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연 Mar 16. 2021

'미나리 원더풀!' 아프게 아름답게 성장하다

“스트롱 보이”를 키워내는 우리 할머니, 우리 가족의 이야기

나에겐 할머니가 많았다. 이 말이 웃기다고 엄마가 말하신 적이 있지만, 진짜다. 외가와 친가 조부모가 내 어릴 적 다 계셨던 데다 무엇보다 (외)증조할머니가 계셨기 때문이다. 같은 아파트에 사셨던 증조할머니댁은 거의 집처럼 자주 가있었고, 난 우리 증조할머니를 정말 사랑했다. 인자하고 정 많은, 살아있는 천사였던 울 할머니 집은 그 동 할머니들의 집합소였기에 난 온갖 할머니들에 둘러싸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요즘 유행하는 트로트를 난 그때 이미 섭렵했고 춤도 추고 노래도 따라했다. 난 울 할머니를 정말 좋아해서 맨날 할머니 품으로 파고들고 6.25 때 피란 얘기 해달라고 조르고(백번 들음) 같이 자고 그랬다. 엄마한테 혼났을 때도 당연히 할머니는 내 편이셨다. 속상한 얘기, 어디서도 말 못할 얘기도 이상하게 할머니 앞에선 술술 나왔다. 기도를 하기 시작한 이래 내 기도제목 일순위는 "할머니가 돌아가시지 않게 해주세요"였다. 할머닌 향년 94세, 내가 고3 때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꿈에 정말 자주 나오신다. 난 꿈에서 할머니를 만지고 부비고 하다가 “할머니가 돌아가시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다. 수십년째, 난 꿈에서 여전히 속는다.



영화 ‘미나리’엔 할머니가 나온다. (스포 주의) 데이빗이 “할(hal)무니 할무니”라 부르는. 영화에서 내가 울컥한 대목은 다 할머니가 나온 장면이긴 했다. 데이빗이 자기 전 “나 죽기 싫어요” 하자 할머니는 천당 안 가도 된다며 꼭 껴안는다. 발을 다치곤 씩씩하게 걷는 손자에게 “스트롱 보이”라고 하는 할머니. 걱정 많고 잔소리 많은 엄마와 달리 할머니는 데이빗을 자유롭게 풀어주고 뱀이 출몰하는 곳으로 데려가 어디서든 잘 자라는 미나리를 심는다. 할머니들은 오래 살아서 인생의 진리를 알고 있는 것일까.


할머니는 극에서 종반부에 위기를 불러오지만, 역설적으로 그 사건은 가족이 다시 끈끈해지는 계기가 된다. 물론 말이 쉽지 그게 얼마나 속상하고 허망한 일인가. 나도 너무 눈물이 났는데, 팔할은 순자의 허망하다 못해 절망적인 표정 때문이었다. 넋나간 표정으로 가족들에게서 멀어지는 순자를 ‘스트롱 보이’가 막아선다. 데이빗이 처음으로 뛰는 순간이다. 그 순간, 불의의 사고와 위기는 가족이 헤쳐나갈 수 있는 것이 된다. 아이는 알게 모르게 할머니의 사랑을 먹고 성장했다. 할머니의 ‘원더풀 미나리’ 정신을 전수받은 데이빗과 가족들은 또 굳건하게 다시 자랄 것이다.



사실 난 극 중 할머니 못지않게 아버지에게 큰 감흥을 받았다. 잘해보려는 열정과 의지가 가득한, 그러나 다소 현실감이 떨어지고 운도 따르지 않는 가장 제이콥. 모니카의 답답함이 이해는 가면서도 제이콥의 성실한 노동과 진실함에서 자꾸 희망을 기대하게 됐다. 복잡다단한 이민 가정의 가장 내면을 너무나 설득력 있게 연기한 스티븐 연 덕분에 마음이 배로 아팠다. 소위 나쁜 남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좋은 남자라기엔 모자란 현실적인 캐릭터가 좋았다. 그렇게 어렵다는 ‘영어 못하는’ 연기까지 너무 리얼하게 해놓고, 정작 “Hatchery(회초리) 가져와”라고 너무나 진지하게 말해서 빵터지기도..



각종 해외 시상식에서의 낭보가 국내에 알려지면서, 이 영화의 국적과 정체성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것 같다. 난 미나리가 미국 감독과 제작사가 미국의 자본으로 만든 미국 영화지만 어떤 의미에선 국내 영화보다 ‘한국적인 것’을 더 잘 그려냈다고 본다. 어떤 문화적 특질은 다른 것과의 비교 속에서 더 존재감을 발휘하니까. 내 지인은 가장 찡했던 장면이 순자가 바리바리 싸온 고춧가루를 트렁크에서 꺼냈을 때라고 했다. 극 중 모니카도 이걸 받아들고 우는데, 외국에 나가보면 안다. 그 단순해 보이는 고춧가루가 구하기 어렵다는 걸. 그밖의 여러 기복신앙적인 부분과 특유의 근면성실함, 약해보이지만 강인한 생명력 같은 것들이 '미나리'라는 상징을 매개로 그려진다. 이건 한국 가족의 초상이면서, 아메리칸 드림을 좇는 이민자 가족의 초상이자, 보통의 가족의 초상으로도 읽힌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선전을 한국만의 성과로 과장하는 일도, 한국과 무관하다고 폄하하는 일도 부적절한 것 같다. 전 세계 많은 이민자들이 우리 가족 이야기라고 눈물을 글썽였으며, 나같은 비이민자도 감동을 받으며 봤으니.



이 영화는 손꼽아 기다리다 개봉일에 봤는데, '기생충' 이후 약 2년 만에 있는 일이었다. 기생충은 매우 쇼킹하고 창의적이고 뛰어난 영화였지만(난 두 번 보고서야 확실히 깨달았다), 마음이 더 가는 쪽은 미나리다. 메시지가 엄청난 것도 아니고 대단한 수사나 영화 기법을 쓰지도 않았는데, 이토록 순수하게 정서를 감화시킬 수 있을까. 이 영화만이 갖는 차별성을 생각해보면, 결국 모든 걸 아우르는 키워드는'선함'인 것 같다. 가족이라는, 인간의 원초적인 부분을 너무나 따뜻한 시선으로, 결코 낙천주의나 비관주의에 빠지지 않고 담담하게 그렸다. 영화를 포함해 모든 작품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달리 평가될 수 있다고 보는데, 이 영화가 재미없다거나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랑은 별로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을 것 같다. 그런 편견이 강하게 들 만큼 좋은 영화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엠넷 포커스는 '포크 스타' 만들기에 성공했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