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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이 Jul 18. 2024

망각의 벽

단편소설



덜컹덜컹 흔들리는 격리실 의자에 앉아 있으려고 했는데, 어느새 간호사들과 의사들이 날 쳐다본 다음 온몸의 사지가 묶일 때, 쿵하고 확 내면의 신음이 욱하고 나오려다가 말았는데, 저 멀리 나에게 시비를 걸었던 정신병자들의 콧소리가 병동을 쿵쿵하고 울렸다. 솰라 솰라 솰라, 핏빛이 되었다가 은빛이 되었다가 헤롱헤롱 대는데 어느새 흰 가운을 입은 젊디 젊은 여자의사가 나타나서는.



“5, 2 mix 해서 빨리 IM으로 주사 주세요. 환자분, 지금 굉장히 불안정한 상태세요. 자해하시면 안 됩니다. 여기서 더 이상 긁으시면 또 수술을 받으셔야 돼요.”



아, 내 말이 틀린 게 없었지. 이 여자는 분명 누군가의 아내로 지금 나이가 한창인 30대 중반, 한창 정열에 타는 가슴으로 가장 행복스러울 나이. 내 마음의 고통을 저따위 새파랗게 젊은 여자가 어떻게 헤아릴 수 있나. 나는 반백이 반이 넘어 인생으로서 살아올 길을 다 살고서 쇠멸과 쇠퇴의 구렁텅이를 향해가는 치매 노인일 뿐이다. 그래, 치매. 그렇다고 하더군. 난 절대 받아들일 수 없지. 이래 봬도 난 젊었을 적 한국의 신문왕을 꿈꾸며 OO일보에서 제일 잘 나가던 기자였어.



“이봐, 의사 선생. 공부 좀 더 하고 와. 할멈에게서도 자세한 말은 들었을 테지만, 내 말을 좀 더 주의 깊게 들어보고, 생각해 보아라. 내 집에 가면, 그래, 내 집 여기서 멀지도 않다, 30분 차 타고 들어가야 하는데, 우리 집 기사가 널 데리러 올 거다. 화투 칠 줄 알지? 네가 동의만 한다면, 내가 방 한 칸 내어주는 거 일도 아니야. 거기서 네가 하고 싶은 일을 다 해도 좋단 말이야. 날 여기서 내보내주기만 한다면. 허허… 어째서 말이 없지? 사람이란 젊어서 호강해 보지 않으면 평생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야. 내가 호강을 시켜준다니까? 시집은 갔나 본데, 그렇게 뻣뻣하게 고개만 들고 있지 말고, 이리로 와서 이거 좀 풀어봐. 내가 말하는 걸 들어보아라. 내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들리느냐? 대강 할멈 하는 말 듣고서는 날 이렇게 정신병원에 넣어놓고 말이야. 내가 돈이 더 많단 말이다. 기사도 붙여주고, 방도 한 칸 내주고, 넌 거기서 하고 싶은 취미생활이나 하며 살면 된단 말이다. 어떠냐? 실을 듣고 나니 마음이 동하지, 사람들 앞이라고 쑥스러워 말고 이야기해 봐, 응?”


“응? 왜 대답이 없니? 부끄러워서 그러니? 그렇게 부끄러워할 일은 아닌데.”


저 젊은 여자가 내 말을 귓등으로 듣고 있는 게 분명하다. 저 손가락에서 귓구멍으로 전기가 통하지 않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전기가 통해야 하는데, 전기도 통하지 않는 사람이 내 인생을 이렇게 통째로 바꾸게끔 내버려 두진 않겠다.


“어머, 환자분! 의사 선생님 손가락 깨물면 안 돼요!”


쉰 소리의 늙은 여자간호사가 빼액하고 소리를 질러 놀란 나머지, 난 나머지도 모두 놓아버렸다.


"아휴, 또 똥 쌌어요, 이거 또 언제 치우나, 아이고!!"


"김 선생님, 그래도 이제 잠들었네요, 힘이 천하장사예요,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건지 시도 때도 없이 자해를 하니..."


까무러치는 정신에 들리는 그들의 목소리가 더욱 선명하다.


내 인생을 바꾼 그녀...




그러니까, 그때야말로 내 전성기라고 말할 수 있었지.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스물다섯 살이었어. 그녀는 다소곳이 앉아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예쁜 눈망울에 비친 활자들이 마치 춤을 추는 듯했고, 흰 목덜미에는 작은 분홍색 스카프가 둘러져 있었지. 나는 그때 스물아홉 살이었으며 지독한 독감에 걸려 고생하고 있었는데, 이 스물다섯 살 아가씨에게 그토록 이끌릴 줄은 상상도 못 했어, 그녀와는 별다른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없었는데 말이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지, 그녀의 치료법은 과거의 기억들을 더욱 헷갈리게 만들어 어지럽혔다. 이미 배가 부른데, 계속 먹게끔 시키는 먹는 고문이랄까. 그렇지만 그 치료법을 처음 적용한 그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계속해서 들어오는 그 햇살에 그만 내 어둠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가진 그 햇살의 양은 헤아릴 수 없이 넘쳤다. 할멈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치매에 걸린 남편 욕하며 지내고 있을까. 밥은 잘 챙겨 먹고 있으려나.




다시 눈앞이 어두워지며 의식이 가물거리는 가운데, 다시금 젊었을 적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신문사의 거대한 편집실, 종이 냄새와 잉크 냄새가 뒤섞인 그곳에서 나는 항상 타자기를 두드리며 기사를 썼다. 내가 쓴 기사가 일면에 실리면 사람들은 그것을 읽고 내 이름을 기억했다. 그때는 참으로 모든 것이 확실했고, 모든 것이 분명했는데, 지금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흐릿하다.


그러다 문득 내 앞에 서 있는 젊은 여의사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에 약간의 연민과 피로가 섞인 표정이 떠올랐다. 나는 그 표정을 보고 문득, 그녀도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도 언젠가는 나처럼 늙고, 기억을 잃어가고,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헷갈리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나는 더 이상 그녀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래... 미안하오. 난 단지... 단지 너무 외롭고 두려워서 그랬소. 당신도 언젠가는 이해하게 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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