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삶의 한가운데, 루이제린저, 민음사
내 속에 있는 무언가가 <너는 무언가를 이룰 수 있어> 하고 나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이 <무언가를>이 무엇인지 모릅니다만 그것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또 나는 그 무언가를 이루지 못할까 봐 불안합니다. 그 무언가를 영원히 상실할까 봐 불안합니다. 영원히 말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불안의 가장자리, 아직 포착 가능한 불안의 제일 바깥 가장자리에 불과합니다. 실체는 뭔지 모릅니다.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수백 개의 서로 다른 자아가 보여. 어느 것도 진정한 자아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수백 개의 자아를 다 합친 것이 진정한 자아인 것 같기도 하고, 모든 게 미정이야.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 사실은 이 여러 자아 가운데 하나의 자아만을, 미리 정해져 있는 특정한 하나의 자아만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지만
니나가 자유의지, 정의, 사회적 가치, 행동하는 사람, 불안을 껴안고 사는 비범한 사람을 대표한다면, 슈타인은 안정적인 삶, 개인적 가치, 불안을 최소화하려는 일반적인 사람을 대표한다. 자유의지로 대표되는 니나를 성적 호감을 넘어서 동경하기에 니나를 새장에 갇힌 새처럼 만들지 않고 오랜 기간 조력자로 남아있을 뿐이다.
삶에 정답은 없지만 적어도 삶의 주인이 나여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온몸으로 불안을 껴안고 자유의지로 살아갈 용기를 낸 스스로를 응원해 본다.
정작 인생에는 한 가지 계산서도 없고 아무런 결말도 없는데 말이야. 결혼도 결말이 아니고, 죽음도 겉보기만 그렇지 결말이 아니고. 생은 계속 흘러가는 거야. 모든 것은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고 아무 논리도 없으며, 모든 것은 즉흥적으로 생성되고 있어.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서 한 조각을 끌어내서는, 현실에는 없고 삶의 복잡함에 비하면 우스울 뿐인, 작고 깔끔한 설계에 따라 그것을 건축하고 있어. 모두가 꾸민 사진에 지나지 않아. 내 소설도 마찬가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