳤는데 그 자리에서 단숨에 끝까지 읽었다. 작가의 다른 글도 본 다음에 책을 모으고 싶어서 그날은 책을 사지 않았다.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먹먹한 감정이 전달되고, 군더더기 없는 표현이 잊혀지지 않았다. 연작 소설을 처음 접한 후부터 몇 안 되는 좋아하는 한국 작가 중에 박상영 작가가 추가되었다.

 21년 가을 무렵, 작가의 신작 장편 소설이 나왔다. <1차원이 되고 싶어>라는 제목만으로는 어떤 내용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약속 전에 시간이 잠깐 남아서 교보문고에 갔다가 또다시 표지를 보고 그 자리에서 책을 조금 읽었다. 읽다 보니 재미있어서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았다. 며칠 고민하고 나서도 그 책이 아른거리면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온 친구의 손에 책이 들려 있었다. 박상영 작가의 책이었다. 책을 선물 받은 것도 오랜만이었고, 조금 전까지 살까 말까 망설이던 책이라 더 설렜다. 어떻게 내 취향을 알고 이런 선물을 사 왔는지 신기했는데, 만나기 전에 대화를 하다 알게 됐다는 말에 감동했다. ‘좋아할 것 같다’는 이유로 불쑥 내미는 선물을 받아본 게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그날은 집에 가자마자 새벽까지 책을 다 읽었다. 문장 하나하나가 넘어가는 게 아까워서 아껴두고 읽고 싶을 정도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 B에게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읽고 내가 생각났다며 불쑥 선물한 것이다. 나에게 선물을 하기 전에 먼저 읽고 감상을 공유하고 싶어서 페이지마다 선물을 숨겨놨다고 했다. B는 인상 깊게 본 페이지마다 감상을 적어 두었다.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어디쯤 코멘트가 나오는지 찾는 게 재미있고 설레기도 했다. 책을 받고 처음에는 내용만 먼저 읽고, 그다음에는 친구가 남긴 코멘트를 함께 읽었다. 세 번째로 읽을 때는 코멘트가 있는 페이지만 찾아서 읽어 보았다. 이 책은 여태 받은 것들을 통틀어서 아직도 손에 꼽을 정도로 마음에 남는 선물이다. 좋아하는 B가 선물한 책이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선물을 준 이유가 아주 오랫동안 내 마음을 묶어두었다. 지금도 책장에 꽂힌 그 책을 볼 때마다 B가 그리워진다. 비슷한 이유로 <1차원이 되고 싶어>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선물이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좋아했던 사람들을 떠올려 보면, 남녀를 막론하고 그들 하나 하나에게 제각각 다른 감정을 느꼈다. 어떤 사람에게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서 무엇이든 다 해 주고 싶었고, 어떤 사람은 너무 좋아하는 나머지 오히려 싫고 피하고 싶기도 했다. 또, 만나면 불편한데 만나지 않으면 궁금해지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떠올리며 누구를 더 좋아했고 누구를 덜 좋아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나마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상대와의 관계에는 후회가 남지 않는다. 단지 그 외의 사람들은 늘 고민의 이유가 되었다.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모두 사귀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이어가고 싶기는 했다. 하지만 둘 다 아무 문제가 없는데도 상대와 함께하는 시간이 무섭고 피하고 싶은 내 마음이 문제였다. 그럴 때면 내가 이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게 맞는지 혼란스러워진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몇 마디 짧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게 분명하다.     

 <1차원이 되고 싶어>에는 윤도와 태리라는 인물이 나온다. 윤도는 모든 것을 주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이고, 태리는 너무 좋아해서 싫은 사람이다. 주인공과 태리는 같은 부류의 사람이다. 말하자면 같은 비밀을 공유하고 있고, 그 비밀은 누구에게도 내비치고 싶지 않은 종류였다. 남들과 다른 성 정체성을 가진 주인공은 비밀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갖은 노력을 한다. 반면 태리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딱히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순진할 정도로 감정에 솔직하다. 게다가 태리가 좋아하는 대상은 주인공이다.

