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승문보 Mar 12. 2021

사랑은 삶을 닮아, <117편의 러브레터> (2015)

피테르 가르도시의<117편의 러브레터> (2015)

메인 포스터 제공: 제공: ⓒ알토미디어㈜


영화에서 빈번히 사용되는 소재를 하나 꼽으라면 바로 ‘편지’일 테다. 최근 국내에 개봉한 영화를 살펴보면 카림 아이노우즈 감독의 <인비저블 라이프>(2019)는 서간체 형식으로 진행되며, 수신되지 못한 편지들은 브라질의 1950년대 이후 현대사를 환기하는 역할을 한다. 2021년 2월에 개봉한 <라스트 레터>(2020)는 이와이 슌지 감독이 <립반윙클의 신부>(2016)를 기점으로 새로운 이와이 월드를 만드는 작업을 잠깐 멈추고, 작별 편지를 매개로 <러브레터>(1995)를 중심으로 쌓았던 옛 이와이 월드를 직접 폐장하려는 영화다. 즉, 영화 속에서 편지가 수행하는 역할의 스펙트럼이 넓다. 피테르 가르도시 감독의 <117편의 러브레터>(2015)에서 편지는 삶, 사랑, 그리고 기적을 개척해내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기본적인 역할에 충실한다. 피테르 가르도시 감독은 부모님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토대로 소설 『새벽의 일기』를 먼저 집필했고 이후에 이를 영화화했다.


스틸컷 제공: ⓒ알토미디어㈜


오프닝 시퀀스에서 예루살렘의 일상과 노년의 릴리의 일상을 교차 편집으로 보여주다가, 노상 카페에 멈춘 노년의 릴리가 편지 다발을 카메라를 향해 보여준다. 그리고 노년 릴리의 회상과 함께 <117편의 러브레터>는 과거로 시간 이동을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강제 수용소에서 해방된 25세 미클로시(밀란 쉬러프)는 스웨덴 소재 요양소로 이동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심각한 폐 질환으로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새벽만 되면 고열 때문에 고통스러워하지만 미클로시는 절대로 절망하지 않는다. 게다가, 의사가 비관적인 의사 표현을 해도, 미클로시는 희망적인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그리고 운명의 여인을 만날 수 있다고 굳건히 믿는다. 종종 삽입되는 ‘바닥 위에서 의자로 균형 잡기를 시도하는 미클로시의 장면’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미클로시는 본인의 믿음을 실천하고자 자신처럼 홀로코스트에서 생존한 헝가리 여성 117명의 요양소 주소를 구해 편지를 보낸다. 상당수가 회신하지 않았으나 미클로시의 편지에 진심을 느낀 19세 릴리(에모크 피티)가 그와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는다.


스틸컷 제공: ⓒ알토미디어㈜


서로의 얼굴을 모르지만 편지 덕분에 미클로시와 릴리는 미소를 되찾기 시작한다. 물론 두 사람의 주변에는 이들의 소망을 위협하는 불안과 죽음의 이미지가 산재한다. 마치 아녜스 바르다의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1962)처럼 말이다.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에서 얼마 전에 건강 검진을 받은 클레오(코린 마르샹)는 위장암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에 질린다. 그리고 클레오는 파리 14구를 방랑하는데 무서운 분장을 한 채 차도에서 난동을 부리는 예술 학교 학생들, 상점 진열장에 비치된 섬뜩한 가면들, 깨진 손거울, 개구리를 집어삼키는 기인 등 불안을 증폭시키는 다채로운 이미지들이 그녀를 위협한다. 이런 방식으로 <117편의 러브레터>에서는 악성 결핵 때문에 갑자기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생존자, 아내의 사망 소식에 자살한 동료, 천장에 비치는 휑한 나무 그림자, 릴리의 지인 유디트(안드레아 페트릭)가 태워버린 편지와 그 흔적, 갈기갈기 찢겨진 겨울 코트 등 여러 이미지가 중간중간 프레임에 포착되며 이들의 삶에 관한 믿음을 계속해서 공격한다. 이에 덧붙여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처럼 가끔 주인공의 시점 숏과 리액션 숏을 주관적 편집으로 맞물리게 함으로써 불안의 이미지를 응시하는 순간에 긴장감을 강화한다.


스틸컷 제공: ⓒ알토미디어㈜


그렇지만 미클로시와 릴리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72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은 첫 만남에서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한다. 유디트가 이들의 결혼에 훼방을 놓지만, 미클로시는 성탄절 이틀 전에 요양원을 탈출하면서까지 릴리와 삶을 개척하고자 노력한다. 결국 두 사람은 많은 사람의 축복을 받으며 부부의 연을 맺고, 1946년 드디어 고국 헝가리로 송환된다. 이렇게 영화가 끝날 찰나에 피테르 가르도시 감독은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던 미클로시가 '사랑으로 뭐든 극복할 수 있다는 건 삼류소설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비웃듯이 52년이나 릴리와 함께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117편의 러브레터>가 전하는 결말이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면, 이를 설명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밖에 없다. 미클로시와 릴리의 굳건한 삶의 태도를 닮은 사랑이 일궈낸 기적 때문이라고.


스틸컷 제공: ⓒ알토미디어㈜

※ 개봉 전 배급사 알토미디어㈜에서 제공한 스크리너로 관람한 후에 작성한 글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