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혜진,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오월의봄, 2019)에 대해
이 책을 뭐라 부를까. 주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기 어렵고, 심지어는 분야조차 특정하기가 버겁다. 제목에도 부제(“한국문학의 정상성을 묻다”)에도 ‘문학’이 포함되니까, 손쉽게는 문학비평집으로 분류하고 싶지만 이 책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존 문학비평에서 금기시하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한국문학의 정상성만 묻는 것이 아니라 한국 문화 전반과 그를 둘러싼 우리의 ‘취향’을 ‘심문’에 부친 뒤 그야말로 ‘오조오억 개’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시원하게 정의하고 싶은 내 ‘취향’을 잠시 접어둔다. 지금껏 내가 접해왔던 책과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사회적 이슈들까지 너무도 익숙한 것들로 가득 찬 이 책은, 그러나 지금까지 읽은 어떤 책보다 낯설다. 그 낯섦이 나에게 남긴 파열을 몇 가지 키워드로 정리해두는 데 만족하기로 한다. 어떤 책은 어떤 경우에, 사람의 생활을 바꾸기도 한다. 이 책이 나에게 그랬다.
나는 ‘백일장 키드’였다. 문학이라는 말을 알기 전부터 풀밭에 앉아서 ‘시랍시고’ 끄적였다. 1996년은 나에게 ‘연세대학교 한총련 사태’가 아니라 ‘H.O.T. 데뷔’로 기억된다. 그 이후로는 (성애 묘사가 없어서 인기도 없는) 팬픽을 줄곧 썼다. 그리고 동국대학교(당시 강타와 토니가 재학 중이었기에)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에는 소설만 읽고 소설만 썼으며, 소설 쓰던 애들하고만 술을 마셨다. 그런데도 등단은 나만 비껴갔다. ‘재능이 없으니까’ 접었다. 한국소설도 끊었다.
나한테도 너무 지겨운 내 ‘전사(前事)’를 잠시 읊은 이유는 이 책의 효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책은 그간 내가 매여 있던 ‘문학의 신화’들을 명징한 언어로 묘파했고, 결과적으로 그걸 부수라고 요구했다. 그 ‘신화’란 내가 소설을 쓰게 만든 힘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소설을 아예 끊게 만든 힘이기도 했다. 약 10년 동안 의심 없이 ‘문학신’을 모셔왔는데, 그 신이 나를 내동댕이쳤다. 그게 문학과 나 사이의 어이없는 결말이었다. 이 책은 바로 그 문학을 ‘신’의 영역에서 ‘인간’의 영역으로 가져온다. 절대적 수준이 아니라 취향의 세계로. 그러나 이건 문학을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합당한 자리에 ‘돌려주는’ 느낌이다.
이 책이 가시화한 문학의 ‘신화’ 중 몇 가지 것들만 살펴보자. 먼저, ‘작가는 작품으로만 말한다’를 들 수 있다. 이 책이 기존 문학비평과 가장 차별화되는 점은 작품 바깥의 요소들(작가의 인터뷰, 동시대의 사회적 사건과 텍스트, 그를 둘러싼 평단과 대중의 반응 등)을 적극적으로 동원해 논지를 전개한다는 것이다. 기존 문학장에서 이건 거의 ‘이단’에 가까운 만행이다. 오직 작품으로‘만’ 말해야 하고, 작품으로‘만’ 들어야 한다는 그들의 고집은 사실상 ‘정치’가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문학에 대한 집착일 터이다. 그러나 문학 또한 작가의 ‘정치적 기획’의 일환이라는 이 책의 메시지에 따르면, 작가가 자기 작품 세계에 대해서 공적으로 밝혔던 말들이나 작품이 소비자들에게 일으킨 파장 들도 아주 긴요한 텍스트일 수밖에 없다. 문학과 문학 아닌 것의 ‘계급’이 무너질 때, 오히려 문학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는 게 아닐까?
