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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연 Jul 13. 2019

'봄밤', 사랑이란 편견에 맞설 용기를 갖는다는 것

사랑의 환상 이면을 조망한 '봄밤', 평범한 로맨스물을 뛰어넘다

# 어느날 약국으로 술이 덜 깬 한 여자가 헐레벌떡 들어온다. "술 깨는 약 주세요." 약을 먹은 여자는 지갑을 놓고왔단 사실에 당황하다가 말한다. "내 전화번호 줄까요? 혹시 못 믿을까봐요." 가만히 여자를 쳐다보던 남자는 자기 번호를 알려준다. 그리고, 여자를 따라가 택시비를 준다. "꼭 갚아요. 이름이 뭐예요? 난 유지호예요." "이정인이에요."



드라마 '봄밤'의 도입부는 전형적인 로맨스 드라마의 작법을 따른다. 여자와 남자는 어느날 갑자기 우연찮게 서로의 삶에 들어간다. 둘이 사랑에 빠지게 되는 데는 논리적인 설명이 필요치 않아 보인다. 드라마는 왜 둘이 갑자기 끌리게 됐는지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심지어 여자에게는 4년을 만난 남자친구가 있고, 그 남친은 남자의 학교 선배이며, 남자에게는 아이가 있다.


이쯤되면 전형적인 치정극이 예상된다. 그런데 둘은 이 사실을 극 초반부, 1회에 서로에게 오픈한다. 여기서부터 '봄밤'은 한국의 대다수의 드라마와 결을 달리하기 시작한다. 보통은 남녀의 장밋빛 연애를 잔뜩 보여주고, 막판에 갈등요소를 드러내면서 이를 극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보통은 클라이막스로 기능할 갈등요소를 초반에 까발린 것이다. '봄밤'의 남녀는 덜컥 환상에 빠지지 않고 초장부터 현실을 직시한다.


다른 드라마들과의 또 다른 차별점은, 무엇보다 두 주인공이 솔직하단 점이다. 자신의 현실적인 처지에도 불구하고 가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보통의 한국 로맨스 드라마의 주인공이라면 사회적인 금기, 관습, 남의 시선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숨기느라 끙끙대다 서로의 마음을 모르고 지내거나 오해하는 에피소드가 줄줄이 이어질 텐데 이정인과 유지호는 시종일관 서로에게 자기 감정을 아주 솔직히 드러낸다.



둘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되, 그것을 위악적으로 남을 상처주는 데 쓰는 게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는 데 쓴다. 둘은 자신의 처지와 마음의 이끌림 사이에서 흔들림을 반복하지만, 어쨌든 매 순간 솔직하다. 그래서 둘의 사랑은 사회적인 고정관념으로 보면 손가락질 받을 요소가 다분함에도, 어느 순간 응원하게 된다.


김은 작가와 안판석 감독은 결론적으로 전형적이지 않은, 매우 차별화된 로맨스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한지민과 정해인이라는 최고의 비주얼 배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봄밤'은, 남녀간의 달달한 사랑의 환상을 말하는 드라마가 아니다. 오히려 '폭력 남편', '미혼부', '미혼모', '이혼'이라는, 사랑의 어두운 면에 대해 질문한다. 그리고 이 질문을 풀어가는 것 역시 고정관념을 보란듯 깨뜨리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포인트는, '강압적이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에의 저항이다. 극중 정인은 사회의 편견에 가장 정면으로 대항하는 인물이다. 스펙 멀쩡한 오랜 남자친구를 버리고 그 남친의 학교 후배, 심지어 미혼부와 만난다면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뻔하다. 본래 주관이 강하고 강직한 정인은, 기석과의 영혼 없는 만남에서 자존감을 잃어가던 중 유지호를 만나며 자신을 되찾는다. 정인은 1회에서 애가 있다는 지호의 고백에 "유부남이었어요? 근데 뭘. 나쁜놈은 아니잖아요"라고 한다. 기석으로 대변되는 가부장적인 세계에서 지호는 '가엾고 딱한' 동정의 대상이자, 감히 기석과는 비교도 안 되는 하자있는 남자지만, 정인은 지호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준다.



정인의 언니 서인은 3자매 중 맏이로서 책임감과 부모의 기대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떠밀려 결혼한 케이스다. 아나운서로서의 사회적 시선, 부모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남편의 폭력을 참고 살다가 용기내 이혼을 결정한다. 또 아이를, 온전히 지켜내기로 한다. 정인이 동생 재인이는 '사이다'다. 3자매 중 막내로 부모 기대에는 가장 못 미쳤지만 사리분별력이 뛰어나고 대범하다. 3자매는 성격이 제각기 다르지만 공통점은 사회의 후진 편견에 갇혀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을 조건이나 스펙과 관계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을 지녔다. 그건 엄마한테 온 것이다.


'봄밤'에서 길해연이 연기하는 엄마(이름이 거의 불리지 않는다)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속물적이고 강압적인 아버지 아래서 세 딸이 속물적이지 않게 자라나기까지 따뜻하면서도 강인한 엄마의 역할이 컸다. 엄마는 가부장적인 남편에게 맞춰주며 사는 듯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엔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싸운다. 서인의 불행한 결혼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정인의 새로운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약'이 된다.


정인 엄마와 지호 엄마가 만나 말 없이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장면은 이 드라마가 지향하는 가치관을 보여준다. 자신의 딸이 미혼모가 되는 것이 죄가 아니듯, 지호에게 아이가 있는 것도 죄가 아니다. 각자 인생의 힘든 결정의 순간마다 온전히 서로의 편이 돼주는 세 자매의 우애도 이 드라마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공감과 연대, 우정, 대화의 힘을 드러낸다.



'봄밤'에선 가부장적 남자들 여럿 등장하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이들 간 서열이 정리되는 게 퍽 재밌다. 기석의 아버지가 그중 가부장제 '고수'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며, 정인 아버지는 막판에 첫 딸의 이혼 때문인지, 기석 아버지에게 질려서인지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린다. 남서방과 기석은 가부장적이란 표현이 무색할 만큼 뒤로 갈수록 찌질함의 절정을 달리는데, 마지막회에 기석이 남서방과의 술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는 건 명장면이라 할 만하다. 그래 폭력남편보다야 기석이 낫지. 이들과 대척점에 서 있는 지호는 여리하고 유순해보이는 외양과 달리 강한 내면을 지녔다.


'봄밤'은 결국, 아버지의 허락은 받지 않은 채 끝났다. 하지만 지호와 정인은 아버지를 포함해 어떤 세상의 편견과 시련도 이겨낼 것이란 걸 우린 짐작할 수 있다. "저라는 사람 하나만 믿고 왔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내야죠." "난 엄마아빠한테 화려하게 사는 모습보다 맘 아프게 봐야 하는 자식이 안 되는 게 더 가치있다고 생각해."



사랑은 용기다. 사회의 편견에 맞서야 할 수도, 부모의 기대를 잠시 저버려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용기를 내야만 진짜를 찾을 수 있다. 배경과 스펙이 아무리 좋은들 기석은 아니었고, 애가 있어도 지호는 맞았다, 정인에게는. 나의 진짜 욕망을 직시하고, 그것을 향해 직진하는 용기를 갖자고 다짐했다. 일단 지갑을 잃어버려야 하는 건가.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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