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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밤이 Jun 30. 2024

아주 보통의 행복

보통의 시간만이 선사해 준다는 것을

저녁 아홉 시,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집으로 돌아와선 대파김치를 황급히 만들기로 한다. 노곤해지는 몸과 달리 손은 바쁘게 재료를 쏟아 넣는다. 대파 한봉을 주문했을 뿐인데 냉장고 한 칸을 꽉 채울 만큼의 양이 배송되어 이래저래 처치곤란이라 김치를 만들겠다고 결심한 지 일주일째. 말라가는 대파를 보고 있으니 더는 미룰 수 없어 빗소리와 함께 대파를 쓱쓱 썰고 참치액젖과 올리고당, 다진 마늘, 참깨를 버무린다.


알싸한 파향이 혀 끝을 건드린다. 하루 이틀 묵혀 반찬으로 먹을 기대를 해본다. 대파김치를 하느라 덥지도 않지만 습한 날씨에 땀이 삐질 거린다. 오전에 했던 하체운동이 땀구멍을 열었으리라. 운동 후 제대로 씻지 못한 채 합정에서 경기도 광주의 옛 회사동료의 집까지 다녀오느라 꿉꿉한 기분이 하루종일이었다.


그럼에도 모든 게 귀찮다고 느껴져 냉장고에서 잘라놓은 수박을 꺼내 들고 냅다 요가매트 위에 엎드렸다. 먹고 누우면 소가 된다는 얘기를 누차 들어오며 컸음에도 누워서 먹는 건 소가 돼도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편하다. 이제는 이런 잔소리를 해줄 엄마와 떨어져 있기에 나는 끝까지 엎드려 수박을 다 먹어치운다.


쩍 소리를 내며 끈적거리는 몸을 일으킨다. 이제 이 꿉꿉하게 내 몸을 감싸고 있는 땀들을 씻겨버리고 싶어졌다. 방 안에서 훌러덩 모든 옷들은 벗어 빨래바구니에 던지듯 넣어버리고 클렌징폼을 얼굴에 바른다. 하얀 거품이 풍성해질수록 깨끗해지는 기분을 느낀다. 이윽고 칫솔 위에도 하얀 치약이 올라가고 저녁에 먹은 각종 돼지고기들을 차근차근 치아 사이사이에서 끄집어낸다.


이윽고 따듯한 물을 목 언저리부터 흘린다. 몸 구석구석 자유롭게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다시 잡아   피부의 표면을 가볍게 쓰다듬고 샤워타월에 한 줌 바디워시를 부어 거품을 일으킨다. 얼굴에 이어 온몸에도 거품이 엉겨붙는다. 샤워타월을 잡고 거품을 이용해 팔, 가슴, 허벅지, 발가락까지 마치 불순물이 눈에 보이는 것 마냥 거칠게 닦아낸다.


할 일을 마친 거품들은 물줄기에 힘없이 미끄러져 내려간다. 거품같이 사라진다는 것은 어쩌면 거품주인을 위해 제 몸을 바쳐 보이지 않는 각종 오염들을 껴안고 죽음을 향해 미끄러지는 것이겠지. 거품들 덕분에 찐득했던 몸이 부드러워졌다. 독립하면서 새로 구입한 호텔식 수건이 더욱 보송하게 만들어주었다.


바로 나와서 아무것도 입지 않고 선풍기를 틀고 침대에 축 늘어져본다. 젖은 머리가 베개에 닿아도 상관없다. 바람은 방안을 뚫고 내 피부로 다가온다. 바람의 손길은 부드럽고 간질거린다. 히죽거리게 되는 입가.


알싸한 대파김치, 개운한 거품, 고요한 방안, 엷은 조명, 시원한 바람 그리고 제멋대로 할 수 있는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 이게 바로 보통의 시간이 눈치채지 못하게 주고 있는 특별한 행복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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