다음으로 ‘장편소설 대망론’ 신화를 다룬 챕터(“‘장편의 시대’와 ‘이야기꾼의 우울’”) 또한 이 책의 백미 중 하나다. 2000년대에 집중적으로 한국 소설을 접한 이들은 잘 알고 있겠지만, ‘장편소설이야말로 진짜 문학’, ‘장편을 쓸 수 있어야 진짜 작가, 즉 이야기꾼’이라는 식의 신화가 존재한다. 저자는 주로 천명관, 정유정 등의 작품과 그들의 기획이 묻어나는 각종 제스처, 그들을 둘러싼 평단의 (무)반응들을 면밀히 분석해, 이것이 실은 “‘이야기’라는 원형을 빌려 기왕의 이성애자 남성지식인 중심으로 구성된 한국문학사의 전통을 자연화하고자 하는 욕망”(32쪽)에 기대고 있음을 밝혀낸다. ‘요즘 애들한테는 역사=서사가 없다’, ‘경험이 별것 없으니 골방의 자폐적인 이야기나 쓸 수밖에 없다’는 식의, 주로 젊은 여성 단편소설들에 대한 오랜 폄하의 기저에 무엇이 있었는지 증명되는 순간이다.
그 외에 정치적 올바름(소위 ‘피시함’)이나 운동성 등을 작품에서 어떻게 다룰 것인지, 또 그걸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의 문제를 거론한 챕터들(“비평의 백래시와 새로운 ‘페미니스트 서사’의 도래”, “‘그날’ 이후의 서정시와 ‘망막적인 것’”)도 매우 인상적이다. 앞서 말했듯 (순)문학이라는, 문학 앞에 마치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있는 저 반정치의 정치 때문에, 작품에서는 ‘선악’과 ‘당위성’을 눈에 띄게 드러내서는 안 된다, 그런 작품은 ‘미학적이지 않다’는 강고한 인식이 분명히 있다. 초유의 소설 『82년생 김지영』, 논쟁적인 다큐/영화 <두 개의 문>, <지슬> 등을 둘러싼 담론들을 분석하며, 저자는 작품의 미학을 해치는 것은 투쟁의 주체들을 “천편일률적인 도상으로 고착시키는 지배의 정치와 재현의 메커니즘이지, ‘절규’나 ‘투쟁’ 같은 그들의 운동과 파토스 그 자체가 아니”(488~489쪽)라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절규’와 ‘투쟁’에 담긴 미학”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지가 관건이라는 것이다.
바야흐로 ‘여성서사’라는 말의 전성기다. 구글에서 ‘여성서사’를 검색하면 순식간에 (성인인증 결과를 제외하고도) 4,270,000개의 문건이 쏟아진다. 너무 들어서 이미 지겹기도 한데, 실은 이제 시작인지도 모르는 그것. 이 책은 그런 가운데서 ‘여성서사’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새롭게 고민하게 만든다. 그것은 곧 ‘여성정치’를 상상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여성이 만들면 될까? 여성만 나오면 될까? 여성이 ‘짱 먹으면’ 될까? 이 책은 ‘그걸로는 부족해, 더 많은 고민과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해’라고 말할 뿐이다.
여성정치와 여성서사에 대해 더 빡세게 사유해보라고 이 책이 던져주고 있는 예시들, 이를테면 ‘무늬만 여성 대통령’ 박근혜라거나 ‘춤, 눈물, 내조’로 표상되는 여성정치인들(“권력의 여성, 여성의 권력”), 한 번도 본 적 없고 꿈에 볼까 무서운 여성 주인공 만화 『미지의 세계』(“‘포스트-아포칼립스’를 향한 미지의 미러링”), 이기려고 ‘인간성’마저 저버리는 여성 원톱의 영화 <미스 슬로운>(“권력의 여성, 여성의 권력”), 그리고 저자의 주요 관심사이기도 한 다양한 퀴어 서사들을 가만히 살펴보자면, 흔히 말하는 ‘바람직한’ 여성서사, 도덕적이면서도 쿨한 여성 인물과는 거의 무관해 보인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선택으로 보이는데, 우리가 흔히 실제든 허구든 ‘여성서사’에 적합한 주인공으로 상상하는 여성의 상을 깨보라는 주문이다. 막말로 박근혜를 그저 아무 정치적 의식도 주체성도 없는 ‘멍청한 허수아비 여성’으로 일축해버리는 일은 쉽지만, 더 나아간 우리의 여성정치를 상상하는 데는 아무 도움도 안 된다. 또한 남성 대선후보를 지지하며 ‘스스로’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는 ‘페미니스트’ 여성정치인들을 욕하기는 쉽지만, “그녀들이 기획하는 여성정치의 내용을 상상하기란 어렵다”(246~247쪽).
