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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연 May 10. 2019

각자 흐르듯 살다가 자연스레 만나는 볶음밥

<중국집- 피아노 조율사의 중식 노포 탐방기> 리뷰


"각자 흐르듯 살다가 자연스레 만나도 되는 게 좋다. 그런 관계가 부담이 없다. 동해루 볶음밥처럼."(22p)


'중국집'의 저자 조영권은 피아노 조율사다. 그의 독특한 취미는 조율 의뢰가 들어오면 이를 구실삼아 평소 찜해둔 그 동네의 중국집을 가보는 것이다. 수십년째 해오는 조율 일은 특별할 게 없는 반복적 업무인 것처럼 보이지만, 중국집 기행이 더해지면서 그의 일상은 여행이 된다.


이 책은 몇 가지 측면에서 다른 미식 관련 책들과 다르다고 느꼈다. 먼저 매우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행태로서 미식을 다룬다는 점이다. 또 정밀한 맛의 평가보다 그날의 삶의 기록으로서 미식이 자리매김한단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전국 방방곡곡 37곳의 중국집을 다닌 기록이다. 조율을 의뢰한 사람, 그와의 관계, 조율이 들어오게 된 사연, 피아노의 상태 등이 먼저 서술되고, 정작 조율 작업 자체는 한 듯 만 듯 재빨리 넘어간 다음 여지없이 근처 중국집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러한 패턴이 37번 반복된다. 사연도 제각각이고 중국집도 다 다르지만 각각의 내용이 엄청나게 차이날 요소가 없어서 단조롭게 느껴진다.


근데 그게 이 책의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반복적인 형식이 주는 권태마저 이 책의 소시민적이고 마이너한, 독특한 분위기를 살리는 듯하다. 아마도 37곳 중국집 대부분이 도심 한가운데에 있지 않고 비교적 한산한 도시 변두리나 지방에 자리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서인지 여백이 느껴지는 문체가 공간들과 어울리고 묘한 중독성이 있다고 느꼈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단순한 그림체의 만화도 이런 정서에 한몫을 한다.


또 한가지. 저자가 책에서 맛을 표현하는 방식은 '수요미식회'와 같은 TV 맛집 프로그램의 그것과 다르다. 표현력이 풍부하거나 유려해서 음식의 맛이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것도 아니고, 냉철한 심미안을 갖춰서 각 식당의 특징과 장단점을 예리하게 꼬집는 것도 아니다. 각 식당의 맛을 정확히 평가하거나 줄 세워 독자에게 정보를 주려는 의도는 애초에 없었던 것 같다. 그는 맛을 평가하기보다 자기 방식대로 묘사한다.


"빠르고 규칙적인 웍 소리가 들린다. 국자로 꾹꾹 한참을 눌러가며 만들어 고슬고슬하고, 수분을 잘 날렸으며 밥알이 기름으로 잘 코팅된 맛있는 볶음밥이다. 겉에만 익힌 반숙 달걀프라이를 숟가락으로 터뜨리니 볶음밥 위로 주르륵 흘러내렸고, 먼저 노른자에 비벼 한 입 맛보았다. 고소함과 부드러움이 입안 가득 퍼지며 따끈함과 함께 콧소리가 나왔다."(127p)


저자는 음식의 맛에 객관적으로 별점을 매기기보다 식당의 '풍경'을 담는 데 주력한다. 손님이 들어왔을 때 누가 접객을 했고 누가 웍을 잡았는지, 반찬은 어떤 것이 나왔고 가게의 다른 손님들을 비롯해 전반적인 분위기는 어땠는지, 역사가 얼마나 된 가게이고 가업이 계속 이어질지 등을 관찰한다. 맛은 이런 풍경들과 자신의 그날 컨디션, 허기의 정도와 맞물려 두루뭉술하게 평가될 뿐이다. 매우 흡족스러울 때도, 다소 실망스러웠을 때도 표현이 과장되지 않다.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볶음밥의 조리법, 간짜장의 면 상태 등이 소개되지만 그 기준 또한 절대적이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저자가 비전문가이고, 평소 블로그에 기록한 글을 토대로 책을 냈기 때문에 이 글이 이러한 '일상적 미식'의 성격을 띠게 됐을 것이다. 역으로, 피아노 조율사란 직업을 가진 사람이 블로그에 올린 글들이 호응을 얻어 책으로 출판되고 읽히는 시대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단 생각도 든다. 특별한 날 맛보는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이나 파인다이닝 못지않게 발에 치이는 중식당을 대상으로도 미식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고, 이러한 일상적 스토리텔링이 맛 칼럼니스트나 전문가의 글보다 공감을 얻기도 한다.


무던한 문장들 속에서 '각자 흐르듯 살다가 자연스레 만나도 되는 게 좋다'는 문장이 유독 와 닿았다. 저자의 성격뿐 아니라 이 책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말이 아닐까.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 만에 한 번씩 만나는 오랜 인연, 일하러 간 김에 자연스럽게 만난 볶음밥. 전국에서 제일 잘한다는 중국집을 수소문해 날잡고 찾아가 줄서 먹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미식 행태다. 단조롭지만 정직하고 어딘가 곤조가 느껴지는 글을 읽으며 미식의 정의와 함께 미식의 다양한 형태를 고민하게 됐다. 동시에 조영권이란 사람을 만나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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