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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로소픽 Jun 18. 2019

'나의 아저씨'가 여혐 드라마라고?

[출간 후 연재] #02. 이선옥의 《우먼스플레인》


이선옥: 오늘은 대중문화에 대한 PC주의적(정치적 올바름) 검열 이야기를 할 거예요. 

황현희: 방송과 대중문화에는 표현의 자유가 있는데, 자체적으로 검열하고 표현을 제약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요. 저는 현직으로 뛰었기 때문에 이런 일을 많이 겪었거든요. (…중략…) 코미디뿐만 아니라 대중문화 전반적으로 표현하고 창작하는 모든 장르에 제재가 들어옵니다. 소위 프로불편러라고 하는 분들이, 뭘 하기만 하면 뭐 때문에 안 된다 그래요. 

저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아이디어 회의가 예전에는 웃기는 포인트를 찾는 회의였는데 요즘은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욕 안 먹을까, 어떻게 하면 지적받지 않을까. 개그맨들이 모여서 아이디어 회의를 하면 옆에서 ‘그건 뭐 때문에 걸릴 거야.’ 하면서 잡아냅니다. 

이: 프로불편러의 시각으로 자기검열을 하게 되는 거죠. 

황: ‘어떤 할아버지가 이런 얘기를 했는데’ 그러면, 노인 비하라고 안 된다고 해요. 애들 분장하고 어른처럼 행동하는 걸 하자고 하면, ‘야, 그거 아동학대에 걸릴 수 있어.’ 이런 식이에요. 여성에 대한 건 아예 할 생각이 없고요. (…중략…) 

이: 이런 사례는 한도 끝도 없을 거예요. 드라마 <나의 아저씨>가 20대 여성과 40대 남성이 주연으로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여혐 드라마로 규정되고 엄청 비난받은 일도 있잖아요.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 포스터 ⓒ tvN


김용민: 40대 여자와 20대 젊은 남성이 연애하면 괜찮나요? 


이: <밀회>도 있었고, 예전 드라마에 얼마나 파격적인 소재가 많이 나왔느냐면 여고생과 교사의 사랑, 지금 보면 완전 패륜으로 엮일 소재죠. 동성애 드라마도 있었어요. 퀴어 소재도 다뤘고. 드라마가 계속 다룬 주제인데 지금은 러브라인을 해명해야 하는 상황까지 왔어요. 도대체 이걸 왜 해명해야 하는지……. 

<나의 아저씨>에는 40대 남자와 20대 여주인공의 러브라인이 없어요. 그냥 둘이 위로하는 관계예요. 애틋함도 없었어요. 그런데 둘이 분명 사랑할 거라는 전제로 왜 20대 여자가 40대 남자를 위로해야 되느냐, 우리 사회 가부장 구조가 만들어낸 영포티 환상을 재연한다, 이런 비난을 한 거예요. 영포티라는 거 아시죠? 

김: 모릅니다. 

이: 영포티라고 40대를 얘기하는데, 처음에는 성별 구분이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개저씨’처럼 40대 남성을 비하하는 용어로 쓰여요. 90년대에 대학생이던 남성들이 40대가 됐는데 자기가 개인주의자이고 쿨하다, 그래서 여전히 여성한테 잘 먹힌다는 환상에 빠진 한심한 남자들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나의 아저씨>가 영포티를 위무하는 드라마라는 해명이 나오니까 왜 20대 여성이 위무해야 되느냐고 합니다. 

편의상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분들을 PC주의자로 칭하겠습니다. PC주의자들은 한 장면, 한 대사, 한 표현으로 창작물을 규정하고 검열하려고 들어요. 그 한 장면 때문에 드라마 전체가 가치 없다는 듯이 폄훼하면서 보이콧을 주도하거나 해당 출연자에게 사적인 테러를 가하고 엄청나게 욕을 합니다.  (…중략…) 


기준을 생각한다


이: 일단 예술, 창작, 표현의 자유에 대한 개념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 PC주의자들의 검열이나 압박의 기준은 그냥 ‘내가 보기 싫은 것’ ‘내가 보기에 불쾌한 것’이에요. 약자에게 고통스러운 감정을 줄 수 있는 표현이 대중문화예술에 있어선 안 된다는 거죠. 