저자는 “‘어떤’ 여성이 ‘왜’ 권력을 지향하며,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무엇’을 정치적 자원으로 선택하는지”(247쪽) 더 충분히 상상해볼 것을 제안한다. 그것은 때로 자신과 동료 여성의 ‘피해’로 여겨지는 ‘자원’조차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역량임을 믿고 과감히 금기를 깨는 ‘악녀’ 슬로운의 모습일 수도 있고, 자신에게 결여된 ‘성적 자원’을 통탄하며 오히려 그 금기된 욕망을 과감 없이 발설하는 ‘또라이’ 미지의 모습일 수도 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여성인물들만 등장하는 여성문학보다, 여성인물들이 ‘난봉꾼, 무법자, 반란군’ 등 다채로운 역할에 포진된 여성문학을 보는 것이 우리에게 더 큰 자극이 되듯, 여성정치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자원을 ‘너무 여성적’ 혹은 ‘너무 남성적’이라는 이유로 선험적으로 배제할 필요가 없다. 남성젠더화된 정치의 장에서 여성의 정치적 기획과 자원을 예측 불가능한 것으로 두는 것, 그 자원들이 놓일 맥락을 여성 스스로 구성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여성정치의 시작이기 때문이다.”(253쪽)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여성서사에 대한 시야를 넓힌 것과 동시에, 여성으로서 나 자신의 ‘자원’은 무엇일지, 이 ‘자원’을 어떤 ‘기획’으로 빚어낼지 꿈꾸느라 조금 설레기 시작했다. 내가 쓰게 될 여성서사, 혹은 내 인생이 직접 선보일 여성서사는 어떤 모습일지 말이다.
문학에 대한 곱디고운 신화들을 거의 불도저처럼 밀어버리는 이 책을 읽기 전에, 나는 섣불리 예감했다. 이 책이 설득력이 있다면, 나는 아마도 이제 아예 한국문학을 읽지 않게 되겠구나. 그런데 전혀 반대의 결과가 벌어졌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완독하고 난 뒤에 나는 책장과 기억 저편에 박아두었던 한국문학의 먼지를 털고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짧게나마 감상을 남기고 있다.
‘한국문학은 빻았어, 성범죄자들이 아가리 터는 거 그만 볼래’ 하고 덮어두기엔, ‘한국문학’과 그를 포함한 문화 콘텐츠의 세계는 너무도 크고 다종다양하며 눈부신 힘이 있다고, 이 책이 나를 설득하는 것 같았다. 이야기의 영역에서 다른 어느 때보다 ‘좋은’(충분히 정치적이고 또한 미학적인) 작품들이 생산되고 있고, 나는 지극히 정치적이고 미학적인 내 ‘취향’의 주체로서 그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고. ‘나’는 그럴 자격이 있고, ‘나’는 ‘나’만은 아니며, 그러려면 ‘나’들은 좀 더 부지런해져야 한다고 말이다.
“요컨대, 21세기의 비평은 ‘취향’을 지극히 정치적인 장소로 사유하고, 이곳에서 포스트-포스트모던의 문학주체들이 펼치는 문화정치와 인식 및 교양의 갱신을 면밀히 주시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계몽’이 아니라, 자신의 ‘좋은 취향’을 시민사회의 공통감각으로 등재시키기 위한 끊임없는 ‘시도’의 형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100쪽)
뛰어난 지식이나 기술이 없어도, 내 “좋은 취향”을 널리 나누기 위해서 “시도”는 해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미지가 울고, 분노하고, 후회하고, 생각하고, 망상을 펼치던 침대”에 누워 “수많은 ‘고급’ 정보와 ‘미친년’들의 보고인 트위터에 접속”하는 것처럼 바로 “지금, 여기”(377쪽)에서 다시 문학의 주체, 문화의 주체가 되려고 한다. 소설, 영화, 드라마, 트위터 속의 수많은 일상 조각조차도 나를 살게 하는 이야기이므로, 그것들을 내 식으로 만나고, 사유하고, ‘비평’하고, 나누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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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양선화
출판 편집자/땡땡책협동조합 만년 이사/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 부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