 어렸을 때부터 태리와 친하게 지낸 ‘나’는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태리와 자신의 공통점을 발견한다. 태리를 걱정하고 안쓰럽게 생각하면서도 비밀을 들키는 게 두려워서 자꾸 태리와 거리를 두려고 한다. ‘나’는 윤도와 사랑에 가까운 감정을 나누면서도, 태리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윤도, 태리와 나눈 각각의 감정은 어떤 점에서 다른 건지 ‘나’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만, 글을 읽는 내내 주인공이 태리도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태리에게 느끼는 그 마음을 직면하기 두려운 것은 아니었을까. 마지막까지 태리를 외면하는 주인공을 보며 과거에 서툴렀던 내 모습을 떠올리기도 했다.

 주인공은 사춘기 아이의 복잡한 내면과, 마음과는 다르게 부쩍 자란 자신의 외양을 보며 점점 복잡한 상황에 얽히고 만다.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상처투성이인 사람끼리 부대끼며 사랑이라는 감정을 배워간다. 주인공뿐 아니라 작중 인물들은 저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배우고, 내면이 성장한다. 결국 모두가 사랑 때문에 행복해하다가 상처받고 이를 밑거름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소설에 나오는 소소한 요소를 보며,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작가가 나와 비슷한 나이라서 그런지 2000년대 초반의 감성을 이야기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물론이고 대학교 때까지도 활발하게 하던 싸이월드나 msn 메신저 이야기를 보며 주인공의 상황에 더 몰입할 수 있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작가가 만든 타임머신을 타고 한바탕 꿈을 꾸고 난 듯했다.     




 소설 속 테리처럼, 좋아하면서도 가까이하기 싫었던 사람이라고 하면 K가 떠오른다. K 역시 나를 좋아하는 것 같으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나를 영 탐탁지 않게 여겼다. 다른 친구들은 그런 애를 왜 좋아하냐고 했다. K는 완전히 상극인 것 같은 우리가 잘 통하는 게 이상하다고도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평소라면 K 같은 사람을 절대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 시절에는 K를 특별하게 여겼다. 하나부터 열까지 달랐던 우리는 붙어 있으면 매일 싸우고, 만나지 않을 때는 전화와 문자로 온갖 대화를 해댔다.     


 언제부터인지 K는 내가 자기를 불편해한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나는 K가 나를 한심하게 여긴다고 느꼈다. 이런 관계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K를 생각하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혔다. 너무 좋아하는데 같이 있으면 자꾸 언제 헤어질지만 생각하게 됐다. 자잘하게 쌓인 먼지를 그때그때 치우지 않는 사이에 관계의 벽은 점점 두꺼워지고 있었다. K를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도무지 버틸 수 없는 기둥이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소개해 준 남자와 내가 잘 풀리지 않은 시점부터 K는 노골적으로 나를 불편해했다. ‘이렇게 잘생긴 사람을’이라는 말을 시작으로 연애에 관해 온갖 조언을 들었다. 어디 가서 감히 만나지도 못할 정도로 잘생긴 사람은 아니었는데, 소개받은 남자나 K는 나와 생각이 달랐던 것 같다. 외모도 중요하지만 나의 성향과 전혀 맞지도 않는 사람에게 억지로 나를 맞추고 싶지 않았다. 소개받은 남자는 ‘당신처럼 눈치 없는 사람은 처음’이라고 했다. K는 ‘도대체 너는 어떻게 연애를 할 거냐’고 핀잔을 주었다. 내 딴에는 상대에게 싫다고 표현한 거였는데, 그게 눈치 없는 행동이었던 건지 아직도 혼란스럽다. 어쨌든 K에게 나는 그저 분수도 모르고 눈치 없이 구는 사람에 불과했다.

 복잡한 사정을 하나하나 나열하긴 힘들지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점점 더 단순하게 생각하는 삶을 지향하게 되었다. 좋아하는 감정에 이유를 달기가 어려워서 그저 매 순간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첫 만남에서의 인상과 몇 마디를 나눈 후에 머릿속에 콕 박힌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는 대체로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나 혼자 생각한 잘못된 편견을 들으면 상대방도 나름 억울한 면이 있을 것이다. 미안하게도 아직은 그런 억울함까지 고려할 여유가 다소 부족하다.     


 그저 요즘은 내가 세운 편견의 선을 통과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다. 사실 사랑, 혹은 다른 어떤 말로 규정한다고 해도 그런 감정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말에 모든 의미를 담는, 편한 방법으로 감정의 범위를 넓히기로 했다. 어쩌면 나는 아주 늦은 나이까지 사랑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버틸 수 없는 것들조차 사랑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사랑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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