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개발자에게 개발자의 일을 설명하기
대전에 지인을 만날 일이 있어 서대전역에서 택시를 탔습니다. 한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 기사님께서 절 맞이해 주셨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으나 그 기사님께선 굉장히 말 수가 많으셨습니다.
기사 : 서울에서 오셨어요?
나 : 네 직장이 서울 이어서요.
기사 : 무슨 일 하세요?
나 : IT회사 다녀요
기사 : 혹시 개발자세요?
택시 기사님께서 "프로그래머"도 아닌 "개발자"라는 단어를 아는 게 흥미로웠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말을 좀 더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기사 : 제가 작은 앱을 하나 만들고 싶은데.. 이런 거 뚝딱뚝딱 만드시겠네요?
나 : (???) 무슨 앱이요?
기사 : 그냥 작은 쇼핑몰 앱을 만들고 싶어서요. 이거 어려운 거예요?
나 : .........
저는 커머스 회사에서 상품 쪽 서버 개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쇼핑몰의 상품 1개의 상세 화면을 본다고 가정합시다. 쉽게 생각하면 사진 몇 장, 상품 소개글 몇 글자 있는 웹사이트 1개이지만 실제로 그 화면을 그리기 위해선 굉장히 많은 데이터들을 관리해야 합니다.
상품 기본 정보 (상품명, 가격, 할인 가격, 판매 기간, ... 등등 수십 개의 필드들)
재고, 잔고, 판매수량 등 시시각각 변하는 데이터들
이미지 (상품당 n개, 검수시스템 연동, 썸네일 처리 등등의 연동)
조합형 옵션 (사이즈, 컬러 조합, 그 조합에 따른 재고, 가격, 이미지 등)
.... 등등 수십 개의 테이블로 조합됨..
근데 상품은 그렇다 치고, 주문은? 정산은? 배송은? 클레임은?
물론 이런 사항들을 비개발자 택시기사님께 완벽히 이해시킬 순 없었습니다. 그냥 웹페이지 1개를 생각하시면서 "작은 쇼핑몰"이라고 하셨겠죠. 하지만 그 작은 쇼핑몰을 위해서는 수십, 수백 개의 잘 짜인 데이터 구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냥 저는 "하하하" 웃으며 이전 글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냥 설명을 포기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택시 기사님께서는 "작은 쇼핑몰 앱"이라고 하셨습니다. 비개발자 친구들에게 "너는 무슨 앱을 만들어보고 싶어?"라고 물으면 어떤 대답을 할까요?
나는 강아지를 시간 되는 사람들끼리 돌봐줄 수 있게 중개하는 앱을 만들고 싶어.
나는 소개팅 앱을 만들고 싶어.
나는 중고 물품을 사고파는 앱을 만들고 싶어.
...... 등등 뭔가 거창한 것들..
(실제로 기획, 디자이너 등 비개발 직군에게 물으면 위와 같은 류의 답이 꽤 있습니다.)
이런 것을 앱 아이디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사실 맞긴 맞습니다. 왜냐면 앱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요.
그럼 다시 바꿔서 질문을 해봅시다.
위 아이템들은 반드시 앱이어야만 할까요?
앱만 개발하면 저것들을 이뤄낼 수 있을까요?
답은, "아니요"입니다.
우선 위 서비스들은 전부 회원제이므로 회원 관리가 필요합니다.
또 회원들이 상호작용 할 콘텐츠들도 관리해야 합니다.
즉, 서버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위 아이디어들은 앱 아이디어가 아닌 "서비스" 아이디어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서비스의 프레젠테이션 레이어로서 앱을 사용할 뿐입니다. 꼭 앱이 아니어도 되며 웹이어도 됩니다. 심지어 오프라인이어도 됩니다. 물론 셋 다 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비개발자가 아닌 실제 개발자들에게 "넌 무슨 앱을 만들어 보고 싶어?"라고 물으면?
의외로 거창한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비개발자들의 성에 차지 않는 초라한 아이디어 일 수 있습니다.
이미지 올리면 시바견 합성 짤 만들어주는 앱에 애드센스 붙이고 돈이나 벌자
유니티로 병맛 게임이나 뚝딱 만들어서 애드센스 붙여서 돈이나 벌자
... 대충 뭐 해서 애드센스 붙여서 돈이나 벌자
(참고로 애드센스란 구글에서 제공하는 광고 플랫폼입니다.)
실제로 구글 플레이에 병맛 게임이나 잉여 앱이 많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자신의 앱 개발 지식을 기반으로 정말 사소한 아이디어로 돈을 벌고 계시죠. 이런 것이 가성비 짱 먹는 생계형 "앱 아이디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느 때처럼 저 날도 비개발자를 이해시키는데 실패하였습니다. 죽을 때까지 성공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