그런데 감정은 규제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대중문화로 표현되는 모든 것에서 누군가는 불편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흔히 정상가족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밥상에 앉아서 행복하게 밥 먹는 장면만 봐도,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싫어하거나 자신이 정상가족 환경에 있지 못한 사람은 보기 싫은 거예요. ‘왜 세상은 저렇게 행복한 사람들의 모습만 보여주지? 나는 고통스러워.’ 그러면 정상가족의 밥상머리 모습을 없애야 합니까? 

이렇게 치면 이성 중심의 연애도 왜 방송에 이성애자들만 나오느냐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유튜브 같은 콘텐츠 시장에서는 PC주의를 비판하거나 비꼬는 내용이 많아요. PC주의자들의 규제 때문에 피로한 거예요. 피로한 대중들의 콘텐츠로 시장이 하나 형성되어 있어요. (…중략…) 

표현의 자유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우리는 자유라는 개념에 늘 대립항을 놓을 수 있어요. 뭐냐면, 네가 창작으로 그것을 표현할 권리가 있듯이 나는 그게 싫다고 말할 권리가 있다는 거예요. 동성애도 마찬가지잖아요. 동성애자들이 나는 권리가 있어, 하면 나는 그걸 반대할 권리가 있어, 이런 상황인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기준이죠. 

그런데 모든 권리나 자유가 같은 등급으로 놓일 수 없는 상황이 있어요. 예를 들면 도서관에서, 나는 원하는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요. 그런데 나는 여기서 떠들 권리가 있어, 라는 건 같은 대립항이 될 수 없죠. 그러면 어떻게 조정할 수 있을까요? 떠드는 공간과 공부하는 공간을 분리하는 거죠. 휴게실이 있잖아요. 떠들 사람은 휴게실에 가서 떠들라고 하면 조정이 가능해요. 

그런데 한 저자가 어떤 책에서 어떤 표현을 했어요. 그에 대해서 나는 네가 책에 쓴 표현이 너무 싫고 불쾌하기 때문에 그 책이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어, 라고 말한다고 해요. 그럴 때 내가 불쾌감을 느끼는 책이 세상에 없게 할 권리가 표현의 자유와 동등하게 대립항으로 성립할 수 있느냐는 거죠. 도서관에서 떠들 권리처럼, 우리가 주장하는 권리는 사실 같은 등급에 놓을 수 없는, 그래서 기준점을 찾아야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기준점을 찾는 노력을 하기보다는 다수의 혹은 내가 당장 실행할 수 있는 사적인 제재 방식을 통해서, 압력을 통해서 주장을 관철하려고 하죠. 이것은 민주시민으로서 자기가 가진 권한을 넘어선 과도한 권한을 행사하려는 태도예요. 그것은 과거 국가권력이 행했던 것과 맥락상 똑같아요. 내가 힘을 가지면 언제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거니까요. 그래서 배우를 퇴출시키고 배우가 활동하는 플랫폼을 없애려고 하거나 실제 삶에 타격을 주려는 행동을 하고 있어요. 사회적인 대화로 설득하고 타협하고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직접 타격으로 압력을 행사하고 위력을 과시해서 타인을 지배하려는 부당한 욕망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옳지 않습니다. 

김: 그건 어디까지나 폭력이죠.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사람을 매도하는 건 잘못된 건데, 이른바 페미니스트 지식인들은 이런 현상에 대해서 뭐라고 안 하나요? 

이: 그런데 실제로 영향력을 휘두른다는 말이죠. 한 프로에서 어떤 문제적 발언을 했다고 다른 프로그램까지 못 하게 압력을 행사하고 배우나 제작진, 창작자 개인에게 타격을 주면, 당사자가 하차하는 식으로 압력에 굴복해요. 아이유 이지은 씨 같은 경우도 <나의 아저씨> 출연 전부터 이미 이런 문제가 있었어요. 롤리타 논쟁부터 계속 공격받았어요. 하지만 아이유나 유아인의 경우에는 PC주의자들이나 페미니스트들의 압박에 굴복하지 않았어요. 자기가 생각해보니 잘못이었다 혹은 표현이 서툴렀다고 하면 그건 인정하지만, 그밖의 비판에는 굴복하지 않고 자기 길을 갔거든요. 

황: 드라마고 탑 배우급이잖아요. 여기서는 먹힐 수 있는데 그보다 급이 낮은 예능을 한다거나 개그를 하는 친구는 당장 잘라버립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요. 제작진 의식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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